〈 110화 〉 태양과 달의 연회 (4)
* * *
“이쯤 하면 더 할 말은 없는 같군. 사실 따로 상을 내리려 했지만... 그건 이 무례를 넘어간 거로 넘어가자고.”
“...전하의 깊은 배려. 감사합니다.”
“으하하하하! 됐어! 됐어! 전부 잊어버리자고! 그래! 피곤할 테니 가서 쉬게. 으하하핫!”
황태자의 축객령에 알현실 밖으로 나오자 황금 갑옷의 기사들이 범죄자라도 보는 것처럼 나를 노려본다.
“....”
내가 이래 봬도 대가문 칼리오페의 혈족인데 이래도 되나 싶지만....
쟤네는 황실 직속이라 그래도 됐다.
“하아...”
다시 방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결심은 했지만, 황녀와 맞설 생각을 하자 벌써 심장이 꽉 조여왔다.
“...!”
그때 시야가 갑자기 확 어두워지며 등 뒤로 부드럽고도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누구~게?”
눈은 가렸다지만 목소리의 주인에게선 감출 수 없는 벌꿀과 장미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황녀 전하.”
“땡땡! 틀렸습니다. 나는 황녀 전하가 아닙니다.”
“...맞지 않습니까.”
‘침대 위의 왕자’를 사용한 내가 반사적으로 황녀의 손끝을 붙잡고는 뒤로 돌아섰다.
“흐응~. 이건 반칙인데?”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황금색의 파도를 보는 듯한 긴 머리카락,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경박해 보이지 않는 몸짓까지.
태어날 때부터 고귀함을 달고 태어난 자에게만 허락된 분위기였다.
“황녀전하를 뵙...”
내가 한쪽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리아나가 손을 휘저으며 만류했다.
“아아! 무릎 꿇지 마! 그리고 황녀 전하가 아니라 리.아.나! 내가 유진에게 리아나라고 부르라고 한 백번쯤은 말한 거 같은데?”
“...어찌 감히 황실에서 황녀 전하를 이름으로 부르겠습니까.”
“어머, 황실이라 못 부르는 거면 카르네아에서는 이름으로 불러줄 거야?”
“....”
내가 시선을 돌리며 침묵했다.
빈말이라도 황녀에게는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
약속하는 순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받아낼 테니까.
“또! 또! 또!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허리에 양팔을 올린 황녀가 볼을 크게 부풀린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우와! 말 돌리는 거 봐! 뭐, 나는 착하니까 넘어가 줄 거지만!”
황녀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린다.
그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을 보니 그 부드러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녀 전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저에겐 어찌한 일이신지?”
“으응? 딱히 유진을 보러 온 건 아닌데? 유진이 말하는 대로 나는 황녀 전하고, 여기는 황실이잖아. 내 집에 내가 있는 게 이상한가?”
이 넓은 황실에서 하필이면 내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내가 있는 장소에 있을 리가 있냐고 생각했지만, 그걸 말로 꺼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내가 재빨리 대화를 끝내며 걸어가자 황녀가 옆으로 따라 걸으며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지이잉.”
“...”
“...지이이이잉.”
“황녀전하... 제게 무슨 하실 말이라도.”
“어머! 내 눈빛이 닿았나 봐? 역시 유진과 나는 통하는 게 있다니까?”
“...용서하십시오.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내가 무시하며 다시 걸어가려고 하자 황녀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아! 농담! 농담이야! 차암~ 유진은 농담도 모른다니까? 아앗! 할 말 있으니까 기다리라고!”
“...예. 황녀 전하.”
“그래그래, 이 황녀 전하께서 유진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줄래?”
장난기가 가득한 리아나의 얼굴을 보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걱정하지 마! 아주 쉬운 질문이니까.”
“...말씀하시지요.”
“태양과 달.”
“....?”
“그러니까 제국의 태양과 제국의 달. 유진이 보기에는 누가 더 이쁜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며 황녀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분명 쳐다보지 않으려 했는데 붉은 드레스의 끝이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시선이 간다.
마음의 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음에도 홀려버릴 것만 같은 외모.
그것이 바로 리아나 루멘하르크였다.
아마 외모로는 이 세계에서 루시아와 거의 유일하게 견줄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두 사람의 외모는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루시아가 호수에 비친 달처럼 가련한 아름다움이라면 리아나가 화려하게 빛나는 태양의 아름다움이었으니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루시아가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허나, 본심과는 별개로 나는 루시아와의 관계를 숨겨야 했다.
한숨과 함께 본심을 삼킨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응, 유진아.”
“...황녀 전하가 더 아름답습니다.”
내가 ‘침대 위의 왕자’를 최대한 활용하며 말했다.
“태양과 달이 같은 하늘에 떠 있다지만 어찌 감히 달과 태양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밝게 뜬 달이라 할지라도 태양이 떠오르면 모습을 감추는 게 숙명인 것을. 제 눈에는 황녀 전하께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뭐, 뭔가 그렇게 말하니 부끄럽네.”
처음으로 황녀가 말을 더듬는 걸 보았다.
미세한 동공의 떨림, 희미하지만 빨라진 숨결, 손끝과 발끝의 수축, 약간 상기된 얼굴까지.
당연히 저 모든 게 연기겠지만 마치 진짜로 부끄러워하는 듯한 착각을 심어주었다.
‘...말도 안 되네.’
저 정도 수준의 연기를 할 수 있으니, 황실에서도 본성을 감추고 있는 거겠지만 눈앞에서 보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루시아 정도면 상당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보고나니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니 조금 설레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그럼 아니야?”
리아나가 큰 눈을 껌뻑거리며 내게 물었다.
바늘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여기서 부정해버리면 앞서 한 연기가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루시아에게 사과하며 긍정했다.
“...맞습니다.”
“그렇지? 제가 루시아보다 이쁜 거 맞지?”
“...네 맞습니다.”
“헤에, 그렇다네?”
황녀가 내 등 뒤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싸아악─!
황녀에게 너무 집중 한 나머지 주위를 살피지 못한 실책.
하지만 어째서인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또각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루시아가 온몸에서 냉기를 풍기며 다가온다.
이상했다.
서리 정수를 흡수한 이후로 분명 냉기 저항은 거의 최대치일 텐데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다.
“루시아 화난 거 아니지? 어디까지나 재미로 물어본 거니까.”
“...걱정하시지 마시길. 저는 제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평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뭐랄까, 루시아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아... 루시아랑 유진은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기왕 같은 나이로 태어났는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러자 리아나가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참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쌍년이!’
전부 네 탓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집어삼켰다.
“후후훗, 그럼 유진.”
나와 루시아를 번갈아 본 리아나가 즐겁다는 듯 웃더니.
“내일 보자♬”
이내 입술을 스칠 듯이 얼굴을 들이대고는 속삭였다.
“...”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니까 텅 빈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루시아 때문에 말이다.
***
방으로 돌아온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침대에 엎어진 채 다리를 방방 내리쳤다.
‘깜짝... 놀랐네.’
왠지 유진과 루시아의 관계가 수상해서 슬쩍 떠보려 했던 것뿐인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의로 가면이 벗겨졌다.
─황녀 전하가 더 아름답습니다.
아직도 대사를 떠올리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침대에서 일어난 리아나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기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안되죠. 이래서는.’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 따윈 없다는 걸.
눈을 감은 황녀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멜피사”
분명 황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대답이 들렸다.
“...네, 전하.”
“내일이 기대된다. 그치?”
“....”
리아나는 대답하지 못하는 멜피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곳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지는 자신이 있었다.
***
“...”
잠이 오지 않는다.
칼리오페에 있을 때는 하루에 평균 6~7회를 사정한 터라 그런지 불알이 묵직한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절하지 말 걸 그랬나...’
시종이 밤 시중을 들 아이가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했는데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내가 미쳤나?’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 있을 회담에서 황녀를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기는커녕 밤 시중 생각이라니.
정액이 뇌까지 가득 찬 듯했다.
—끼이익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공격할 준비를 하며 문 쪽을 노려보고 있자 익숙한 은발이 눈에 띄었다.
“...루시아?”
“네...주인님...황녀 전하보다 이쁘지 않은 루시아에여.”
루시아의 말투를 듣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여?’
내가 전생하고 나서 초창기에나 들었던 루시아의 말투.
첫 섹스를 한 이후에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황녀의 탓인지 오랜만에 완전히 스위치가 들어간 듯했다.
“주인님. 황녀 전하보다 이쁘지 않은 루시아지만...주인님께 봉사해도 될까여?”
“...루시아. 지금 이러는 건 위험하다.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황실에서는 최대한 접촉을 줄...!”
스르륵—
내가 열심히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루시아가 치마를 들어 올리자 말문이 막힌다.
방에서부터 넣고 온 것인지 보지에는 작은 딜도가 박혀있었고, 딜도 끝에 매달린 애액이 바닥에 뚝뚝 흘러내렸다.
“...헤헤, 황녀전하보다 이쁘지 않은 루시아지만 괜찮아여. 황실의 순찰 루트는 다 알고 있고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왔으니까여.”
우연일지는 몰라도 루시아의 말처럼 지금은 딱 감시가 비어있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야 몇 번이고 재도전하며 알아낸 거지만 순찰 루트는 황실의 안위와 직결되기에 극비정보다.
돈 몇 푼 쥐여준다고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란 말이다.
“...주인님.”
루시아의 내려앉은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며 텅 빈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루시아가 봉사해도 될까요?”
왠지 거절하는 순간 어딘가 먼 곳으로 루시아와 보트 여행을 떠날 것만 같았다.
“...”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