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태양과 달의 연회 (3)
* * *
황녀의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황녀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다.
황가와의 약조에 따라 대가문의 일원들은 기본적으로황실에 방문하는 즉시 황제를 알현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황제가 병상에서 골골대고 있는 지금 그 역할은 황태자가 맡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는 지금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를 뵙는 중이라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시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종조차 기도가 단정한 게 과연 황실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응접실에서 얼마간 기다리고 있자 시종이 다시 말을 걸었다.
“유진 칼리오페님, 태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황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알현실 한가운데에서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뿜어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리아나와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에 선이 가늘고 단정한 얼굴.
제국의 황태자 ‘라인그람 루멘하르크’였다.
“으하하하, 유진 칼리오페! 오랜만이군!”
내가 들어오자마자 라인그람은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산적같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좌우에 서 있는 황금갑옷의 기사들도 황태자의 저런 웃음에 익숙한지 당황하는 낌새조차 없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간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유진 칼리오페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일어나라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태자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으하하하하! 시간이 참 빨라.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그저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이런 듬직한 사내가 돼버렸군! 아! 그래, 에르덴이 가주가 됐다며. 잘 있나? 으하하!”
지나칠 정도로 호탕한 황태자의 웃음소리에 귀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가주님께서는...”
“하하하! 나와 에르덴 사이에 무슨! 가주님 같은 말은 빼고 편하게 하자고. 후하하하!”
...도대체 뭐가 저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
하필 주위에 있는 게 모두 남자인 터라 ‘침대 위의 왕자’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나는 힘겹게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는 잘 계십니다. 태자 전하께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으하하하하! 그래! 그래! 건강하다면 다행이야! 나는 그 녀석이 은근히 마음이 여려서 혹시 살해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네.”
웃으면서 갑자기 폐부를 찔러오는 황태자.
순간 말문이 막히자 황태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주도권을 휘두른다.
“으하하! 미안하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떠들 말은 아니었는데! 이베인, 헤리스 비밀로 할거지? 으하하!”
황금의 기사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으하하! 그래. 이거면 되겠나? 아니지! 설령 귀머거리라도 존재만으로도 불편할 수 있으니. 이베인, 헤리스 나가 있게!”
“전하!”
라인그람의 명령에 기사들은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황태자의 신변 보호가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그들의 입장에서 외부인을 앞에 두고 자리를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자 라인그람이 의자 손잡이를 내리치며 웃었다.
“흐하하핫! 칼리오페가 신경 쓰이는 건가? 다른 가문도 아닌 제국의 방패를? 으하하하! 됐으니까 나가 있거라! 제국의 방패에 버림받을 제국이라면 망해버리라 하지. 흐하하!”
“...!”
황태자의 말에 기사들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황태자의 입에서 제국을 부정하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흐하하!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경들이 말을 들을 것인가? 경들이 나가지 않으면 내가 나가야하나?”
라인그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저희가 나가겠습니다.”
이베인이 나를 노려보고는 나간다.
‘억울하네...’
이유야 알지만 지금 황태자와 싸우면 길어야 1분, 아니 좀 성장했으니 5분이면 영혼까지 털릴 자신이 있다.
저래 보여도 라인그람은 에르덴과 카르네아에서 수석을 다투던 사이니까 말이다.
“후하하! 이제 둘만 남았으니 툭 까놓고 말해보자고!”
“...무엇을 말입니까?" ”
“으하하핫! 모르는 척을 하네! 마이샤 가문 말이다! 마이샤 가문!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차기 가주 자리를 포기한 것인가?”
웃음 속에 숨어 계속 정곡을 찔러오는 황태자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오려고 한다.
“...어째서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하하핫! 그냥 직감이야! 지난 수년 동안 에르덴과 에다드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자네가 돌아온 사이에 갑자기 해결됐으니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리아나의 목숨을 구할 정도의 남자니까 말이니까!”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리아나가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몰살당했을 테니까.
“으하하핫! 겸손하긴! 운도 실력이다! 아니, 오히려 운이야 말로 실력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해도 운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 으하하! 그래! 어쨌든 황실의 피를 구했으니 그 상을 줘야겠지. 뭘 받고 싶지?”
황태자의 질문에 나는 숨을 한 벌 길게 내쉬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상보다는 무례일지라도 꼭 여쭈어보고 싶은 건 있습니다.”
“하하하핫! 무례를 저지르겠다고 선포하는 것 같은데! 좋아! 웬만한 무례는 넘어가 주지.”
“감사합니다. 전하. 넓은 은혜에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하하하하! 아부는 됐으니까 어서 말해보게! 어떤 말을 할지 기대가 돼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야! 흐하하하!”
“네... 전하, 황녀께서 전하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
내 말을 들은 라인그람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건 예상보다 훨씬 무례하군.”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례한 질문은 정말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 듣는 듯해.”
쿵─ !
라인그람이 바닥을 내리찍는 순간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압박감이 쏟아진다.
“....”
꽉 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황태자가 쏟아내는 압박감은 범인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염동력으로 조금 흘려내지 않았다면 나도 기절했을지 모른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라인그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무례를 용서한다고 말해놓고 이런 짓을 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기억하게. 유진 칼레오페. 만일 자네가 리아나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거나, 내가 무례를 넘어간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칼리오페의 자제인 것과 관계없이 벌을 내렸을 걸세.”
“...송구합니다.”
내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황태자의 앞에서 황녀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상 황녀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고도 이 정도로 넘어간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하아, 문제는 자네가 이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거야. 벌을 받을 걸 알고 있음에도 묻는다는 건 그만큼 이 질문이 자네에게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무례는 어쨌든 나 역시 진지하게 대답해야겠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황태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마... 물러나지 않을까 싶다.”
“...어째서입니까. 아쉽지는 않습니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황실의 핏줄을 이은 사내로 태어났다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을 알기에. 그것으로는 부족한가?”
그 순간 경박했던 황태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백성들을 아끼는 성군의 모습이 보였다.
“설령 그렇더라도 태자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황녀 전하를...”
“거기까지만 말하게. 아무리 봐주고 싶더라도 뒷말을 꺼낸다면 자네를 황실 모독죄로 처벌해야 하니까.”
“...실례했습니다.”
내가 깊게 고개를 숙이자 황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리아나 그 아이는 특별해. 어디가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특별해. 그러니 나는 리아나와는 싸우고 싶지 않네.”
“....”
역시 ‘직감’의 소유자 다운 대답이었다.
리아나가 장막을 뒤집어쓴 채 본성을 감추고는 있다고 하나 황태자의 ‘직감’은 장막 너머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만인지상의 자리조차 혹여나 아끼는 이들이 다칠까 포기하다니...
누구에게 묻더라도 훌륭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태자의 선택은 훌륭했지만 잘못되었다.
분명 리아나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황실에서 자신의 본성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챈 건 황태자뿐이라는 걸.
그리고 황태자의 성격상 자신이 반란을 꾀하더라도 황태자는 그저 자리에서 물러날 것도 말이다.
‘...그것 때문에.’
리아나는 썩어가고 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 무엇에도 감흥을 얻을 수 없고, 다만 공허함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
만일 황태자가 리아나와 정면에서 싸워주었더라면 분명 황태자의 말대로 수백의 생명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허나, 앞으로 사라질 수만의 목숨은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황태자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할 생각은 없다.
황태자 나름대로 주위를 지키는 판단을 내렸으니.
분명 제국에는 저런 남자가 황좌에 오르는 것이 축복일 것이다.
누구보다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음에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바라건대 부디 영원토록 저 성격이 변치 않고 제국을 통치해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한다.’
황태자처럼 멋있게 포기하는 대신.
더럽고, 추하며, 역겨우면서도 음란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방법을 써서라도.
내가 리아나 루멘하르크를 막아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