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태양과 달의 연회 (2)
* * *
‘아...’
본능적으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또 그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꿈 자체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지만, 이 꿈을 꾸고 나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자니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빨리 일어나야지.’
깨어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어두운 빛’
그 모순적인 존재를 찾아야 한다.
한 번 경험해서인지 완전히 영체상태였던 그때와는 다르게 희미하지만, 손과 발 같은 게 느껴졌다.
‘...저쪽이던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한참을 날아가다 보니 그때와 같이 ‘어두운 빛’이 보였다.
‘찾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어두운 빛’에 다가가자 놀랍게도 ‘어두운 빛’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이상한 감각이었다.
분명 무언가를 듣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내가 팔을 휘저으며 좀 더 가까이 가자 ‘어두운 빛’ 아래에 감춰진 무언가가 보였다.
—촤르륵
꼬챙이에 날개가 꿰뚫린 채 온몸이 사슬에 구속된 피투성이 여인의 형상.
‘...!’
그 끔찍한 모습에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자 그때야 나는 ‘어두운 빛’이 숨기고 있던 것을 보았다.
처음 보인 것은 넷.
아니.
넷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숫자를 착각할 수 있을까.
수백, 수천을 넘어 지평선 끝까지 빼곡하게 무언가가 있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육체가 떨린다.
착각하고 있었다.
저건 ‘어두운 빛’이 아니었다.
저건 그저 ‘빛’이었고 다만 ‘어둠’을 막고 있기에 어두워졌을 뿐이다.
‘...!’
그걸 깨닫는 순간 직감적으로 ‘어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눈은커녕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사실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고!”
그리고 다시 한번 ‘빛’이 외쳤다.
동시에 중력이 몇 배는 강해진 느낌이 들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
“하아...하아...!”
막혀있던 기도가 갑자기 뚫린 것만 같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주인님?”
“...루...시아.”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루시아.
“...히끅...흑...다행...다행이에요. 주인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저...저는.”
나는 놀라서 딸꾹질하는 루시아를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다. 울지마라 아무 일도 없다.”
그렇게 한참을 품 안에서 울던 루시아가 겨우 진정한 듯했지만 나는 여전히 루시아를 토닥이며 물었다.
“...그래서 왜 운 거냐?”
“...흐윽...주...주인님이...계속 안 일어나서.”
루시아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꿈을 꿨다고 좀 오래 잔 모양이다.
“잠을 좀 깊게 잤다고 울 필요는 없지 않으냐.”
“...그..그래도...며칠이나 일어나지 않으니까..”
예상치 못한 기간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며칠? 루시아.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일주일을 꼬박 주무셨어요.”
“...뭐?”
루시아의 대답에 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일주일이라니.’
상당히 오래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들어 몸이 굳은 것 말고는 오히려 평소보다 상태가 좋았다.
‘육체가 급격한 성장을 한 탓에 적응이 필요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깊은 잠에 빠진 이유를 고민하고 있자 루시아가 다시 품에 안겨 왔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시지 않으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우르엘라 가문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어요.”
내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제때 일어나서 다행이다.’
황녀와의 약속을 깼을 때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정말로...괜찮은 거 맞으시죠?”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헤헤...그럼..다행...이..”
작게 웃던 루시아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내 품에 픽 쓰러진다.
“...루시아?”
꿈 때문인가 갑자기 중간고사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타들어 간다.
“....”
“루시아! 정신 차려라!”
내가 루시아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설마.’
나와 같은 것을 보러 간 것인가?
루시아가 그 불길한 장소를 보러 간다는 것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루시아! 루시아!”
다시 한번 루시아를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나는 마차를 있는 힘껏 두드렸다.
─쾅! ─쾅!
“마차를 멈춰라! 루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멈춰라!”
잠시 후, 마차가 급격하게 속도를 줄어들고 흰 정장의 소녀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그래, 그것보다 루시아다! 루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소녀는 루시아의 몸을 진찰한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영겁 같이 느껴졌다.
진찰을 마친 소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루시아가 왜 이런 거냐! 병이라도 걸린 거냐!”
“어쩜 둘이 똑 닮았군요. 제가 도련님을 진찰했을 때는 아가씨가 이러던데... 걱정하지 마세요. 단순한 피로입니다. 그냥 한숨 주무시고 나시면 깨어날 겁니다.”
“피로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똑바로 본 것이 맞느냐! 피로로 이렇게 깊게 잠들 리가...!”
내가 여전히 당황해서 소리치자 소녀가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도련님. 목소리를 낮춰주시죠. 도련님께서 잠들어 계신 일주일간 루시아 아가씨는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
하루만 밤을 새워도 피곤한데 일주일을 새웠다면 저렇게 기절하듯 잠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아... 소리쳐서 미안하다. 그...”
“마르잔입니다.”
“그래, 고맙다. 마르잔.”
“아닙니다. 곧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그때까지 루시아 아가씨를 부탁드립니다.”
마르잔이 싱긋 웃으며 다시 나갔다.
홀로 남은 내가 루시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멍청하긴.”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피로가 쌓여서 잠들었다고 말했는데 꼬박 일주일을 깨어있다니 이렇게 멍청한 짓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 자라.”
살짝 입꼬리를 올린 나는 잠들어 있는 루시아의 볼을 잡아당겼다.
***
루시아가 잠에서 깬 건 약속장소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히잉...마차 안에서 하려고 여러 가지 많이 가져왔는데.”
루시아가 마차 좌석 아래에서 상자를 꺼내거니 아쉽다는 듯 바라보았다.
“....”
이런 말 해서는 미안하지만 조금은 잠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걸 마차에서 어떻게 사용한다는 거지?’
지금까지 수많은 야겜을 공략한 나지만 그런 나조차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상상할 수 없는 물품이 상자 안에는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루시아. 황성에서 보자.”
“...네.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먼저 달려가기 시작한 루시아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에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좋을 때군요. 에다드님과 키아라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본 알프레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그럼요. 두 분과는 입장이 반대였지만 말입니다.”
마차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지겨웠기에 알프레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련님. 날씨가 아직 춥습니다. 옷도 얇게 입으셨는데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죠.”
“추위는 안 타니 상관없어.”
‘빙하의 정수’를 흡수한 이후로 추위 저항이 극도로 올라갔다.
고위 빙결계열 마법 정도는 맞아야 좀 춥다고 느낄 거다.
“그보다 어머니 이야기를 더 해줘.”
“...그럼, 그러도록 하죠. 키아라님은 뭐랄까…. 좋은 의미로 귀족답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저희 같은 혼혈들에게도 편견 없이 대해주셨으니까요,”
흐뭇하게 웃은 알프레도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 어머니가 혼혈들을 거둔 이야기.
고든 아저씨가 말을 안 듣자 1대1로 싸워서 굴복시킨 이야기.
전장에서 아버지에게 고백받고 도망친 이야기.
파볼리에의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의 첩으로 들어간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갔는지까지도.
“...그만큼 어머니께서는 도련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자료로서 파볼리에 키아라를 조사할 때와 알프레도에게 듣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
내가 복잡한 감정을 마음 한편에 정리하고 있을 때 성벽 위에서 병사가 소리쳤다.
“정지해라!”
마차를 세운 알프레도가 껄껄 웃었다.
“이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더니 벌써 도착해버렸군요. 도련님이야 그렇다 쳐도 제가 황실에 들어가려면 절차가 귀찮아질 테니 저는 여기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쳤을 텐데 조금 쉬다 가지?”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서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일이 쌓여서 말입니다.”
알프레도의 말을 들은 내가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굳이 마차를 모는 게 알프레도가 아니어도 됐는데.”
“허허, 신경 쓰시지 마시죠. 제가 지원한 일입니다.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한들 도련님을 모시는 게 가장 우선이니까요. 이 늙은이가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알프레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디 몸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도련님.”
고개를 끄덕인 내가 정문까지 걸어가자 병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주시죠.”
일단 복장과 마차가 척 보기에도 고급이라 그런지 병사의 태도가 고분고분하다.
하긴 황성의 병사라면 마차에 박혀있는 가문의 문양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짜 도착했다.’
내가 잠시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새하얀 성벽을 올려다보니 숨이 턱 막힐 것 같다.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나는 이 황성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고개를 저은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칼리오페의 삼남. 유진 칼리오페다. 황녀 전하의 초대를 받고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