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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71화 (71/354)

〈 71화 〉 나비는 두 번 날개짓 한다 (1)

* * *

검은 옷의 사내, 히카트는 카르네아의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늦는군.’

슬슬 예정된 시간이 되어가는데도 카르네아를 감싼 결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설마 ‘네임리스’의 예상이 빗나가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불순한 생각이 히카트의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떨쳐냈다.

‘...의심하지 마라.’

네임리스를 의심한 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됐는지는 누구보다도 히카트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명령을 따르면 된다.’

네임리스께서는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조직의 말단에 불과했던 히카트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도 전부 그분의 은총 덕분이 아니던가.

네임리스는 이름 없는 자라는 호칭처럼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자였다.

나이, 성별, 계급, 심지어는 단체인지 개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네임리스의 명령은 편지로 날아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히카트의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은 하나 같이 네임리스의 정체를 파헤치려 하거나 명령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온몸이 찢긴 채 발견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히카트는 똑똑하다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히카트는 전임자들처럼 맞서거나 도망칠 생각을 하는 대신 네임리스에게 자신이 쓸만한 장기 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히카트는 카르네아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네임리스가 내린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다.

“...결계가 해제되고 있습니다.”

부하의 말에 히카트 고개를 들자 결계의 윗부분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역시 그분의 말 대로였다.

히카트는 다시 한번 네임리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오른손에 낀 반지에 입을 맞췄다.

“...결계가 해제되는 순간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히카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히며 서늘한 검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

방안으로 돌아온 트리스탄은 초조한 마음으로 상자를 노려보고 있자 마침내 봉인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트리스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꿈틀─ 꿈틀─

그곳에는 슬라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생김새를 지닌 ‘촉수’가 기괴한 움직임으로 기어 다녔다.

트리스탄은 지금까지 자신이 비위가 약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지만, 이것은 달랐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 불길함과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듯했다.

‘...이딴 걸 딸에게 먹여야 한다는 건가...’

검은 옷의 사내는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먹인다면, 딸은 인간을 벗어날지언정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촉수에선 트리스탄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이 힘을 사용한다면 사내의 말대로 딸의 생명만큼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명보다 중요한 게 있는 게 아닌가.

이 끔찍한 것을 딸에게 먹이는 것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것만 같았다.

‘아...빠.’

그러나 고통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졸데를 목소리를 떠올리자 트리스탄의 인간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차가운 이성만이 남았다.

결심을 굳힌 트리스탄이 상자에 손을 넣었다.

“....!”

‘촉수’를 움켜쥐는 순간 트리스탄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는 순간 이졸데는 영원토록 자신을 저주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딸에게 저주받을망정, 트리스탄은 딸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트리스탄이 이졸데의 입을 벌리고 촉수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하아...하아...자..잠시만 기다려!”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유진 칼리오페가 뛰쳐 들어왔다.

***

심장이 터질 듯이 달려온 덕에 간신히 늦지 않았다.

“....”

일단 트리스탄을 멈춰 세우기는 했지만, 안심은 할 수 없었다.

트리스탄의 눈은 이미 빛을 잃었고, 아직 그의 손에는 촉수가 들려있었으니까.

“...유진..너무 늦었네.. 이제는 이 방법밖에 남지 않았어.”

예상대로 트리스탄은 포기한 듯 촉수를 이졸데에게 먹이려 하자 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답...! 제가 답을 찾아왔습니다!”

“...그만두게. 더는 매달리게 하지 말란 말이다!”

트리스탄이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계속되는 거짓 희망에 지쳐버린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트리스탄에게 다시 한번 소리쳤다.

“자신이 견디기 힘들다고 이졸데가 인간으로서 살 기회를 포기하게 할 겁니까!”

“...!”

“어차피 마지막입니다! 제가 구해온 방법으로 이졸데를 구할 수 없다면 그땐 촉수를 먹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결국, 망설이던 트리스탄은 촉수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후우...’

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장 급한 불을 껐지만, 트리스탄을 설득해야 한다는 큰 산이 남은 이상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딸의 시련을 끝낼 방법이 무엇이지.”

“...시련은 끝내지 않습니다.”

“시련을 끝내지 않는다고? ...자네는 지금 내 딸의 목숨을 걸고 농담이라도 할 생각인가!”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닥치게..!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이성이 남아있을 때 꺼지게!”

“교수님! 첫 만남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입니까!”

내가 오해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들먹이자 트리스탄의 잠시 멈칫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게. 다만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네.”

트리스탄이 내뿜는 짐승 같은 살기에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지금까지 느꼈던 로레오스가 뿜어내는 살기가 제일이라 생각했는데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살기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은 ‘성유’로 불리는 물건으로 체력 자체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는 물건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양호 마망의 모유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트리스탄이 이를 까득 갈았다.

“...결국, 자네가 찾아온 해답이 이것이었는가! 이번 시련을 넘긴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다음 시련이 오면 이졸데가 죽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니요! 다릅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이건 어느 정도 회복 효과가 있을 뿐 이졸데를 완전히 치유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으니까요!”

“....?”

내가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트리스탄이 입을 다물고 듣고는 있지만 오래 가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기회가 있을 때 몰아붙여야 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정하고 들어보십시오. 교수님께서는 이졸데가 시련을 넘길 때마다 더 강한 시련이 찾아온다고 하셨죠.”

“...그래.”

“그렇다면, 이졸데가 견딜 수 있는 마지막 시련인 지금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제가 가져온 성유가 있는 한 조금 괴롭기는 해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이졸데에게 계속 고통을 주라는 말인가?”

“예, 분명 괴롭기는 하겠지만, 인간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내가 뱉은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트리스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교수님, 시간이 없으니 그 끔찍한 물건은 내려놓으시고 성유를 이졸데에게 마시게 하시죠. 성유의 효과를 보시고 생각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알겠네...”

트리스탄이 내게 성유를 받아가는 사이 나는 재빨리 ‘촉수’를 챙겼다.

‘...읏.’

정화되지 않은 상태라 손으로 잡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촉수를 입안에 넣고 삼키지 않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양호 마망의 모유를 마신 이졸데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정말 체력이 회복되었군.”

“그렇다고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제가 챙겨 온 성유를 좀 더 놓아둘 테니, 이졸데의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한 병씩 마시게 하면서 관리를 해야 할 겁니다.”

“...알겠네. 그래서 성유는 결국 뭐지? 어디서 나온 물건이지? 어떻게 손에 넣었나? 내가 직접 만들 수는 있는 건인가?”

트리스탄이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온다.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워진 트리스탄을 밀어내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좀 떨어지시죠. 교수님.”

“...미안하군. 너무 흥분했군. 하지만 대답은 해줘야겠어.”

“죄송하지만, 성유는 칼리오페 가문의 비전으로 만든 것이라 외부로 유출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겠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제가 조합법을 알려드려도 칼리오페 가문에 있는 특수한 설비를 이용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물건입니다.”

“....”

물론 전부 거짓말이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아무리 트리스탄이라도 칼리오페 가문에 쳐들어가서 확인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래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앞으로 제가 지속해서 저 성유를 공급해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교수님은 제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성유를 목줄로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이용이 아니라기보다는 거래라고 해주시죠. 교수님께서 제게 일방적으로 받으며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는 것보다는 적당한 대가를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겁니다.”

이것이 설령 악마의 유혹인 것을 알아도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목숨이 달린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알겠네. 가능한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그럼, 거래 성사입니다.”

내가 내민 손을 맞잡은 트리스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몇 년 동안이나 찾아다니던 해결법을 자네가 고작 며칠 만에 찾아오다니... 첫 만남 때 보여주었던 연금술에 대한 지식도 그렇고 이것이 진짜 재능인가 싶군...”

“....”

로레오스도 그렇고 트리스탄도 그렇고 교수들에게 계속 재능충 이미지가 쌓여가는 느낌이다.

‘그냥 모유를 짜냈을 뿐인데...’

—퍼엉!

그때였다, 멀리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2장의 메인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겠...!”

트리스탄도 나와 같이 뛰쳐나가려 했지만, 이졸데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나를 그런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교수님은 이곳에 남아 계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저건 내가 불러 온...”

“성유를 먹였다고는 하나 아직 이졸데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쪽을 왔을 때도 대처할 사람이 필요하고요.”

내가 이졸데를 들먹이자 트리스탄도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몸조심하게.”

“예, 교수도요.”

트리스탄이 따라 나오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개고생하면서 겨우 살려낸 고급 인력인데 저런 상태로 나가서 싸우다가 괜히 눈먼 마법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나도 홧병으로 죽을 수 있다.

‘자...그럼.’

나는 오두막을 나서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온전한 촉수도, 트리스탄의 약점도, 필요한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이제 남은건 2장의 메인 이벤트를 마무리 짓는 것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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