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최초 클리어 특전
* * *
좆됐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르는 장소에 있었다.
고풍스러운 벽지에 묘하게 고급스러운 물건이 가득 채우고 있는 방.
처음에는 게임을 하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왔나 했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았다.
왜냐고?
거울을 슬쩍 바라보자 뭔가 어두운 분위기의 미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질리도록 본 아카데미의 조교사의 주인공 유진 칼리오페의 얼굴이니까.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얼굴을 잡아 당기기도하고 머리카락을 뽑아도 봤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진 칼리오페가 되었다.
“...개 같은 감독 새끼.”
의자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붙잡았다.
그동안 게임 속 세계에 떨어지는 소설들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한 나를 반성했다.
...설마 내가 데스 이벤트가 많은 게임에 떨어질 줄 몰랐지.
그동안 주인공들이 좋으면서 괜히 징징거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당해보니 이게 얼마나 엿 같은지 알겠다.
이빨이 으득 갈린다.
그 악마 같은 년. 아무리 메일로 욕을 좀 했다고 그렇지 사람을 이런 좆망겜 속에 처넣어도 되는 거냐.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복수 할 거다.
그렇게 처음 눈을 뜨고 얼마 동안은 현실부정을 하며 돌려보내 달라고 허공에 소리도 지르고, 안 돌려주면 구원이고 뭐고 확 창밖으로 뛰어내린다고 협박까지 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어찌 됐건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게임 속 세계에 떨어졌고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아니, 단순히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해피엔딩을 봐야 한다.
정의감이나 감독년의 부탁 같은 사소한 것 때문이 아닌 생존이 달린 문제다.
왜? 공략하지 못하면 뒤지니까.
참 간단하지 않나.
***
“우선 계획을 세우자.”
이 세계가 게임 속과 똑같다면 당장 내일이 아카데미 입학식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
입학하고 한동안은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조차 없을 테니까.
물론 감독을 엿 먹이겠다고 아카데미에서 뛰쳐나가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있겠지만 자살행위다.
내가 알고 있는 이벤트 대부분은 아카데미 속에서 벌어진다.
반대로 말하면 아카데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세계에서 살아남기?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운이 좋아 아카데미 밖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베드엔딩이다.
결국, 지식을 활용해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카데미에 붙어있어야 한다.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을 바라보니 현실이었다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을 웅장하고도 세련된 모습의 건물이 보인다.
‘카르네아 아카데미’
「아카조교사」 세계관 최고 명문 아카데미.
대상인, 고위 귀족 심지어는 황족들의 자제가 입학하는 아카데미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겠는가.
웬만한 권력, 재력, 재능으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곳이다.
뭐, 주인공.그러니까 나. 유진 칼리오페 같은 경우는 가문의 삼남임에도 불구하고 카르네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는 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배경과 사정이 있지만 지금 생각할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이 세계를 공략해야 하는지다.
“당연히...”
제일 중요한 건 능력치를 키우는 거다.이 미친 게임은 야겜주제 웬만한 RPG보다 훨씬 빡센 전투난이도를 지녔으니까.지나가던 잡몹한테 맞아 뒈지기 싫으면 능력치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여기도 문제가 있다...
[이름 : 유진 칼리오페]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능력치]
근력 10 민첩 10 체력 10
지력 10 마력 10 행운 10
[스킬]
없음
[특성]
없음
보아라.
이 초라한 능력치를.
모든 능력치가 10이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딱 초반 아카데미 밖에서 시비 걸다 참교육 당하는 양아치A 정도의 능력치다.
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1회차 엔딩을 봤을 때 능력치나 특성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게임이 현실이 된 이상 어느 정도 주인공다운 능력치 보정은 있어야지 아니면 나가 죽으라는 말밖에 더 되는가.
아니 그래...능력치는 그렇다고 치자.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이벤트나 아이템은 대부분 외우고 있으니 그때까지 죽지만 않으면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미친 듯이 존버해서 능력치만 올리면 되나?
“...절대 아니지.”
대부분의 메인이벤트는 히로인의 조교도를 일정수준 이상 올리지 않으면 참여조차 할 수 없다.
주인공이 참여 못 하는 메인이벤트가 말이 되나 싶지만, 놀랍게도 이 좆망겜에서는 말이 된다.
당장 입학하고 나서 첫 보스전부터가 히로인 조교도가 어느 정도 채워있지 않으면 참여조차 할 수 없다.
그래.
조교다.
히로인을 조교해야 하는 것이다.
야겜만 하느라 현실에서는 여자 손도 제대로 못 잡아본 내가 여자를 조교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자랑 한 대화를 떠올려보니 편의점 알바생의 봉투 필요하세요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택배로 주문해서 1년 사이에는 진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망했네.”
어떤 미친년이 야겜 오타쿠한테 여자를 조교하라고 하는가. 게임이랑 현실은 좀 구분해야지.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책상 위에 올려진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엔딩을 보는 데 필요한 것을 간단하게 적어나갔다.
직업 정하기
조교 할 히로인 정하기
특성, 칭호 얻기
데스 이벤트 회피하기
성장 이벤트 찾아다니기
이것 말고도 사소한 것들이 몇몇 개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직업이었다.
어차피 이벤트는 피하려고 해도 오는 거고 히로인 조교는….
모르겠다.
하긴 해야 하는데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일단은 직업이다.
[직업을 선택해주세요.]
▶[기사] ▶[마법사] ▶[고유능력자]
봐라, 상태창도 빨리 직업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카조교사의 직업 트리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육체를 사용하는 기사.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사.
정신을 사용하는 고유능력자.
1회차. 그러니까 루시아를 공략해 노말 엔딩을 봤을 때는 기사를 선택했다.
루시아가 마법사라 밸런스상 기사를 고른 것도 있고 가장 무난해서 고른 직업이기도 하다.
당연히 끝까지 본 만큼 제일 많은 정보를 아는 것도 기사지만….
“기사는 무조건 제외.”
지금 기사를 선택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땐 내가 아닌 게임 속 캐릭터니까 배때기에 칼침 좀 맞고 팔다리가 떨어져도 싸울 수 있었지.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 아니 한마디만 잘려도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엔딩을 본 직업이라는 문제였다.
기사로는 해피엔딩을 볼 수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무난하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며 엔딩까지는 볼 수 있지만 결국 노말엔딩에서 멈추고 말았다.
사실 말이 노말엔딩이지 베드엔딩이 아닌 수준의 엔딩이다.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이 없다.
그리고 마법사?
기사보다는 괜찮지만 고민되긴 마찬가지다.
각 속성에 맞는 영창을 외우고 적절한 마력을 분배해서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라 영창은 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력이라는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을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지금부터 걸음마를 배워서 육상선수가 되는 것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은 거다.
결국, 남은 건 고유능력자.
고유능력자는 마법사랑 비슷하지만, 마법사가 여러 가지 속성 마법을 다룰 수 있어 다재다능하다면 고유능력자는 특화형이다.
속성 마법에 없는 능력을 영창도 필요 없이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고유 능력 외에는 사용하지 못한다.
“...마법사냐 고유능력자냐.”
밸런스형 마법사냐, 아니면 일점 특화인 고유능력자냐.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상태창 앞에서 망설이고 있자 문득 오른쪽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
작은 편지 모양의 아이콘이 깜빡깜빡하며 눌러달라고 나를 유혹했다.
내가 홀린 듯이 편지 모양을 누르자 문장이 떠올랐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1건 있습니다.◀
“...메시지 확인.”
그 순간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아카데미의 조교사가 되었다. 최초 클리어를 확인했습니다.』
『점수를 측정 중입니다. 상태창을 닫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최초클리어 가산점 + 300%』
『Normal Ending 가산점 + 33%』
『히로인 공략 가산점 + 25%』
『루시아 우르엘라 완전공략 가산점 + 200%』
『특수 이벤트 가산점 + 37%』
『강제전이 가산점 + 150%』
...
『총 가산점 : 774%』
『점수에 맞는 특전을 검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검색 완료. 점수에 맞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오류 파악 중….』
『오류 파악 완료』
원인 : 예상범위를 초과한 점수를 획득했습니다.
『오류 수정 방안 제시』
보상의 등급을 상향.
『허가 완료 : 최초 클리어 특전(Rank S)의 등급이 상향됩니다.』
『최초 클리어 특전(Rank EX)이 주어집니다.』
『최초 클리어 특전을 수령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최초 클리어 보상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하긴 내가 최초 클리어를 한 사람인데 어디서 듣겠는가.
그건 그거고. 특전이다. 심지어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EX랭크 특전이란 말이다. 이 게임을 공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안 받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긴장되는 얼굴로 예를 선택하자.
◆◇◆◇팡파방! 축하합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쭈르륵 내려왔다. 그렇게 최초 클리어 보상을 살펴보던 나는 침을 삼켰다.
EX랭크의 특전은 조금 도움이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이 개좆망운빨게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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