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1/20)

TABOO 2

(1) - 깊은 비가 내리고 있다. 단지 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냥 하루 종일 우울하게, 축축한 벽지 틈새로

스며드는 습한 담배 연기처럼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서울의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이 빗 속에선 추억이

잠들 수 없다. 술을 마셔야 한다. 추억은 오늘밤에 새로 단장 되어야 한다. 순미, 너의 이름으로... 형식은

느긋하게 텔리비젼을 시청하고 있었다. 이제 막 봄기운이 움을 트기 시작해 베란다 의 화단에선

국화내음이 가득 마루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들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잎들이 처져 초록의 기운을 잃고 있었다. 따스한 생동하는 봄비였으나, 왠지 오늘같은

날은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것같이 느껴져 몸이 찌부둥했 다. [여보. 혜연이 올 시간이에요. 우산 좀 챙겨요.]

늘어지게 누워서 TV를 볼 팔자가 아니었다. [아웅... 혜연이가 우산을 안 갖고갔나?] 이제 고1인 딸. 정혜연.

형식과 아내인 진희사이에서 난 딸이다. 마흔 세살의 부장으로 성 인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아직은

튼튼한 육체. 서서히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가장이었지 만,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형식보다 네살아래로 서른 아홉의 아내인 이진희란 여자는 형식에게 포근한 안락처이며 동반자였다. 아직

잘 가꿔진 몸매를 가졌지만, 눈가에는 주름이 곱게 잡혀 있는 여자. 이제 화장이 잘안받는다고 투정을 가끔

하지만 밤이면 자신을 뜨 겁게 만드는 여자... [찬호는 어떡하지?] [괜찮아요. 걘. 학원버스가 데려다주는거

잊었어요?] 일부러 집에서 먼 학원에까지 다니며 공부에 열중하는 고2인 아들 찬호. 별다른 말썽없이

커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내가 찬호방에 이상한 잡지가 있다고 가끔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정도

나이에 그만한 건 평범한 것이라고 타일렀다. 아내가 앙칼지게 뭐라고 쏘아붙였지만, 형식은 그나이땐 다

그런다고 아내를 이해시켰다. [여보.] 의미를 담은 음성으로 아이들의 늦저녁을 차리는 아내곁으로

다가서며 형식이 불렀다. [밖에 비도 오고 그런데, 우리끼리 시간을 가져보는게 어때?] 뒤에서 살며시

아내의 몸을 포옹하며 목에 키스를 했다. 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다. [당신도 참... 혜연이 비 젖는단

말이에요. 감기걸리면 당신이 책임질래요?] [으휴...] 아내의 째려보는 눈길에 형식은 더이상 배겨낼 수 없어

신발을 신고 아파트밖으로 나갔다. 비도 참 잘온다. 아스팔트로 내려붓는 비가 따스한 기운을 머금고

하수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신주에 붙은 포스터가 추념스레 비를 견디지 못하고 너덜거렸다. 왠지 모든

것이 궁상맞은 꼴을 하고 다가올 깊은 밤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혜연이가 다니는 대로가에 위치한

아파트상 가의 작은 학원앞에 와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불이 잘 붙지 않았다. 담배가 습기 에

젖어 축축했다. 깊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담배연기를 폐 깊숙이 밀어넣었다. [후우...]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하늘거리며 희뿌연 연기가 아롱아롱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어깨는 벌써 슬금슬금 비에

함락되어 어깨언저리가 시렸다. 빨리 혜연이가 나오기가 기다려졌 다. 중3때까지만 해도 어린애로

여겨지던 혜연이. 어느새 숙성한 아이가 되어 아비 무릎을 떠 난 아이. 왠지 무릎에 느껴지는 엉덩이가 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아빠한테도 새침떼 기가 된 귀여운 딸아이였다. 비오는 밤에 기다리는 것도

할만하다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축처 져있는 가로수의 초록빛이 띄엄띄엄 켜진 가로등과 아스팔트에 고인

물의 장난으로 인해 오만 가지 색으로 비쳐보였다. 한갓진 길가에서 가끔 제한속도를 넘긴듯한 자동차들의

질주를 보는 것도 썩 괜찮았다. 저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걸까? 아내의 품이 있는 집을 향해 저렇게 달리는

걸까?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불빛이 빗줄기를 통해 확대되어 보였다. 도시가 서서히 밤속으로 빠져드는

시간, 뒤로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만이 새까만 하늘에 별빛보다 밝게 요란하게 번지고 있었다. 형식은 몸을

움츠리며 진희의 따스한 품을 생각했다. 빨리 집에 가서 아내를 안는 거 야. 달콤한 키스를 하며 나를 녹일

육체를 껴안는 거야. 형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 피 운 담배를 흙하나 보이지 않는 보도블럭위에

비볐다. [어머! 아빠!] 혜연이 끝난 모양이었다. 성큼한 키가 형식의 코언저리까지 자라있었다. 아내의 키를

제친 지는 벌써 1년전쯤인가 싶었다. 깡총깡총 뛰어서 우산밑으로 기어들어오는 폼이 제어미를 쏙뺐 다.

[자, 우산.] 혜연이가 애지중지하는 우산을 건네주었다. 제비꽃들이 천위에 피어나 있는 우산이었다. 너 무

애지중지하는지 잘 가지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에이. 그냥 아빠거 쓰고 갈래. 따로따로 쓰면

낭비잖아.] 뭐가 낭비라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길게 하품을 하며 형식이 우산을 건네주며 혜연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쓰든 안쓰든 혜연이 마음이었고, 가방이 무거워보였다. [아빠도 입 좀 가리라니깐---]

[아무도 안보는데 어때?] [안봐도 그렇지, 보기 흉하잖아.] 혜연이 형식의 팔을 붙들며 메롱거렸다. 여전히

곱살맞은 빗줄기는 형식의 어깨죽지를 축축 하게 만들었다. 형식은 어깨가 왠지 가려웠다. [아빠. 글쎄

학원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저번 선생님보다 더 못가르치는 거 있지?] [그러니까, 오빠가 다니는 학원에

같이 다니라니까---] [헹, 그러면 이렇게 아빠가 마중나와 주는 일이 없게?] 딸아이 하나는 살갑게 잘 키운 것

같았다. 물이 고여있는 보도를 피해서 발장단을 맞추어 딸과 정답게 집으로 향했다. 자식을 마중나온

한무리의 사람들이 서둘러 아파트를 향해 발을 재촉하는지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멀어지는 사람들.

거리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멀어지는 사람 들. 나이를 먹을수록 정답던 친구들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가정의 울타리만이 소중하게 느 껴지는 형식이었다. [아빠, 내가 얘기하나 해줄까?] [뭔데?] [있잖아.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알수가 없었대.] 혜연이 더이상 말을 잇지않아 형식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왜?] [근데, 중요한건 왜 그런지도 모른대. 후훅..] 형식은 그제서야 혜연이 자신에게

우스개소리를 한것을 알아차리고 이마로 혜연의 머리를 군밤주듯 부딪쳤다. 딸아이의 젖은 머리칼에서

아스라한 비 내음이 풍겼다. 혜연의 귓볼에 잔 잔한 솜털이 소록소록 돋아있는게 보였다. 빗줄기가 더

세차지는지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굵어 졌다. 혜연이 어깨가 걱정스러웠다. 여자들은 어깨가 젖으면 좋지

않다든데... 막 입을 벌려 더 들어오라고 하려는 순간 혜연이의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팔꿈치에 느껴졌다.

[하... 추워.] 혜연의 입에서 갸날픈 김이 솟아올랐다. 혜연의 어깨도 어느새 젖었는지 혜연이 형식의 팔 을

붙잡고 기대었다. 얘가 이렇게 자랐나... 형식의 가슴한구석에 알듯 모를듯한 도취감이 퍼졌다. 팔언저리에

느껴지는 봉긋한 딸의 가슴의 감촉이 말할수없는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 다. [아빠. 나 추워.] 가방과

우산을 한손에 움켜쥐고는 한손을 혜연의 어깨로 돌려 감았다. 물기에 젖은 혜연의 어깨에서 정다운

안정감이 느껴졌다. 혜연의 젖은 옷을 통해 느끼는 어깨의 온기가 형식에게 아내의 체온을 떠올리게 했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느껴지는 혜연이의 따스한 몸이 기뻤다. 끝간데없이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땅으로

안기는 비를 제치며 우산안의 작은 세계, 외부인이 절 대 침범할수 없는 둘만의 세계를 발을 맞추어 걸으며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까지 이끌고 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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