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 (224/259)

레이첼은 자기 몸을 대가로 데이먼의 처리를 부탁했고 박운호는 그를 처리했다.

........이러면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그것이 아니라면 레이첼이 굳이 이 늦은 시간에 박운호의 거처에 갈 이유가 없었다.

필립은 그 뒤로 한참을 박운호의 거처를 살펴봤다. 

그리고 어스름한 새벽.

레이첼이 박운호의 거처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필립은 쾌재를 불렀다.

필립은 날이 밝자마자 그레이스를 찾았다.

이제 막 일어난 듯 그레이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레이스. 그 둘이 수상해."

"그 둘?"

"박운호와 레이첼. 아무래도 데이먼의 실종은 그 둘이 공범으로 보여."

".........또 그 소리야?"

"아니, 내 말을 들어봐. 어젯밤 레이첼이 박운호의 거처에 들어가서 새벽에 나오는 것을 봤어."

필립의 얼굴은 밤을 새웠음에도 왠지 신이나 보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낌과 동시에 잠이 확 깼다.

"......그게.....사실이야?"

그쯤 되자 그레이스도 의심이 솟아났다.

데이먼이 개자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살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일단 내가 그들을 만나 보고 볼게."

"네가?"

"너한테는 경계심이 심하다면서. 내가 일단 혼자 가서 이야기해볼게."

*

*

*

필립에게 둘의 관계를 들은 그레이스는 레이첼을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지만….

운호보다 레이첼을 먼저 찾게 됐다.

그레이스는 레이첼의 거처로 향하면서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고민이 됐다.

'진짜 그들이 데이먼을 처리한 범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레이스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레이스, 어서 와요."

"레이첼…."

레이첼은 편안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맞이해줬다.

집안은 깔끔하고 조용했다.

둘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도로시는?"

주변을 둘러보던 그레이스가 물었다.

"놀러 나갔어요."

"....."

"....."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레이스는 레이첼의 표정을 살펴봤다.

확실히 필립의 말대로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평안해 보였다.

결국 그레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운호와 어떤 관계죠?"

그레이스의 질문에 살짝 놀랜 레이첼은 이내 평온한 얼굴을 했다.

"어떤 관계라니요?"

"......그건…."

그레이스는 막상 대답하려니 왜인지 뭔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혹시 제가 운호 님의 애인이나 그런 거로 생각해서 물어보는 건가요? 물론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필립이 한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오랜 동료다. 

이들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필립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분이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적이 있어서....그냥 가끔 들러서 청소해드릴 뿐이에요."

필립이 잘못 봤을까?

"청....소요? 늦은 밤에요?"

"그분이 주무실 때 조용히 하고 나오는 거랍니다."

그레이스는 레이첼의 말이 워낙 평온하니 순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늦은 밤 청소?

확실히 이상했다.

"혹시.....그게 거슬렸나요?"

"예? 제가요? 아, 아니에요. 제가 무슨…."

"그레이스는 그분에게 마음이 있지 않나요?"

"예?!"

그레이스는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그분과 잠자리하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게 아닌가요? 그렇다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분과 저는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

"그, 그건…."

그레이스는 왠지 레이첼에게 말리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첼. 전....데이먼때문에 찾아왔어요."

데이먼의 이야기가 나오자 레이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필립은......그의 실종에 레이첼과 운호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그것을 확인하러 온 거고요."

".......데이먼."

레이첼의 얼굴에 잠깐 미약한 분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평온한 얼굴을 하는 레이첼.

"그는…."

".....?"

"그렇게 찾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일까요?"

"예?"

"지금 저와 제 딸은 그가 없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를 이렇게 열심히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그건…."

"우리 모녀를 다시 지옥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요?"

"아, 아니…."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도로시가 나타났다.

"그레이스 언니! 어쩐 일이에요?"

밖으로 놀러 나갔다던 도로시가 돌아온 거다.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어, 어....그냥…."

도로시는 그레이스를 살갑게 맞이해 줬다.

그레이스는 아이 앞에서 데이먼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별 소득 없이 레이첼의 거처에서 나왔다.

확실히 필립의 말대로 의심은 됐다.

하지만 모녀의 생활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해 보였다.

전에는 꿈도 희망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것 때문에 몇 번이고 거처를 옮기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던 레이첼이다.

데이먼을 찾으려는 이유….

레이첼의 말대로 데이먼은......굳이 찾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레이스는 운호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봐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설 거 같았다.

*

*

*

그레이스가 찾아왔다.

이번엔 혼자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렇게 좋은 신호......는 아닌 거 같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운호......진짜 데이먼이 실종과 관계가 없는 거야?"

"......"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질문이었다.

그레이스의 맑은 푸른 눈이 내게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녀가 이미 의심하는 단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를 믿고 싶다는 그녀 나름의 신호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저것이 순식간에 불신으로 기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고민했다.

선택의 순간이다.

그녀에게 계속 감춰야 하나.

아니면 진실을 알려줘야 하나.

필립 따위와는 다르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녀가 다시 내게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심증이 있다는 이야기다

계속 부인해봐야 의심만 부추길 뿐이고….

구차해 보일 뿐이다.

그러면 나와 그녀의 관계에 불신이 생긴다면 더는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저에게 주인님의 기억 간섭을 허락해 주신다면, 그레이스 님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어요.]

내가 고민하고 있자 수니가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수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여도 나와 연관이 된다면 상당히 제약이 많다. 

그녀는 내 무의식의 거부감조차 반응해 제약이 걸린다. 

예를 들어 내가 여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수니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타인이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당연히 나도 그런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수니는 그것을 내게 허락받는 거다.

'그레이스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옳은 판단인가?'

보여준다면 나와 레이첼이 데이먼 놈을 처리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녀는 전직 보안관이다.

어쩌면 더 이상 이곳에서 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레이첼을 데리고 떠나는 거야 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캐리와 그레이스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뼈아프다.

필립도 아니고 그레이스와 이런 일로 굳이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내 성격상 길게 끌 거 없이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속 편할 거 같았다.

'수니, 그날 밤의 기억 접근을 허락한다.'

[주인님, 그레이스 님의 손을 잡아주세요.]

수니의 말대로 나는 부드럽게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흠칫하긴 했지만, 내게서 손을 빼지는 않았다.

"진실을 원해?"

"응…."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그런 그녀에게 마력 간섭을 시작했다.

*

*

*

시야가 암전되고 그레이스가 처음 인식한 건 밖에서 쏟아지는 시끄러운 폭우 소리였다.

"레이첼!!"

사나운 사내의 노성이 들렸다.

-깜빡.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지며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데, 데이먼?"

데이먼은 뭐에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그의 앞에 나타나는 레이첼.

그녀의 얼굴은 불안과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이어지는 레이첼을 향한 데이먼의 폭행.

"하, 하지 마!"

그레이스는 그에게 달려들어 저지해 보려 했지만, 자신의 몸은 그를 그냥 통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운호가 초능력을 사용한 건가?'

그레이스는 운호가 초능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그날 밤 사건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장감이 너무 생생해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처참한 광경은 계속 이어졌다.

도로시가 데이먼에게 달려들고 머리채를 잡혀서 무자비하게 구타당한다. 

그것을 보고 아연실색한 그레이스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총을 찾고 있었다.

집안에서의 데이먼은 악마 그 자체였다.

말리고 싶었지만, 환영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고….

알았다면 데이먼을 섬에서 추방했을 거다.

데이먼에게 내동댕이쳐진 도로시가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쓰러진다.

그레이스는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분노와 함께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꼈다.

바닥에 쓰러진 도로시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레이첼.

'도, 도로시가.....주, 죽었어?'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레이스는 연이어 벌어지는 지옥 같은 광경에 얼이 빠졌다. 레이첼의 죄책감과 후회, 무력감, 절망 등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감정에 동화돼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딸이 죽었던 말던 아랑곳 하지 않고 레이첼을 의자를 들고 폭행하는 데이먼.

이쯤 되면 악마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초능력을 각성한 레이첼은 데이먼을 말 그대로 찢어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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