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이?
감히 날 의심해?
뭐.....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립 따위에게 의심받았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난 그 인간의 이름도 몰랐다. 그런데 날 의심한다고?"
"넌 그의 옆집이야. 당연히 너도 용의자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힘으로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를 노려본다.
"시체라도 숨겨둔 게 아니라면 나를 들어가게 해라."
"싫다. 영장 가져와."
"영장이라니.....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니야. 내 거처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여자뿐이다. 그레이스라면 모를까 네놈은 안돼. 정들어오고 싶다면 그레이스를 데려와"
"너…."
화가 나는지 나를 노려보는 필립.
나는 심드렁하게 필립을 보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총 안 꺼내나?
마침 그레이스와 캐리도 안 보이고….
그 구실로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 좀 두들겨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자존심이 있는 놈으로 보였으니 나한테 두들겨 맞아도 그녀들에게 고자질도 못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쉽게 필립이 총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절대 비켜주지 않을 거란걸 느꼈는지 필립은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철컥.
문을 닫고 감각을 퍼뜨려 필립의 동향을 살펴봤다. 그가 옆집인 레이첼의 거처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참나.......이런 쓸데없는 일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도로시가 집 한구석에서 조용히 내 눈치를 보면서 시무룩해 하는 게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시원한 콜라를 하나 꺼내 꼬맹이에게 던져줬다.
"이, 이건? 코, 콜라?"
"그거 마시고 좀 있다가 돌아가라."
"네! 고마워요. 아저씨!"
그제야 활짝 웃는 도로시.
필립 놈이 레이첼의 집으로 갔으니 도로시는 조금 더 붙잡아 두어야 했다. 녀석이 떠난 다음에 보낼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콜라를 도로시는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마셨다.
"아저씨. 마, 맛있어요!"
오랜만에 맛보는 콜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이걸로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꼬맹이들은 눈치가 없으니 주의해야 했다.
*
*
*
필립은 데이먼이 캠프의 일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은 위험한 보급을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캠프의 관리일을 한다.
데이먼은 예전에도 일을 잘빠져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처음엔 그런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데이먼 가족의 거처를 방문한 필립은 폭우가 몰아치던 밤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는 레이첼의 말을 듣고 그의 행방을 탐문하고 있었다.
박운호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데이먼의 행방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자 박운호의 거처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별 기대 없이 박운호와 만나본 필립은 필사적으로 집안으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필립은 다시 옆에 있는 레이첼의 거처로 향했다.
처음엔 데이먼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왔지만, 이번에는 박운호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텅. 텅.
필립은 레이첼의 거처, 현관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이 열리고 레이첼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필립은 갸웃했다.
아까 왔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레이첼, 박운호 그놈에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필립의 질문을 들은 레이첼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데이먼이 사라지고 난 뒤에 그놈이 수상한 행동을 한다거나…."
"필립."
레이첼이 진지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네? 뭔가 본 겁니까?"
필립은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필립. 버릇이 없군요."
"예?"
필립은 기대와 다른 엉뚱한 레이첼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분한테 그놈이라니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닙니까?"
"........예? 그, 그게 무슨…."
레이첼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녀는 확실히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레, 레이첼. 박운호, 그놈이 당신에게 뭔가 협박이라도 한 겁니까?"
"필립, 운호 님은........좋은 분입니다. 그분을 더는 모욕하지 마시죠."
레이첼은 필립에게 오싹할 정도로 험악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필립은 언제나 움츠리고 불안해하던 평소의 레이첼과 완전히 다른 그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레, 레이첼 도대체 무슨…."
"제가 할 말은 아까 다 했습니다. 데이먼은 그날 밤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발을 잘못 디뎌서 호수에 빠진 게 아닐지…."
방금 보였던 험악함은 어디 갔는지 이내 평온한 얼굴을 하는 레이첼.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어 차분하게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필립은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렇군요…."
필립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레이첼의 묘한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
*
필립은 기이함을 느꼈다.
그동안 지켜봐 온 바로는 레이첼과 박운호의 친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박운호에 대한 레이첼의 태도는 명백하게 이상했다.
레이첼과 대화를 나눈 필립은 박운호의 집안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고 그레이스를 찾았다.
냉정하게 박운호의 초능력은 자신보다 강했다.
필립은 그레이스와 함께 박운호의 거처에 방문해 여차하면 그녀와 함께 그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레이스, 나와 함께 박운호의 거처로 가자."
"갑자기 또 무슨 일인데?"
그레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래도 박운호가 수상해. 데이먼의 실종에 그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데이먼, 그놈이 사라져?"
"오늘 아놀드가 데이먼이 며칠 안 보인다고 투덜거리더군. 또 게으름 피우나 싶어서 그의 거처를 찾았어."
"그래서?"
"며칠 전 폭우 내리던 밤 있지? 레이첼이 그날 밤 데이먼이 거처를 나간 뒤 그 후로 보이질 않는다고 하더군."
"넌 그게 운호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필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동기가 없잖아? 그가 데이먼을 죽여서 뭐 하는데?"
"그건…."
그것에대해서는 필립도 의문이었다.
"그와는 만나봤어?"
"만나봤어. 널 데려오지 않으면 집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한테 왔고."
"그래."
잠시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한번 가보자."
*
*
*
나는 필립이 레이첼의 집에서 떠나는 것을 보고 도로시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필립 녀석이 가는 방향이 그레이스의 거처 쪽이다. 그녀를 데려와 기어코 내 집 안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끈질긴 놈이군."
데이먼이 이 캠프에 뭔가 필요불가결할 정도로 중요한 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아무런 기술도 없는 일꾼 중 하나일 거다.
필립이 그레이스를 데려와서 집을 둘러본다고 해서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야 나오는 건 없을 테니.
오히려 그레이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해야 하나?
내 예상대로 필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스를 데려왔다.
"그레이스. 어서 와."
"운호,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너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지."
그레이스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필립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본다.
그리고 놀란다.
"아니.....이런 가구들은 도대체 어디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와 침대를 비롯한 가구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집안 풍경이었다.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는 내게 이 정도 거처를 꾸미는 것은 일도 아니다.
"왜? 탐나나?"
"됐다."
필립은 코웃음을 치고 집안을 천천히 거닐며 조사를 시작했다. 바닥에 엎드려가며 침대 밑까지 열정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쳐다본 나는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 너도 나를 의심하나?"
"아니......필립이 부탁해서 오긴 했는데....그냥 직업병이라 생각하고 이해해줘. 데이먼을 본 적이 있어?"
그녀는 필립과 다르게 나를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역시 저놈이 문제였다.
"난 필립이 말해주기 전까지 그가 옆집에 사는 줄도 몰랐다고."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던 필립이 뭐가 만족스럽지 못한지 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뭘 기대하였는지는 대충 알 거 같지만….
"그래 이제 만족하나?"
"데이먼을 어떻게 했지?"
이놈은 블러핑인지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지….
"그를 도대체 왜 나한테 찾는지 모르겠군."
"필립, 무작정 그를 범인으로 모는 짓은 그만해. 미안해, 운호. 귀찮게 해서. 우리는 가볼게."
그레이스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필립을 끌고 나간다.
"그레이스 다음엔 혼자와. 제대로 대접해 줄 테니까."
*
*
*
필립은 운호의 거처에서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들어서 있다는 게 특이하긴 했지만, 그게 이번 사건과 특별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필립. 예전의 세상이 아니야. 제대로 된 수사는 할 수 없어. 네 감만으로는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 짓는 건 위험해. 그리고 운호는 굳이 데이먼을 해코지할 이유가 없다고."
별 소득 없이 운호의 거처에서 나온 필립에게 그레이스가 충고하듯 말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필립은 박운호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밤이 되고 사위는 어둠에 휩싸였다.
필립은 조용히 창가에 앉아 운호의 거처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솔직히 잘 보일 리가 없지만 답답한 마음에 그냥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스 말대로 역시 괜한 착각이었나?'
감이 진실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슬슬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두운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후…."
필립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슬슬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박운호의 거처 옆집에서 자그마한 불빛이 나타났다.
밀려오던 졸음이 확 깼다.
옆집은 레이첼의 거처다.
필립은 그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어두워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성인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레이첼일 거다.
촛불을 들고 움직인 그녀가 향한 곳은 박운호의 거처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집인 양 익숙하게 박운호의 거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저건.....설마?"
필립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박운호와 레이첼.....둘이 공범이라면?'
레이첼은 데이먼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필립과 그레이스는 예전에 그 일로 데이먼에게 강하게 경고했고, 최근엔 잠잠히 지내는 듯했다.
그렇다고 레이첼의 원한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박운호는 초능력자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상당히 강인해 보이는 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