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미 목숨을 잃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레이스는 레이첼이 삶의 희망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운호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 손바닥을 베어서 나오는 피를 도로시에게 먹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광경에 그레이스는 경악했다.
도로시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숨이 돌아오는 모습은 기적과도 같았다.
*
*
*
수니에 의해 내 마력이 그레이스에게 간섭함과 동시에 그녀가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억! 허억!"
그러더니 곧이어 가쁜 숨을 내쉬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는 그레이스.
"왜 저러는 거지?"
뭐가 잘못됐나 싶어 수니에게 물었다.
[주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상당히 생생한 상황을 보고 있을 거예요. 그레이스 님은 그 상황에 깊은 공감을 하시는 거 같아요.]
나의 인지능력은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그레이스가 내 기억을 바탕으로 한 환영을 보고 있다면....내게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던 데이먼과 레이첼의 격렬한 감정까지 그대로 그녀에게 닿을 터였다.
"그녀가 믿을까?"
단순히 환영 하나를 보여줬다고 그녀가 내 말을 믿을지는 당연히 의문이 들었다.
[믿을 거예요.]
수니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녀가 보는 건 단순한 환영이 아니에요. 주인님이 진실을 알리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환영이죠.]
"그게 의미가 있나?"
[당연히 의미가 있죠. 지금 주인님의 의지는 거짓조차도 진실로 믿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주인님의 기억 속에 있던 진짜 있었던 진실을 그대로 겪고 있어요.]
"내 의지가 그 정도의 힘이 있다고?"
[네. 주인님이 사용하시는 텔레파시도 그와 비슷해요. 언어라기보다 주인님의 의사를 그대로 인식시키는 거죠. 그 텔레파시의 실감 나는 강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거짓도 믿게 할 수 있다는 건가?"
[할 수야 있죠.....그런데….]
"그런데?"
[주인님 그걸 믿는다는 자기 최면할 정도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해요. 헤헤, 죄송한 말이지만.....주인님은 그 정도로 연기의 소질은 없어 보이셔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수니가 보여준 환영을 다 봤는지 그레이스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동안 넋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더듬었다.
"내, 내가…."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줬다.
그녀는 내게 받은 손수건을 가지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하아…."
그레이스는 조금 진정이 됐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가 어떤 판단을 하던 받아들일게.......이곳을 떠나라고 하면 떠나지."
내 말을 들은 그레이스는 가라앉은 얼굴로 말없이 자리를 일어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풀이 죽어있는 듯 보였다.
이대로 떠나려는 거 같았다.
그런 그녀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돌아보며 말했다.
"운호....고마워."
".........그래."
뭐가 고마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은 했다.
'괘, 괜찮겠지?'
*
*
*
그레이스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본 탓에 머리가 멍했다. 특히 레이첼의 그 처절한 감정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레이스는 확신했다.
운호가 자신에게 보여준 그 날의 환영이 진실이라고......동시에 레이첼과 도로시에게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아니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운호를 찾을 때 만에도 갈피를 못 잡던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레이스는 운호가 왜 동료 없이 혼자 다니는지도 알 거 같았다.
그의 능력은 너무 뛰어나다.
특히.....도로시를 살리던 그 기적과도 같은 능력.
인간들이 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두지 않을 능력이었다.
그리고 레이첼이 운호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레이첼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나타난 구원자였다.
운호가 없었다면 딸을 잃은 레이첼은 아마도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 자살했을 거다.
운호의 집을 나온 그레이스는 곧바로 필립을 찾았다.
"어땠어?"
필립의 얼굴은 기대에 차 있었다.
그와 운호의 사이는 좋다고 볼 수 없다.
자신이 겪은 일을 그에게 말해줘 봐야 믿지 않을 거다.
필립의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립, 이 사건을 굳이 이렇게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데이먼이 그렇게 통제가 되던 인간도 아니고…."
"뭐.....라고? 그, 그레이스?"
역시 예상대로 필립은 당황했다.
"필립, 운호는 악인이 아니야. 데이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이곳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지."
그레이스의 말을 들을수록 필립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설사 그 둘이 범인이라 밝혀진다고 해도 우리가 선택할 일은 별것이 없어. 기껏해야 이곳에서 추방이겠지. 레이첼이 떠나면 도로시도 떠나. 그 모녀를 저 바깥으로 내쫓을 셈이야? 그 데이먼을 위해서?"
".....그, 그건…."
그레이스는 필립이 납득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레이첼은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데이먼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세상이 이 꼴이 되지 않고….
레이첼이 잡혀 재판을 받았다 하더라도.
딸을 죽이고 자신을 폭행하던 남편을 살해한 그녀는 무죄일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이걸 필립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도 그레이스는 그를 설득해 이 사건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
*
"뻑!!"
필립은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레이스는 이 사건을 묻기를 바라며 돌아갔다.
레이첼과 운호를 만나러 갔다 온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급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필립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허탈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뻑! 뻑!뻑!"
데이먼이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것도 맞다.
그들이 자백하지 않는다면 이 범죄를 입증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먼이 살해당해 어딘가에 유기가 됐다면 범인은 박운호다.
처음부터 수상한 인간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의 행적도 명확하지 않고….
그레이스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캐리마저도 탐내고 있다는 것을 필립은 알 수 있었다.
'그런 놈을 그냥 봐주자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 그래! 시체! 시체를 찾는다면 그레이스도 마음을 돌리진 않을까?"
180이 넘는 거구의 시체를 처리하는 건 쉽지 않다.
공범이라고 해도 레이첼이 직접 데이먼을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둘의 체급 차이는 너무 났다.
왜소한 레이첼이 180이 넘는 거구의 데이먼을 어떻게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운호의 힘을 빌렸을 거다.
필립은 시체를 땅에 묻었을까 싶어 섬 주변을 둘러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렇다면 호수?
그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 근처에 버린다면 섬으로 다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요트에 실어 먼 곳에 버렸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요트의 연료량은 험프리가 항상 체크를 하니 사용 여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설마.....운이 좋아 다른 곳으로 흘러간 걸까?'
필립은 험프리를 찾았다.
그에게 부탁해 호수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요트를 태워달라고?"
"주변을 둘러봤으면 좋겠군."
-부우웅….
필립은 요트 갑판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식혀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싶다.
시체를 찾는다고 해도 박운호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인을 알 수 있는 부검이나.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멍청한 짓이 맞다.
"후…."
..........인정해야 했다.
질투심?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필립은 그레이스가 박운호를 감싸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동생인 캐리마저 그놈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고까웠다.
자신은 박운호를 이곳에서 내쫓고 싶었다.
그 구실로 데이먼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데이먼을..........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잖아?'
"필립. 저기 뭔가 있는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필립은 험프리의 말에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나무판자에 걸쳐있는 사람이 보였다.
"시체?"
'데이먼의 시체인가?'
필립은 그런 기대를 하고 가까이 접근했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데이먼이 아닌 젊은 남자였다.
"사, 살아있어!"
요트를 세우고 그를 살펴보던 험프리가 소리쳤다.
원하던 걸 못 찾았다고 해도.....
살아있는 있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필립과 험프리는 호수 위 조난된 남자를 요트 위로 건져 올렸다.
*
*
*
내가 그레이스에게 진실을 보여준 이후.
필립이 데이먼의 일로 귀찮게 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레이스에게 혼난 건가?'
나야 귀찮은 녀석이 보이질 않으니 속이 시원했다.
「까망: 운호, 굉장한 녀석을 발견했다.」
까망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운호: 굉장한 녀석?」
까망 녀석이 굉장하다면 허접한 놈은 아니다.
최소 상급에서 최상급 침식체라는 이야기다.
「까망: 커다란 도시에 있는데 엄청나다.」
커다란 도시?
이곳이 미국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근처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미국에 오자마자 그레이스를 만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커다란 도시라고 하니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운호: 좀비킹?」
「까망: 그런 녀석은 아니다.」
결국 직접 봐야 알 거 같았다.
큰 놈은 흔치 않다
당연히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급하게 갈 필요도 없다.
지금 잡는다고 바로 스킬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도 스킬 포인트는 쌓인다.
어디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면 적당한 시기에 움직여도 상관은 없다.
「운호: 종종 잘 살펴봐. 혹시 이동하면 바로 보고하고.」
「까망: 알았다.」
까망이가 이렇게 적극적인 이유는 자신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동안 떨어지는 콩고물의 달콤한 맛을 좀 봤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는 거다.
"운호 있어?"
까망이와 메시지를 끝내고.....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