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도 내가 시스템 창의 인벤토리를 보고 직접 찾아야 했다.
수니에게 생각만 전달하면 바로 딱딱 꺼내주던 게 사라졌다.
'겨우 이 정도로 징징대는 것도 배부른 소리이기는 하지만.….
원래 사람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은 법이다.
수니가 먹통이 됐다고 하려던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법이다.
혹시나 귀찮은 일이 생길까 싶어 에르푸는 다시 들어가지 않고 슬러버 미궁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
*
슬러버는 지도를 보면 에르푸 남동쪽에 있었다.
그렇게 가깝진 않았다.
전에 에르푸에서 조사해 본 바로는 걸어서 한 달 가까이 걸린다고 했다.
지도를 보고 그쪽으로 연결돼 보이는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고 했는데 하루가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지도에는 엄청 가깝게 표시되어 있는데….
축척이 엉망인 거 같았다.
이쪽 길로 가면 마을 하나 나온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았다.
지도가 없는 것보다 조금 낫다는 수준이었다.
셋 다 체력이 좋아서 이동 속도는 빠르기는 하지만….
'에르푸에서 말이라도 구했어야 했나?'
하긴 엘프를 구출하느라 어떻게 구할 할 틈도 없었다.
사람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한번 마주칠만한데….
지도를 보고 간다고 하지만.
적막한 가도를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닌지 슬슬 불안해진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들을 의지할 수도 없다.
“실비아 구출할 때부터 생각했는데...진짜 마법사 맞아?”
내가 실비아를 구출할 때 대검을 들고 싸우는 걸 봤으니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 난 마법사다."
“그렇게 전투하면서 마법사라고?"
“그래. 의심하는 건가? 마침 잘됐군….”
가도 양쪽의 수풀에서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포위했다.
언뜻 보면 사람처럼 생겼지만.
지저분한 콧구멍이 잘 보이는 코와 입 양쪽으로 나 있는 긴 어금니.
오크였다.
키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근육질이라 그런지 느낌은 훨씬 위압적이고 커 보였다.
지저분한 장비도 그럭저럭 갖춰 입고 있었다.
꽤 많은 수의 오크가 나타났음에도 우리 중 누구도 겁을 먹진 않았다.
그냥 살펴보기에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놈이 없었다.
그러니 긴장이 될 리가 없다.
“크룩. 인간 살 많아 보인다. 맛있겠다. 크룩.”
못생긴 오크 한 놈이 나를 보고 말했다.
수컷이 나를 보고 입맛을 다시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아일라, 잘 봐라. 이게 내 마법이다. 다크 스피어!"
검은 마력창을 생성했다.
그리고 날 보고 입맛을 다신 오크 놈을 향해 마력창을 던졌다.
순식간에 날아간 마력창이 오크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오크는 그대로 마력창이 머리에 꽂힌 채 뒤로 넘어갔다.
“크룩?”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오크들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봤지?"
"뭐가 봤지야! 누가 봐도 팔 힘으로 던지는 거잖아! 그게 무슨 마법이야."
허...이걸 못 믿겠다고?"
“그래.”
“어쩔 수 없군. 다른 마법을 보여주지."
“다른 마법?"
“잘 봐라. 어스퀘이크!"
한쪽 발을 들어 올려 힘차게 내려찍었다.
쿵!
내려찍은 지면이 움푹 가라앉으며 땅이 진동했다.
그 진동에 오크들이 휘청였다.
“크룩! 고, 고위 마법사다!! 도, 도망쳐라!! 쿠룩!"
오크들이 겁을 집어먹고 빠르게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봤지?"
"미친!! 그냥 무식하게 발을 구른 거잖아!!"
“어허....이래도 애인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오늘 밤에 아주 혼꾸멍을 내주어야겠군.”
그래도 예쁜 엘프 애인과 티격태격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이틀을 야영하고.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153화 > 볼린
도니는 마을 입구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시간 안 가는군.”
"그러게..."
같이 경비를 서고 있던 빌리가 하품하며 대꾸해줬다.
마을 청년들이 돌아가며 문지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이러다 날이 저물면 목책 문을 닫을 거다.
어제도 그랬고 엊그제도 그랬다.
일주일에 사람 한번 보기 힘들다.
하품하며 가도를 바라보던 도니의 눈이 커졌다.
“누, 누가 오는데?"
"이런 촌구석에 누가.....어?"
세 사람이었다.
'어른 하나와 아이 둘?'
멀리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까이 옴에 따라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내가 너무 커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작아 보였던 거다.
앞에선 사내는 거대했다.
도니는 살면서 저렇게 큰 사람은 처음 봤다.
190? 아니 2미터도 넘어 보였다.
사내가 점점 다가오는데 심장이 저릴 정도였다.
도니는 옆의 친구를 봤다.
녀석도 완전히 얼어서 넋이 빠져있었다.
조금 날카로운 눈매.
검은 머리와 굵은 선을 가진 얼굴.
사내는 마법사나 입을 법하지만.
마법사가 입기에는 조금 밋밋한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 커다란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마법사 지팡이처럼은 보였다.
“어, 어쩐 일로..….”
도니는 말을 내뱉고 바로 후회했다.
'미친놈. 어쩐 일이긴 어쩐 일이겠어. 마을로 들어가려고 왔겠지.'
과도한 긴장에 말이 그냥 생각 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거대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도 예상외였다.
좀 뜬금없기도 했다.
"마법
사다."
마법사.....이시라고요?”
누가 봐도 칼 좀 쓸 거 같은 덩치다.
도니는 살면서 마법사를 딱 한 번 봤다.
그 마법사에 비해 뭔가......전혀 마법사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입고 있는 것도 마법사로 보기에는 인위적인 냄새가 났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못 믿겠나?"
하지만 도니는 사내의 무심한 시선과 묵직한 목소리에 오금이 저려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아래로 깔렸다.
입 잘못 놀리면 저 커다란 주먹이 머리로 날아올 거 같았다.
“아, 아닙니다! 믿습니다!"
도니는 군기가 바짝 든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들어가도 되나?"
“네. 드, 들어가셔도 됩니다.”
“마을에 여관은 있나?"
"네! 길 따라가시면 교차로에 하나 있습니다!"
'내, 내가 안 된다고 해도 못 막았을 거야. 마, 마법사라잖아....
도니는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했다.
솔직히 마법사가 아니라도 못 막았을 거다.
그때 난생처음 맡아보는 향긋한 냄새가 콧속을 간질였다.
'여자!'
마을의 억센 처녀들에게서는 도저히 맡아볼 수 없는 냄새.
자칭 마법사라고 하는 커다란 사내의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스쳐 지나가며 나는 향기였다.
그녀들의 얼굴은 후드 속에 반쯤 감춰졌지만.
도니는 그녀들의 드러난 코와 입술....그 하얀 턱만으로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한 명은 금빛 머리카락.
다른 한 명은 은빛 머리카락이 뒤집어쓴 후드의 틈새로 보였다.
-꿀꺽.
'엄청난 미녀들이다!'
그녀들의 후드를 벗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니는 마을로 들어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미친놈아! 좇나 수상한데 그냥 들여보내면 어떻게 해!"
빌리가 갑자기 급발진을 했다.
멍하니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니는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발! 그럼 니가 막던가! 지금까지 잔뜩 쫄아서 얼어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뭔 개소리야!"
“크......크흠....어, 어떡하지?"
도니의 쌍욕에 바로 진정이 되는 빌리.
“어떻게 하긴 빨리 촌장님한테 가서 보고해.”
“내가?!"
빌리가 왜 귀찮은 일을 시키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 내가 갈까?"
도니의 그 말에 빌리가 흠칫했다.
“어, 어쩔 수 없지....마, 마음 넓은 내가 가야지."
빌리가 재빨리 마을 안쪽으로 뛰었다.
"으이구, 저 쫄보 새끼."
한 명이 가면 혼자 경비를 서야 하는 게 무서워 저러는 거다.
“그래도 내가 저놈보단 낫지.”
도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쫄아서 입도 뻥끗 못 하던 빌리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