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족? 난 인간이다."
"인간이요? 설마요. 인간들의 그 느낌과 완전히 다른데요. 뭔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왼쪽 눈을 깜빡여 주세요.”
'뭘.......깜빡이라고….’
내가 이쪽 세계의 인간이 아니라 그런가?
아니면 육체 강화를 통한 신체의 변화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이것들은 진실을 말해도 도통 믿지를 않는다.
“왜 엘프 레인저들이 숲을 나오지 않는 거지?"
루나에게 물었다.
“한때 숲 밖으로 엘프를 구출하러 간 레인저들이 함정에 빠져 단체로 잡힌 적이 있어서 그 후로는 숲 밖으로 추적할 수 없게 했어요.”
“엘프들이 마음만 먹으면 에르푸 정도는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정리하면요? 그다음은 에르푸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똑같아요. 엘프는 인간왕국을 정복할 수 없어요. 정복한다고 해도 다른 인간왕국이 가만두지도 않을 테고요. 어차피 싸울 거면 유리한 숲에서 싸우는 게 낫죠.”
"결국 인간이 포기하지 않는 한 끝이 없는 싸움이라는 거군.”
"그렇죠...."
확실히 겨우 에르푸를 정리한다고 해서 인간들이 포기할 거 같지는 않았다.
현대사회였으면 인권단체 같은 것들이 난리를 쳤겠지만....
왕과 귀족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대가리 놈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이상.
아니면 엘프가 세계정복을 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문제였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막말로 지금도 엘프 하나를 잡으려고 죽어 나가는 인간이 훨씬 많다.
그래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불굴의 의지..... 욕망이었다.
"손님이 왔군."
내 말과 동시에 숲에서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엘프가 나타났다.
이어서 활을 등에 메고 진한 녹색으로 통일된 경장을 입은 엘프 레인저들이 나타났다.
미녀들이 잘빠진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됐다.
"아, 아니스 님!"
모닥불에 둥글게 앉아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스라고 불린 엘프는 길게 늘어뜨린 백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얼굴은 역시나 엘프답게 예뻤지만 차분한......이라기보다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녀가 그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로 나를 잠깐 응시했다.
“프리실라 말대로군요....외관은 인간과 비슷한데...이런 존재감은 확실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8개의 고리.
형성된 형태는 인간과는 조금 달랐지만, 8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예상할수 있었다.
“세게드의 촌장 아니스라고 합니다."
멤버랑 실비아의 마을 촌장인 거 같았다.
“박운호다.”
“박운호? 특이한 이름이네요….”
“그냥 운호라고 불러라.”
“네, 운호 님. 부끄럽지만, 저희가 포기한 아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워낙 무표정으로 말을 하다 보니 감사 인사를 하는데도 감사받는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런걸 소울 리스라고 하던가?
“그리고 멤버와 실비아, 마을로 돌아가면 징계받을 각오를 하세요.”
그런데 또 저런 말은 무표정으로 하다 보니 상당한 공포감을 조성했다.
“네….”
멤버와 실비아가 찔끔하고 고개를 숙였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그에 대한 답례입니다.”
드디어 아니스의 입에서 반가운 소리가 나왔다.
그녀가 허공에서 내게 자그마한 호두 같은 걸 꺼내 건네줬다.
"저, 정령의 씨앗!!"
그걸 보고 루나가 놀라 소리쳤다.
"정령의 씨앗?"
"네! 생명의 나무에서 나오는 귀한 물건이에요. 정령사가 아니어도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물건이라고 알고 있어요.”
프리실라가 예쁜 정령을 다루는 모습에 조금 탐이 났었는데.....이런 퀘스트 보상을 받는다면 엘프를 고생해서 구해준 보람이 있었다.
<152화 > 여정
"씨앗이라고 하지만 그릇에 가깝습니다.”
“그릇?”
"에고를 담는 신성한 그릇입니다. 만약 정령이 씨앗에 깃든다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정령계의 정령으로서는 절실히 원하는 일이죠. 그것을 조건으로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음....그, 그렇군.”
이해 못했다.
어쨌든 쉽게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이라는 거다.
내게 보상을 준 아니스는 엘프들을 데리고 떠났다.
정령의 씨앗이라는 걸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영롱한 호박색 보석 같은 걸 덩굴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손에 감싸 쥐고 있으면 정령들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정령 중 하나와 계약을 하면 된다.
"지, 지금 해보게?"
아일라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궁금하기도 했고 굳이 아낄 이유가 없었다.
두 엘프의 기대에 찬 시선이 쏠렸다.
"처음 보나?"
그녀들에게 물었다.
“네. 이야기만 들었지, 본적은 없어요.”
루나의 대답은 엘프들도 보기 힘든 귀함 물건인 모양이었다.
[주인님.]
그때 흔치 않게 수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응??
[저는 그 씨앗에 강렬한 끌림을 느낍니다.]
'이것에 끌린다고?”
[네.]
정령이 말을 걸어온댔는데 엉뚱하게도 수니가 말을 걸어왔다.
수니가 정령이었나?
정령보다는 정신체에 가깝지 않을까?
아니면...전자정령?
'이, 이걸 원한다고?"
[네, 주인님. 저는 그것에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한다면?'
[저는 주인님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니의 아쉬움이 절절히 내게 전해졌다.
'위험한 거 아냐?"
[그렇진 않을 겁니다.]
확실해?'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
주는 게 아깝다기보다 수니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에 접촉해도 괜찮은가 싶어서였다.
“왜? 뭔가 문제라도 있어?"
씨앗을 쥐고 있는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아일라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씨앗에 들어간 정령이....잘못됐다는 소리 들은 적이 있어?"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생명의 나무에서 나온 씨앗인데 괜한 걱정 아닐까요?”
내 질문에 루나가 갸웃하면서 대답해 줬다.
“그래?”
계속 쥐고 있는데 수니 외에 다른 정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도 잘못될 거 같진 않습니다.]
수니는 어지간히 이 정령의 씨앗을 원하는 거 같았다.
그동안 무임금으로 열심히 일한 수니를 위해 선물 하나 해도 괜찮지 않을까.
'좋아. 허락한다.'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수니에게서 기쁨의 감정이 내게 전해질 정도였다.
수니가 정령의 씨앗에 스며들었다.
정령의 씨앗이 검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검게 빛난다기보다 빛을 흡수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처음 내가 각성하기 전에 주운 그 검은색 마석..….
마석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마석이 내던 빛과 비슷했다.
"어? 들어간 거야?"
정령의 씨앗에 변화가 있자 아일라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무슨 정령이 들어갔어?"
“......전자정령?"
“전자정령이라니...그게 무슨 정령이죠? 처음 듣네요….”
"글쎄.....나도 처음이라.….”
적당히 얼버무렸다.
"어? 운호 갑옷이...."
아일라 말에 내 몸을 보니 마력 갑옷이 흩어지며 순식간에 나는 알몸이 되어버렸다.
"......."
"......"
살짝 얼굴을 붉히고 은근슬쩍 내 몸을 훑어보는 루나의 시선을 느꼈다.
“뭐, 뭐 하는 거야 바보야!! 이런 곳에서 벌거벗고!"
"아니...이건...."
처음 전투 슈트의 단순한 음성인식 인공지능이었던 수니.
내가 각성하면서 시스템 능력에 섞여들었다.
그 이후 수니는 진짜 인공지능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내 마력을 이용한 그 활용 능력은 나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내가 하드웨어라면 수니는 소프트웨어다.
내 마력을 제어해 갑옷을 유지 시켜주는 건 수니였다.
수니가 정령의 씨앗으로 들어가자 그 제어가 풀렸다고 볼 수 있다. 마력 갑옷을 거의 실시간으로 관리해 주고 있었던 거 같았다.
마력 갑옷은 내가 만들 수도 있지만, 수니처럼 잘빠지게 만들 수도 없고 평소에도 마력 갑옷 유지를 위해 신경을 쓰는 건 은근히 귀찮은 일이다
인벤토리에서 청바지와 티셔츠 하나를 꺼내 주섬주섬 입었다.
그리고 마법사 행세를 하기로 했으니 마력으로 검은색 로브를 만들어 위에 걸쳤다.
마력을 물질화하는 건 다 좋은데 색깔은 고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마법사 하면 지팡이를 빼놓을 수 없다.
후작 놈의 고급 지팡이를 코스프레용으로 쓰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지팡이에 추적마법이 걸려있어요. 전 4서클이라 풀 수 없어요. 아니스 님이었으면 풀 수 있었을 텐데….”
아니스는 이미 떠나간 버스다.
추적마법이 걸려있다고 하는데 그걸 해결할 때까지 버젓이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아쉬운 대로 엘프의 숲에서 얻은 허접한 마법사 지팡이를 들었다.
“정령의 씨앗에 들어간 정령이 나오는 시기는 며칠에서 몇 년까지도 걸리는 거로 알고 있어요.”
루나의 말은 그렇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걸 미리 말해줬어야지....
내 손에서 은은한 검은빛을 뿜어내는 정령의 씨앗이 보였다.
먹통이 된 수니.
예상치 못한 수니의 휴가였다.
수니가 먹통이 되자 상당히 불편해졌다.
일단 옷도 내가 꺼내서 직접 입어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