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비상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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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지금이라도 쫓아가봐야 되나? 근데 어디로 간줄 알고...?
남겨진 치맛단은 붙잡고 내가 이리저리 쏘다니자 정신이 사나운 건지 하인젤이 내게 말한다.
"그냥 기다리면 올 겁니다. 애당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시면서 그냥 편히 기다리시지요."
"하지만, 그랬다가 너처럼 죽어버리면...!"
아. 말실수 했다.
"...? 제가 죽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 너 죽어? 에이~ 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고... 그보다 안가도 되는거 맞아?"
빠아안~
내가 너스레를 떨며 아무것도 아닌척, 잘못들었을 거란 척하며 넘어가 보려 했지만 그런게 통할 인물이 아니었다.
"제가 가면 주인님 호위는 누가합니까. 그놈이 혼자일 거란 보장도 없는데.아까 그 놈을 알고있던 눈치도 그렇고, 또 지금 제게 한 말도 그렇고..."
하긴... 하인젤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상황에 헤에~ 그렇구나~ 라고 하면서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잠깐, 이거 어찌보면 기회인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또 저번에 신이 어떻게 그녀들을 설득해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걸 기회로 한번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괜찮지 않을까?
'응, 사실 나 너네한테 숨겼던게 있어! 사실 너희는 소설 속 인물이고 나는 신이 보내서 너희 꼬시러온 놈이야!'
...이건 아닌거 같다.
저게 사실이었지만 왠지 내가 너무 쓰레기같지 않은가. 물론 이미 하렘을 차리겠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쓰레기 확정이긴 하지만.
"...그래, 사실 하인젤 너는 아까 그놈한테 몇개월 뒤에 죽어. 그래서 내가 그놈을 반드시 잡아야 된다고 했던 이유고."
"...어떻게 아신거죠?"
조금이나마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상시와 변함이 없었다.
아마 레이즈라면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대략적으로 알수 있겠지만 아직 미숙한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잡아낼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될까. 일단 신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되는 것은 피할수 없을 것 같았다. 걱정이라면 그녀들이 신을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는 만큼 그 불씨가 내게도 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주인이시여, 말하기 힘드시다면 꼭 말하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말하지 않는다 하시더라도..."
하지만 이내 걱정스런 눈길로 내게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그 눈을 마주하고 나니 생각이 바뀐다.
그래, 막상 이렇게 이유없는 신뢰를 받는 주제에 내쪽에서 내빼는건 말이 안되지.
설령 그녀가 실망한다 하더라도 저 믿음에 거짓을 말할수는 없었다.
"아냐, 말할게. 후...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실망적인 이야기일수는 있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지."
그녀도 내 진지해진 분위기에 맞추어 경청해주는 자세를 취한다.
"음, 사실... 나는."
"아알레엑!! ...님?"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레이즈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에 든 무언가를 붕붕휘두르며 달려오다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하인젤을 보고는 우뚝 멈춰선다.
"아...하하~ 미안 미안, 신나서 존칭을 그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대체 그 흉측한 물건은 무슨 생각으로 들고 온 겁니까?"
레이즈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대자로 몸을 벌리고 선 하인젤 때문에 그녀가 뭘 들고 왔는지는 볼수 없었지만...
투두둑...
으웨에엑... 저거 방금 뭐 이상한 신체 조직이 떨어진거 같은데?
하인젤의 치마 밑으로 살짝 보인 떨어지는 무언가로 인해 안보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아, 이거? 헤헤... 알렉님 미안~ 얘가 뭘 훔쳐갔는지는 못찾았어 힝..."
"어? 훔치긴 뭘 훔쳐? 얘가 뭐 훔쳤어?"
레이즈가 고개만 빼꼼히 옆으로 내밀어 물건을 못찾았다며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해온다.
근데 왜 사과하지? 쟤가 뭐 훔쳤나? 나는 모르는 일이기에 하인젤에게 물어봐도 그녀도 모르는 일이라는듯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엥...? 난 얘가 뭐 훔쳐간줄 알고 잡으러 간건데?"
"???"
뭔가 인지 부조화가 오는 느낌이다. 아니 나는 그냥 잡으라고만 했는데 그게 왜 소매치기까지 발전한거지?
"에이~ 그럼 이것도 괜히 가져왔네. 혹시 얘가 삼켰나 싶어서 머리째로 들고 왔더니만."
그 정체불명의 물건은 머리였나보다. 아니 근데 삼켰다고 생각하면 배를 가르지 않나? 왜 머리를... 아, 레이즈구나. 그럴수 있지.
괜히 들고 왔다는 듯 레이즈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휙 던져버렸다.
나는 괜히 비위상하기 싫었기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때까지 재빨리 눈을 감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도둑맞긴 한것 같군. 다만 이놈이 그 주범은 아니지만.]
대신 들리는건 매번 들어도 처음듣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
그 목소리에 어라? 싶어서 눈을 뜨니 하인젤과 레이즈가 다급히 검을 다시 만들어내며 내 앞을 지키듯 서는 모습이 보였다.
툭툭.
무슨 일종의 신호인듯 하인젤이 레이즈의 허리맡을 툭툭치자 레이즈가 달려드는데...
"자... 잠깐!"
다행히 내 목소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즈가 칼을 휘두르던 것을 멈췄다.
사실 신의 목덜미 바로 직전에서 멈췄기에 저게 휘두르던걸 멈춘게 맞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잘라버리진 않았으니 그게 어딘가.
"...또 다시 얼굴을 보이다니. 알렉이 아니었으면 넌 이미 뒈졌어."
내 목소리에 멈춘게 맞는지 레이즈가 나즈막히 으르렁거렸다.
'휴우... 다행이다... 신이라 안죽긴 하겠지만 그러다가 빡쳐서 소멸빔같은거 쏘면 어쩌지 했는데.'
아니면 그대로 죽었거나. 무엇하나 좋은 결말은 아니었기에 그나마 이정도로 끝난게 다행이었다.
"...왜 또 나타난거지?"
저번에 딱 한번 들었던, 본성의 하인젤 빡침버전이 나왔다. 비록 내 앞을 지키고 있어 표정을 보진 못하지만 잔뜩 찌뿌리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신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건지 손에들린 리처드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무튼 이 교착상태가 오래가서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그녀들과 신의 사이에 서서 떨어트려 놓았다.
"...설마 둘이 아는사이인가요?"
내가 토닥이며 검을 집어넣으라고 부탁하자 평소의, 아니 평소보다 살짝 더 눈썹이 찌뿌려진 하인젤이 물어봤기에 나는 씁쓸한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가 조금 깎이겠지만 어쩔수 없지...
레이즈도 평소의 밝은척하는 레이즈가 아닌 본래의, 아무 표정없는 그녀로 돌아와 버렸다.
"...나중에 꼭, 꼬오옥 해명 부탁드립니다."
아니, 존댓말까지 쓰고있었다. 쌓아둔 호감도를 전부 날려버렸나 싶은 반응이었지만 그래놓고는 둘이서 내 손을 한쪽씩 잡아 둘 사이에 나를 끼워넣는 걸 봐선 다행히 남남 선언까지는 아닌것 같았다.
[허어~... 일이 복잡해졌구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 손에 든 머리를 바닥에 떨어트리... 아니, 일종의 블랙홀 같은데로 떨어트리고는 우리를 바라본다.
[애들아, 일이 좀 곤란해졌다. 미안하지만 이번 유희는 여기까지. 이쪽은 조금 위험하니 원래 세상으로 보내주마. 뭐, 나머지는 차수현, 니가 알아서 설명해라.]
그리고는 박수를 짝. 저번에 보았던 그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보인다. 땅과 하늘의 경계도, 지평선도 없는 공간감각이 없어지는 공간.
"뭐... 뭐야! 적어도 설명은...!"
하인젤이 당황해 소리치지만 다시한번 박수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로 앞에 검은색 직사각형이 하나 생겼다.
쑤우욱.
그리곤 그 검은 직사각형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릴 삼키더니
"아, 수현아 왔어? 음, 양옆에 두명은..."
순식간에 현설이와 어마어마하게 고급스러운 집앞에 우릴 데려다 놓았다.
"으... 으응, 오랜만이야."
[ 쏘리. 일이 좀 곤란해졌다. 당분간 자리 비울테니 알아서 해라.]
...앞길이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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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명부 인사명부... 애미 시발, 고지식한 새끼들 이런건 인수인계할때 어? 좀 시발, 현대적으로 만들지 양피지가 뭐야 양피지가. 컴퓨터에 따다닥 몇번 검색하면 나오게 만들지."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하늘도, 땅도 없는 공간에서 멋들어진 회색의 양복과 장발의 흰 머리칼을 묶은 중년이 욕설을 뱉으며 허공을 뒤적거렸다.
"아휴, 시발 이렇게는 백년은 걸리겠네."
한참을 뒤적이던 남자는 이내 숙였던 허리를 피고는 손뼉을 한번 쳤다.
촤르르르륵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순식간에 책장들이 끝을 모를 정도로 좌르르륵 생겨난다.
"허... 시발 이래서 요즘 사람들이 로봇으로 바꾸나? 옘병 뭐 이렇게 많아..."
전임자들이 컴퓨터가 편한걸 모르고 옮기지 않은게 아니었다.
'못'한거지.
이 인사명부를 볼수 있는 건 세상의 단 한명. 절대적 권한을 가진 신뿐이었다. 그렇기에 전임자는 이 수많은 서류를 컴퓨터에 이식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인사명부를 이식했으면 다른 서류들도 이식해야 될텐데 엄두가 나겠는가? 그래서 손도 대지 않은것이었다.
"시부랄 영감탱... 내가 어? 살살 꼬드길때 알아봤어야 되는데..."
남자가 투덜거려보지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소멸했으니까.
"어쩐지 뒤질때 아주 행복해 보이더라."
그도 신이 되면 좋을 줄 알았다. 하고 싶은거 막하고. 근데 되보니까 보이는건 날마다 들어오는 새로운 서류덩어리 들이다. 성욕? 항상 고분고분하게 반응하니 처음에만 좀 있었지 지금와선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절대자라는 건 그만큼 고독한 위치였다.
'그러다가 꽤 재밌는 애를 찾아서 좀 대리만족 하려고 했더니 회장님 노는데 끼어들어?'
그 남자의 머리통에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던 흔적은 분명 그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쓰는 힘과 매우 유사한 힘. 그 뜻은 천사건 악마건 하위신이건 간에 지금 자신의 유희에 은근슬쩍 끼어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그놈이 거기서 튀어나올때 부터 뭔가 이상하더라. 내가 뭐 코딩 잘못해서 버그난줄 알았는데.'
어떤놈인지는 몰라도 가령 아주아주 약한 힘을 가진 놈이더라도 자신의 대리자에겐 치명적인 위협이기에 싹을 잘라놔야했다.
"휴... 이건 혼자서 못하겠네 얍!"
그가 손뼉을 치자 그와 똑닮은 사람들이 무궁무진하게 생겨난다.
"일단 어느놈인지 찾아야 되니까 지난 1년간 외출이나 휴가기록 있는새끼 찾아놔."
그리고는 그 말과 함께 끝없는 책장의 더미로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신도 꽤 고달픈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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