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레이즈 (1)
* * *
헐?? 헐???
아니, 이게 뭐야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응… 나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
레이즈의 질투심은 나를 향하는 게 아니라 하인젤을 향하는 거였나?
“아… 근데 언니도 주인님을 좋아했었지…”
아니었다. 지금 레이즈가 나를 향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연애 감정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은 행복해서 충족감에 간질거리는 거였지,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간질거리는 느낌이 아니었단 말이다.
“…응, 아마도 그럴지도.”
하지만, 그녀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 감정이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았다. 왜냐면 몰랐으니까. 뭘 알아야 하던지 말던지 하지.
“…그럼… 우리 이제 서로 싸워야 되는거야…?”
하지만 하인젤의 불안해하는 표정에 레이즈는 가슴이 아려옴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가 저렇게 울먹이는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꼭 그럴 필요가 있어? 귀족들은 다 부인 두세명은 있는 것 같던데.”
그래서 자신이 보았던 걸 얘기해준다.
노예상에 있었던 시절, 그녀는 날마다 새로운 여자를 데려오는 귀족을 본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노예상인은 부인이 아름다우시다며 아첨을 한걸 본적이 있었다.
“…! 정말? 그럼 우리 안싸워도 되는거야?”
하인젤의 밝게 웃는 모습에 레이즈의 가슴 한켠이 따듯해지는게 내게도 느껴진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도 또한 미소가 서린다. 이것 만으로도 레이즈가 하인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레이즈는 왜 내게 집착하는가.
“응, 우리 서로 사이좋게 나눠갖자.”
이런 말을 아무 미련없이, 집착없이 이야기하면서.
또 다를게 없는 일상이 지나갔다. 나는 자꾸 숨어대는 하인젤을 챙겨주려 노력하고, 레이즈는 더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나를 가끔씩 아련하게 바라보는 하인젤을 보며 알수 없는 따끔거림을 느낄 뿐이다.
“레이즈, 오늘 주인님 엄청 귀엽지 않았어?”
“…귀엽다는 게 뭐야?”
“음… 그건 보았을 때 막겨안고 싶다거나, 뽀뽀해주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거 아닐까?”
하인젤의 그 말에 레이즈는 그렇다면 귀여운 건 너 아닌가 라는 생각을 거의 입 밖으로 내 뱉을 뻔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고. 그녀의 본능이 그걸 막았다.
그 이후로도 하인젤은 레이즈에게 그날 그날 나의 귀여웠다는 점이라던게 멋있었다고 생각했던 점을 말해주었다.(듣는 당사자의 입장에선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그러던 어느날, 레이즈는 평소와 다름 없이 사용인으로서 배워야 될 것들을 배우던 중, 복도를 걷던 나를 발견했다.
“…”
레이즈는 그런 내게 손을 붕붕 흔들며 아는 척 하는 대신, 조용히 뒤 따라가기를 선택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녀에게서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기에, 아마 그냥 본능이었다고 밖에 말할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레반테 공녀.”
“네, 좋은 저녁입니다. 골드르크 공자.”
그리고 내가 무릎꿇으며 한 소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며 쓰라린 감각을 느낀다. 무척 기분나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레이즈는 미간을 찌뿌리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벗어날수 없었다는 표현이 옳은 것 같다. 벗어나려는 순간 레이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끔찍한 상황들이 연출되었기에.
내가 여기서 사라져버리면 갑자기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이지 않을까, 자신을 귀찮게 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우리의 험담을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몰라도 하인젤을 어떻게 되는거지?
왜일까, 분명 우리보고는 자신은 친구가 없다면서, 친구가 되어달라며 허물없이 굴어놓고는 저 여성에게는 왜 저렇게 잘해주는 것일까.
살짝 심술이 난다. 우리에겐 알렉, 너밖에 없는데. 우리가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너밖에 없는데.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건 알고 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우리가 있던 그 어두운 곳에서 우릴 꺼내준 건 너였잖아.
나는 그다지 똑똑하진 않지만, 그래도 저번에 그 여자가 알려준 내용중에 어둠처럼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빛을 보게 된다면 눈이 먼다는 내용을 배운 것은 기억한다. 알렉, 네가 우리의눈을 멀게했으니, 우리가 너의 눈을 조금은 가려도 괜찮지 않을까?
다른 여자애와 대화하는 나를 보며 레이즈가 생각했던 수많은 혼잣말들이 들려와 내 머리를 헤집어 놓는다.
그녀가 내게 지니고 있던 감정은 필시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정또한 아니었다. 처음엔 나도 우정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 우정이라 느꼈던 감정은 하인젤의 끝없는 가스라이팅으로 점차 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질투라고 인식함은 분명 틀리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가지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것 말고는 어떻게 알아?
간단해 그 사람이 다른 여자랑 있다고 생각해봐. 그때 짜증이 나거나 기분이 나빠지면 너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거야.
그리고 레이즈는 아까했던 망상에 저 여자 대신 자신을 대입해보았다.
두근 두근
가슴 한켠이 따듯해지고,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그래, 역시 나는 알렉,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순간 여자의 자리에 자신 대신 하인젤을 대입해 보니 이 설렘과 두근거림이 아까보다 심해진다.
이 감정은 뭘까. 사랑까지는 어찌저찌 이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건 아직도 모르겠다.
레이즈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 여자와 대화를 하던 내가 뒤에 숨어있는 레이즈를 발견한건지 순간 내 눈이 커지며 소녀와의 대화를 중단하곤 다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레이즈가 홀로 남겨진 소녀의 찌뿌려진 미간을 보며 입가에 소녀의 미간이 찌뿌려진 만큼 그녀의 입가가 올라갔다.
”어… 어, 레이즈? 그 네가 왜 여기… 아니, 그런게 아니라”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내 뒤편으로 보이는 화가 난 듯한 저 소녀의 표정을 보며. 레이즈는 미소지었다.
역시, 나도 당신의 눈을 조금은 멀게해도 될 권리가 있다고. 내 가슴에 당신의 존재를 이만큼이나 채웠으니, 나도 당신의 가슴에 이정도의 공간은 차지해도 되지 않겠냐고.
그래, 당신이 귀족인 만큼,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처럼 가슴 한켠에 나를, 하인젤을 품고 있으면 된다고.
다만, 당신이 이렇게 내 눈을 멀게해 당신 말고는 들어오지 않게 했으니, 내가 당신의 눈을 조금 가리더라도 이해 해달라고.
.
.
.
기묘한 감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십여년의 세월을 겪었음에도, 현생의 시간은 단 1초도 흐르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돌아왔을 때 보인 것은 하인젤의 정수리였다. 아, 가기전에 한창 하인젤을 위로해주고 있었지.
그렇다면 내 고민의 주인공도 근처에 있을터였다. 레이즈를 찾기위해 고개를 두리번 두리번거리니 역시나 뒤편에 방긋 방긋 웃는 미소로 나와 하인젤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수 있었다.
…항상 저렇게 방긋방긋 웃고다니길래 원래는 이렇게 밝은 성격이었구나라고 생각은 했는데, 사실은 그냥 연기였을 뿐이라니,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꽤 충격적이었다.
매체에서나 보던 소시오패스를 실제로 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소시오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아니, 감정을 아예 못느끼는 것도 아니니 그것도 아닌가…?
나와 하인젤 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와 관련해선 기쁨,슬픔 등의 단순한 감정들은 느끼고 있었으니…
‘에라 모르겠다.’
뭔가 갔을때보다 오고 난후에 생각할게 더 많아진것 같지만 그래도 처음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걸 위안삼기로했다.
그래도 레이즈가 왜 내게 집착하는지, 또 왜 그렇게 하인젤을 아끼는지에 대해서는 알게되었으니 그래도 괜찮다고 할수 있었다.
하인젤은 은근 순둥순둥해서 조금만 설득하면 어찌 될것 같았으니 중요한건 레이즈, 그녀였다.
흠… 그녀 본인도 왜 그렇게 질투를 느끼는지는 모르니까 먼저 하인젤을 꼬드긴다음에 같이 설득하면 어찌저찌 되지 않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둘이서 설득하면 그래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면서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감정을 못느끼는 소시오를 내가 어떻게 할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나랑 같이있으면서 조금씩 텅빈 가슴에 무언가를 채워가니 시간을 좀 들여야겠지.
그리고 저 텅빈 가슴속을 다 채우는 그 날이야 말로 그녀의 집착을 해결하는 날이 될 터였다.
그 전까지는 뭐… 곁에 두고 내가 조심조심 지켜봐야지.
“…저, 주인님… 이제 슬슬 놓아주셔도…”
아, 너무 오래 껴안고 있었나보다. 어느새 고개를 숙인 하인젤이 내게 나지막히 속삭이는 말에 정신을 차리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흠흠… 그… 아무튼 주인님의 의지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인젤이 태연한척 무표정을 가장하지만 허술했다. 내 눈엔 그녀의 입꼬리가 움찔움찔거리는게 다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귀엽기는…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될텐데. 그래도 뭐…
“응! 하인젤, 우리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이렇게 달라붙는 이 시한폭탄보다는 낫다. 이렇게 밝은 척 하지만 내면은 어둠 덩어리라는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현대에 가면 현설이와 견줄만한 연기실력을 가진게 아닐까?
“히히히힣”
실없이 웃긴… 그래도 나와 하인젤 한정으로는 솔직하게 웃는 거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주인님 죄송합니다만, 그 이현설이라는 여성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아, 어떻게 질투는 해결하긴 했는데 이건 해결 안됐었지. 하지만 또 이렇게 되니 막상 그녀들과 현설이를 대면시키는게 두려운게, 사실 현설이가 멘탈이 좀 강하다곤 해도 그래봤자 일반인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녀들은 그… 인간을 초월했다는 마스터인데 정말 괜찮을지가 고민이었다. 물론 대화만이라면 이 핸드폰으로 하는거니까 상관은 없었지만…
[그건 내가 해결해 주도록 하지. 어차피 나도 이제 쟤네랑 이야기 좀 해야 되기도 하고.]
그때 신이 한번 더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현설때도 내가 공략(?)성공을 한 뒤에 갑자기 신이 현설이한테 나타났었지.
그러곤 얼마뒤,
“…어딜 도망가 이 씹…”
아. 하인젤이 욕하는 건 처음본다.
“…크, 크흠... 방금 건 잊어 주십시오.”
[살… 살려줘ㅓㅓㅓㅓㅓㅓㅓㅓ]
하인젤의 욕설과 신의 살려달라는 문자가 동시에 왔다. 아니, 레이즈 쟤는 또 언제 저 광검을 뽑아낸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