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하인젤 (9)
* * *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눈으로 들어오는 회색빛의 벽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느낀 감각.
"으아아아아아악!!!"
온몸의 뼈와 살을 떨어뜨려 놓겠다는 듯 폭주하는 전신의 통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몸을 뒤척여보려 하지만 손발이 구속되어 있는지,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들리며 손발이 움직이다가 자꾸 걸린다.
여긴 어디일까, 그리고 또 나는 왜 여기서 묶여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건가.
"끼히히히... 오오, 이번엔 꽤 오래버티는 구나."
그리고 저 빌어 처먹게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가진 놈은 누구인가.
"그럼 조금 더 투여량을 늘려도 되겠군... 끼히히... 계획이 앞당겨지겠어..."
예? 뭐라고요 이 씨발련아?
하지만 입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목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곧 팔에서 따가우면서 차가운 감각이 느껴진다.
대체 어떤 씹새끼인지 보기위해 고개를 들어보려했지만, 머리도 고정되어 있는지, 이마에서 덜그럭거리는 느낌과 함께 곧이어 다시 한번 뼈와 살을 분리하겠다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끅... 끄으 으흐으윽...!"
그거 아는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 소리도 안나오고 오히려 소리지르려 할수록 숨이 잘 안쉬어진다는 것을?
지금 그걸 내가 느끼고 있었다. 너무 아프고 거지같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뭔가 목구멍을 턱 막고 있는 듯이 소리가 터져나오지가 않는다.
"으흐윽... 끄흐으윽..."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해지기는 커녕, 매분 매초가 색다르게 느껴지는 고통에 이젠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지만 이 항상 새로운 자극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시발... 영화같은 거 보면 막 기절같은거 하고 그러던데...'
하지만 나에겐 기절하고 싶다고 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번엔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 배안에 있는 장기 중 하나라도 터져나간 걸까?
"...이, 이 이단자 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오! 끼힉...! 너구나 이년! 니놈이 저 놈들읅..."
서걱.
서늘한, 금속이 휘둘러지는 소리와 함께 소리치던 괴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레이즈...! 레이즈, 이 분들이 우릴 구해주러 왔어! 레이즈! 정신차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타다닥 거리는 가벼운 발걸음과 살짝 얇은 갈라진 꼬마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인젤?"
내 목에서 터져나오지 않던 소리가 나왔다. 아, 내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게 아니었구나. 그냥 레이즈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던 거구나.
나는 그냥 관객일 뿐이었다. 내 움직임과 레이즈의 움직임이 일치했던 것은 우연이었을 뿐, 내가 이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으응...! 레이즈, 내가 왔어! 우리 이제 괜찮을거야... 내가 사람들을 데려왔어..."
시야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애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아직은 머리가 노란색이구나.'
뿌리부분에서 회색의 머리카락이 나고 있는 것을 보아, 곧 회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걸 알수 있었지만, 아직 그녀의 머리칼은 찬란한 금발이었다.
"하...인젤..."
그리고 하인젤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내가 그렇게 원하던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
.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딱히 환경이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하나, 달라진게 있었는데, 하인젤의 얼굴에서 아까 보지 못했던, 푸른 멍과 찢어진 상처가 몇 군데 있었다.
"...일어났어?"
하인젤이 살짝 물기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어, 방금."
레이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또한 가라앉고, 갈라져 있었다.
"...신은 무슨 얼어죽을. 그놈들도 똑같아. 알려주면 우릴 구해준다고 해놓고는. 그냥 가버렸어."
"맞았어...?"
짧지만, 빠르지 않게. 천천히 하인젤의 고개가 끄덕인다.
"...우리도 데려가 달라고 하니까 무시하더라. 신 잘 믿을 수 있다고, 청소도 잘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그냥 가버렸어. 내가 메달리니까... 흑... 더러운 이단의 힘이 묻은 손길로 만지지 말라고 하더라. 이단의 잔재를 살려두는 것을 구원으로 알라고."
"...아팠겠네. 하인젤, 배고프지 않아?"
...뭔가 이상했다. 하인젤이 말하는 그 교도의 말이 이상했다는게 아니라, 레이즈의 반응이 이상했다. 공감하듯이 말하지만, 그 후에 나오는 말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 사고였다.
"...응, 배고프네. 아, 근데 주방쪽으로는 가지마. 찾아봤는데 거기 '먹을건'없었어."
하인젤이 유독 한 단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레이즈는 들은건지 아닌건지, 주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보이는 광경에 나는 구토감을 참을수가 없었다.
'우욱...'
그곳엔 잘려진 사람의 팔다리가 천장에 메달려 있었고, 탁자위엔... 여러 부속물들이 널려 있었다. 척 보기에도 한두명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은 아무렇지 않은듯, 그 덩어리들을 파헤치거나 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뭐지, 분명 현설이가 말했을 때는 느끼는 감정같은 것도 전부 전달이 된다고 했는데. 잘못 동기화 된건가?'
내가 의아해 할때쯤, 익숙해질래야 익숙해 질 수 없는, 모순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모든 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능력에 오류는 없어.]
그 말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이 능력에 오류는 없다. 신 또한 현재 이 상황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능력 자체에 실수가 없었다면...
"아... 찾았다."
레이즈가 이윽고 덩어리들 사이에서 무언가 찾아내었다. 금색의 반짝이는 조그만 금속제 고리. 그리고 그 안쪽엔 '내 사랑, 에드윈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음... 뭔가 생채기가 나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빵 하나 사먹을수는 있겠지."
그리고 이 고리가 꽂혀있던 손가락을 뽑아내곤 다시 덩어리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감정도 전달받지 못했다.
[그래, 그럼 니가 보는 장면을 보여주는 카메라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소시오패스인가요?'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기준을 나누는 건 인간들이 즐겨하는 거라서. 뭐, 일단 계속 봐봐.]
"하인젤! 내가 뭔가를 찾았어! 이거 봐, 이걸로 빵이랑 바꿀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레이즈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하인젤에게 다가 예의 그 반지를 보여준다. 그 반지를 떨리는 손길로 받은 하인젤은 이내 눈물을 흘리며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욱... 에드윈 아저씨... 웁...!"
그 다음 보이는 것은 기억으로 추정되는 장면.
애들은...! 애들은 건들지 마라!
하하하... 꼬맹이들아 이거 봐라. 내가 너희 주려고 몰래 숨겨왔어...
옛날 옛적에...
에드윈이라고 추정되는 중년의 남성또한 아까 그 괴인에게 고문을 받았던 건지, 하인젤과 레이즈와 같은, 회색빛의 공간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그 중년은, 하인젤과 레이즈를 감싸고, 마나석이 갈려 있는 음식이 아닌 멀쩡한 음식을, 또 다른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올 때 그녀들이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아주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이걸로 빵 사먹을 수 있는 거 맞지?"
하지만, 레이즈는 이 물건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반지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레이즈에게서 이해했다는 생각이 흘려들어 왔으니까. 그보다, 그 에드윈이라는 사람이 그녀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려 이 반지를 사용하며 가르쳤으니, 적어도 이 반지에 적힌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이내 하인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레이즈를 바라본다. 그리고 레이즈 또한 그녀를 바라본다.
"...분명 그 놈이 이렇게 만든게 분명해... 레이즈, 레이즈 걱정마... 내가, 내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게."
하인젤의 눈동자에 비친 레이즈의 모습은, 세상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한 꼬맹이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부터 하인젤은 일부러 내향적인 모습 등을 연기하며 하인젤이 앞장서게 만들었고, 또한 글 등을 읽어주며 레이즈에게 사회적 관념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지, 레이즈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고, 좋아하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그 기준은 하인젤이긴 했지만...
그래도, 레이즈는 점점 나아져갔다. 그래, 적어도 겉모습만은 괜찮아지고 있었다.
'귀찮아... 그래도 하인젤이 좋아하니까...'
그렇게 때로는 밭의 작물을 훔치고, 때로는 식당에서 버리는 남은 음식을 몰래 훔쳐다 먹으며 버티길 몇일, 그녀들에게 노예상인이 찾아왔다.
"흐으음... 흐으으음... 어이! 잠깐 물좀 가져와봐!"
그리고 레이즈와 하인젤의 얼굴을 씻기더니 노예상인이 씨익 웃는다.
마치 길거리에 떨어진 보석을 발견 했다는 듯.
그는 레이즈와 하인젤을 단 한덩이의 빵으로 꾀어내었고,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된다는 걸 교육 받지 못한 그녀들은 그를 따라갔다.
철컥.
그리고, 족쇄가 차이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빵 한덩이를 와구와구 먹어대며 행복해 했을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때 레이즈는 처음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도 그게 행복이라 다행이었다.
그 다음은, 떡잎을 알아본 노예상인의 교육이 있었다. 그녀들은 귀중품 취급을 받으며 다른 노예와는 다른 취급을 받았으며, 이는 곧 노예들 사이에서도 질투로 다가왔다.
"쯧... 저 더러운 놈에게 그렇게 엉덩이나 살랑살랑대서 좋냐?"
이정도 비난은 가벼운 편이었고, 폭력과 성적 희롱 또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노예상또한 이를 보고 있었지만, 딱히 얼굴에 흠집을 내는 것도 아니었고, 어쩌면 이걸 이용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독려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 정도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고, 오히려 노예상의 교육이 더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선 그냥 한번 맞으면 되는 걸 굳이 귀찮게 예법같은 걸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하인젤은 노예상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열심히 배웠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린 이렇게 배울수 있으면 배워두는게 좋아. 그게 도둑질이던, 사람을 해치는 일이던."
레이즈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다고 밥을 더 주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저럴 수록 다른 노예들의 괴롭힘은 더 심해져만 가는데. 그래서 레이즈는 앞장서서 하인젤의 방패를 자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들 앞에 내가 찾아왔다.
[원래는 여기서 반년뒤에, 레이즈는 죽을 운명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데에 지친 노예상이 다른 귀족한테 팔아버리고, 거기서 놀아지다 죽지.]
그 뒤로는 내가 알던 그녀들과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레이즈에게 있어서 우리와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점점 어떠한 알수없는 간질거리는 감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감정에 혼란해 하길 며칠, 어느날 하인젤이 책 한권을 사용인들의 숙소로 가져왔다.
"멜, 멜! 이거 뭐야?"
그건 흔해 빠진, 유행을 따라 쓴 사랑 소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 생활을 겪어본적이 없었던 그녀들에게 있어 이건 굉장한 발견이었다.
"아, 엣헴...! 이건 말이야..."
그리고 멜은 그녀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즈는 이내 곧 한가지 문장에 눈이 박혔다.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가슴에 간질거리면서도 따듯한 온기를 불러오며...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간질거리면서 따듯해...?'
레이즈는 이걸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앗, 레이즈. 이건 사랑이라는 건데! 음... 그래! 예를 들어서 말하는 거지만, 만약 너가 도련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도련님을 생각했을때 얼굴이 붉어지거나, 가슴이 따듯해지는 거야."
"...? 그냥 요즘 따라 간질거리기만 하는 건?"
"응? 간질거려? 오오~ 혹시 너 사랑에 빠진거야?"
'설마...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너였냐 멜...'
"응? 그런거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에이~ 왜 그래~ 혼자 알면 재미 없다고? 요즘 또래 남자애 만나거나 한 적 있어?"
...없다. 그래, 나 말고는 없었다.
"꺄아악~ 설마 도련님? 어머 어머, 이거 완전 금단의 사랑이잖아!"
'그런가? 나 도련님을 사랑하는 건가?'
레이즈는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사랑은 아니었다. 우정이나 가족애라면 모를까 사랑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거야?"
"음... 그건... 그 남자가 평소 자주 웃어주는 사람이나 넋놓고 바라보는 사람을 잘 보고 따라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 후로 레이즈는 내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내 주변의 여성들의 행동을 조금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단지 그녀의 가슴에 남아있는 저 따끔거리는 감정이 뭔지 알기 위해.
...그리고 가장 많이 따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멜이었다. 진짜 멜 이걸 내가 그냥 콱...
하지만 그렇게 함에도 그녀의 가슴엔 간질거리는 느낌은 남아있어도 따듯해지거나 알렉의 모습이 생각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 있어보려 달라붙고, 칭찬을 갈구했다.
"응, 장하다 장해~"
그리고, 그러다가 내가 처음으로 하인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날, 레이즈는 하인젤의 붉어진 얼굴을 보게되었다.
"언니, 오늘 주인님이..."
"언니, 주인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주인님이 오늘 칭찬해주셨어..."
자꾸 도련님을 찾고 그럴때마다 하인젤의 볼이 붉어지는게 보였다. 그런데 정작 도련님의 앞에선 딱딱한 태도를 연기한다.
"하인젤, 너는 알렉을 좋아하는거야?"
레이즈의 질문에 하인젤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인젤의 그 표정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화아악...!
레이즈의 가슴 한켠을 뜨겁게 덥히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