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80 요새 누즐라 中
* * *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골드로츠는 키런 왕국의 영토에 들어서자마자 왕성과 통신했다. 바틸카스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 간단한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하사받은 검 『심연』을 분실했다. 실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 검을 가져간 이모탈과 동료가 로이첸 왕국을 넘어 키런 왕국에 들어선 것까지 얘기를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들은 바틸카스는 의문부터 들었다. 황금늑대 기사들과 함께였다. 그런데도 검을 빼앗겼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반응조차 못했다고 했다.
바틸카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왕성 점령 사건의 범인을 그 두 사람으로 잡았다. 그렇다면 왕성에서 걸어 나왔다는 건 그들이 로이첸 왕국과 협력하거나 그들을 점령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바틸카스는 로이첸 왕국과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키런 왕국으로 넘어온 불순한 강탈자도 쫓아야 했다.
“실패하였다면 그걸 만회해라. 어쩔 수 없다는 얘기로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허면 황금늑대 30을 더 지원해주마. 또한 병사들을 파견해두고 각 영지의 귀족들에게 협력을 지시하지.”
“감사합니다.”
통신은 끊어졌다. 바틸카스는 골드로츠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곧장 로이첸 왕국에 연락을 넣었다.
치직
음성이 연결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신지요.”
“이 목소리는…… 에이어 공작이군.”
“그렇습니다. 현재 여왕 폐하께서 급한 용무가 있어서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여왕님의 대리로 있으니 제게 용건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바틸카스는 그 말에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로이첸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네만?”
“안 좋은 일이요? 그럴 리가요. 키런의 기사들이 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으나 로이첸 왕국에 안 좋은 일은 없습니다. 경사가 났다면 모를까요.”
“경사라?”
이상한 일이었다. 로이첸에 심어둔 스파이가 결코 거짓을 보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로이첸 왕국이 계략을 짜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갑자기 왕국군을 동원하고 영지군까지 불러들이면서까지 연극을 할 이유는 없었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성공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키런 왕국에 빚을 지우고 싶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단순한 허세라고 보기에는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설픈 추측을 해서는 안 됐다.
“혹여 위험한 일이 있을 거 같아 황금늑대의 기사들을 보냈었지. 그런데 경사가 났다니…… 이거 축하하지 않을 수 없겠군. 허면 영지군과 왕국군을 대동한 것도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약간의 오해가 생겨 벌어진 해프닝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 오해가 풀렸으니 왕국의 경사가 생겼습니다. 축하해주시니 여왕 폐하께서도 기뻐하시겠군요. 용무가 끝나시는 대로 폐하의 말씀 전달하겠습니다.”
캐내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둘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렸다. 한쪽은 왕이고 다른 한쪽은 최고위 귀족. 상하 관계는 확실했지만 명분은 로이첸 왕국에게 있었다. 아직 로이첸 왕국은 위험하다 공표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멋대로 기사를 파견한 건 키런 왕국이었다.
바틸카스는 일단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렇군. 연락이 닿는대로 말해주면 좋겠군. 이웃 나라에 좋은 일이 생겼다는데 말만으로 축하하지 않고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나.”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통신은 끝났다. 바틸카스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영상 통신을 걸었어야 했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가 생명. 로이첸 왕국에 있었던 일과 정황만 대강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이제 남은 건 왕국에 들어선 침입자를 쫓는 일이었다.
“넨피스 후작.”
“네. 현재 샬론 백작이 보내온 정보와 근방의 소문을 조합했을 때 그들은 판테스 왕국의 국경으로 향하는 듯 했습니다.”
“판테스 왕국으로? 어찌 하여?”
“그들 중 한 명이 블랙 남작의 종기사를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바틸카스는 팔걸이를 토독토독 두드렸다.
어째서?
블랙 남작이라면 샬론 백작처럼 이모탈 귀족이라고 했다. 거의 최초의 귀족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그 행보가 조용했다. 듣자하니 이름도 없는 귀족의 밑으로 갔다고 했는데…… 바틸카스가 보기에는 무슨 수작이 있는 것 같았다.
“가만, 판테스 왕국의 국경이라 하였나?”
“예.”
바틸카스의 질문에 넨피스 후작은 곧장 그의 심리를 파악하고 말을 이었다.
“그 방향 그대로 간다면 누즐라 요새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가?”
누즐라 요새는 거의 기념비적인 공간이었다. 드러커스의 미로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케르베로스가 나타났을 때 전면에서 막아낸 곳이기도 했고 악몽의 기사 라이돈이 거쳐간 장소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온갖 시련을 겪어낸 장소였다.
“운명인가.”
키런 왕국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 요새를 거쳤다. 지금 일어난 해프닝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판테스 왕국이 숨겨둔 힘을 마주할지도 몰랐다. 골드로츠의 말에 따르면 가진 바 힘도 굉장하다 했으니 그를 붙잡으면 현 정세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다.
“누즐라 근황을 말하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군 3천을 상시 훈련 및 주둔 중이며 예비 병력 1천 역시 대기 중입니다.”
“그 중 기마병은 얼마나 되지?”
“3천 중 200입니다.”
“훈련 상태는 어떤가.”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다시 케르베로스가 나타난다 해도 하루 이상은 버틸 수 있습니다.”
“좋군.”
바틸카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의 전력은?”
“곳곳에 초소와 봉화가 있습니다. 물론 요새의 병력을 제외하고 각 부대가 주둔 중입니다.”
“좋아. 그래도 부족해.”
바틸카스는 느릿하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사냥하라.”
단촐한 한 마디. 그 말 뜻을 이해한 후작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냥이라는 명령. 전쟁에 맞먹는 군의 화력 동원을 칭하는 은어였다. 케르베로스와 라이돈의 사태로 만들어진 긴급 체계.
단 하나의 강자를 잡기 위한 수단.
후작은 품 속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사냥개 출동.”
*
루하다는 좌표 하나를 두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골드로츠와 기사들의 추격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쫓아오고 있었다.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리서, 오로지 흔적을 따라오고 있었다.
루하다는 대강 거리를 가늠하며 품 속의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버트가 쓰러진지 거의 하루 정도 되었다. 그런데도 버트는 깨어나지 않았다. 종종 오랜 시간 잠을 자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릇이시여.”
루하다는 나직하게 버트를 불렀다. 지금처럼 마신의 일부를 흡수하고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바로 마신의 씨앗을 심었던 그 날! 그때도 버트는 지금처럼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트는 그저 그 상황이 너무 무섭고 놀라서 접속하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루하다는 그 사실을 몰랐다.
루하다는 자신이 산산조각 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릇이시여.”
검은 동굴. 그곳에서의 루하다는 나약했다. 힘의 대부분을 잃고 육체도 갈가리 찢겨져 제 힘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버트를 지키는 것도 벅찼다. 수많은 자신이 버트의 몸이 죽지 않게 약초를 빻아 발라주고 먹여주었다. 때로는 그들이 있는 곳을 침범한 침입자를 물리치고 그 고기를 씹어 넘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자신을 잃었다. 수는 많았지만 몬스터로 변이하기 시작한 짐승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끝없이 자신을 희생을 하고 나서야 버트의 귀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버트의 몸은 진즉 죽었을 것이다.
그때와 같았다.
장소와 상황만 달라졌을 뿐 그때처럼 버트를 지켜줘야 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루하다의 목소리는 애틋했다. 그는 모든 힘을 버트를 지키는 데 쏟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그때처럼…… 자신만 남아 버트를 돌보던 그때처럼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키자고 다짐했다.
우선 그녀의 굳어진 몸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 후 끼니를 채워야 했다.
루하다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냥감을 물색했다. 이동도 이동이지만 버트의 몸을 보전하고 수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키런 왕국에서 사냥개를 풀었단 사실도 모르고……
*
“그걸 이제야 보고한다고?”
“죄송합니다.”
니스는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말을 전한 정보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인사이동으로 업무가 많았으니 그 점은 넘어가지. 그래서 로이첸 왕국에서 소식이 아예 끊어졌단 거야?”
“예. 키런 왕국의 기사들이 뒤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기사들이? 이유는 아직 모를 테고…… 키런 왕국 지부에서는 뭐라고 해?”
“거기서도 명확한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바틸카스가 로이첸 왕국에 빚을 지우기 위해 습격 소식을 전해 듣고 기사를 파견했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했습니다.”
정보원의 말에 니스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림자를 쫓는 별이 아무리 바빴다고는 하나 정신없는 일이 많았다. 특히 버트와 관련된 일은 골치가 아팠다. 아드레이 왕국에서부터 시작해서 로이첸 왕국, 키런 왕국으로 이어지는 타임라인은 도무지 정돈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휴트가 파견을 나가 수습을 했으니 일이 커지지 않았던 거지만 이제는 그 선을 넘었다.
그런 와중에 버트가 접속을 못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신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강제로 로그아웃되었고 로그인조차 안 된다고 말했다. 혹시 기기 문제가 아닐까 싶었지만 이 게임이 워낙 해괴하니 규정짓기 어려웠다.
“좋아, 그 부분은 어떻게든 확인해. 그래야 그들이 쫓는 이유를 알고 대처할 수 있으니까.”
“네.”
“쫓기는 녀석들 위치는 파악 중이지?”
“네. 키런 왕국의 병력 이동을 토대로 위치를 추정 중에 있습니다. 2시간 내로 확정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음.”
니스는 머리를 굴렸다. 라이가 버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신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들은 이상 지금이 적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부위가 둘에서 셋 정도. 지금 그걸 가져와 합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어쩌면 그 전에 버트가 깨어날지도 몰랐다.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버트가 접속한 상태에서 마신이 깨어날 수 있었다.
“……접게 해야 하나.”
“네?”
“아냐, 아무것도. 정보 교란은 잘 하고 있어?”
“그것이 키런 왕국 쪽은 워낙 명령체계가 엄격한지라……”
“이래서 칼잡이들은……!”
효율보다 이성을,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한다는 괴팍한 사고방식. 덕분에 정보 교란을 하기 좋았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정보 교란이 어려운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였다. 거짓 정보를 주고 소문을 퍼뜨렸을 때 의심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간혹 의아해할 때가 있었지만 대부분 그 명령을 따랐다. 그래서 뒤에서 조종하기는 쉽지만 본격적인 혼란을 주기 어려웠다. 너무 직선적인 패턴이 역으로 걸림돌이 되었다.
“안 되겠어. 가봐야겠다.”
“직접 나서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키런 왕국으로 가는 게 아니야. 도움을 청해야지.”
“도움이라면……?”
“남쪽으로 가야겠어.”
정보원은 그제야 니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키런 왕국의 소식은 꾸준히 전달하겠습ㄴ”
“특보입니다!”
그때 다른 정보원이 나타났다. 그는 다급하게 품 속에서 작은 쪽지를 건넸다. 그걸 받은 니스는 표정을 굳혔다.
“이게 정말이야? 누즐라로 가고 있다고?”
“네. 방금 확인했습니다.”
“왜 하필…… 콴타르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네.”
“이런 씨발”
니스의 입에서 욕이 걸걸하게 터졌다. 오픈베타 유저인 그녀가 누즐라 요새에 대해서 모를 수 없었다. 그곳은 언제나 경비가 삼엄했다. 곳곳에 세워진 초소에 병력도 잘 배치되어 있었다. 실상 그곳은 요새라 불리기도 민망했다.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곳곳에 흐르는 강이 깊지도 않았다. 로아흐 평원을 위시한 넓은 땅이 전부였다. 거기에 오도카니 세워진 요새는 누구라도 지나갈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라는 이름을 달고 웬만한 침입을 수비해냈던 이유는 곳곳에 세워진 초소와 병력에 있었다. 여기에 봉화와 마법 통신을 통한 치밀한 연계도 한 몫 했다.
수비를 하기에는 최악의 지형. 하지만 그걸 아우르는 지휘체계와 통신! 거의 현대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속도였다. 이들의 지휘 방식은 3대 정보 조직에서도 눈여겨 볼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누즐라 요새의 별명이 있었으니……
“어쩌자고 말벌집으로 가는 건데!”
말벌집. 잘못 건드렸다가는 검을 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곳은 참호가 아니라 구덩이를 파서 진지를 만든 곳도 있었다. 땅벌집이라는 은어에 걸맞게 그곳에서조차 병사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바로 남쪽으로 가야겠어!”
“잠시만요!”
“왜!”
정보원은 니스를 말렸다. 한시라도 급한 상황. 이렇게 되면 마신의 부활이고 뭐고 큰일날 수 있었다. 루하다라는 존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시련을 몇 번이고 겪은 누즐라 요새를 돌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다못해 버트가 멀쩡하다면 모를까 로그인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그건 위험한 짓거리였다.
그래서 마음이 급한 와중에 정보원이 붙드니 니스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지원을 청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지원을 하러 가잖아!”
“가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정보만 흘리면 알아서 갈 겁니다!”
“누가! 그리고 왜?!”
“한 명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일이라면 흠뻑 빠져 있는 사람!”
그 순간 니스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강하다. 그리고 버트를 위해서 몸까지 다 바칠 사람!
“안 돼.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어. 그에 비해 블랙 남작의 다크나이트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어.”
“그도 알고 있을 겁니다.”
“……밑져야 본전이란 거야?”
“무엇보다 지금은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됩니다. 미래의 눈과 소통을 할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나서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정보원의 만류에 니스가 심호흡했다.
“좋아. 거기 너.”
“네!”
새로 찾아온 정보원이 거수경례했다. 그 사이 니스는 대충 휘갈긴 쪽지를 그에게 넘겼다.
“이걸 전달해.”
“네! 누구에게 가면 될까요?”
“길렌 백작.”
*
“오늘도 아름답구나.”
길렌 백작. 그는 한 때 왕당파와 귀족파의 조커로 자리매김한 중립파 귀족이었다. 하지만 드러커스의 미로 사태 이후 그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귀족파의 몰락이었다.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벨리오 공작. 그는 대부분의 귀족파 귀족과 함께 노스페라투 기사들에게 죽었다. 대부분이 죽은 그때 왕당파 귀족이 아닌 귀족파 중 한 명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자 남은 민심마저 뮬러에게 돌아왔다.
덕분에 중립파와 소수의 귀족파를 제외한다면 왕당파가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권이 강해진 이상 중립파는 왕당파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길렌 백작처럼 이도저도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면 선택을 해야 했다.
덕분에 길렌 백작에 대한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그는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세운 공으로 공작위를 받아야 했으나 그걸 전부 거절했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금과 영지를 할애받았다. 그래서 공작위에 견줄 힘을 얻었지만 그는 여전히 백작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 강대한 기사 길렌 백작은 지금…… 자신의 방을 버트의 초상화로 꾸미고 있었다. 간간이 블랙 남작의 영지에서 공수해온 특이한 조각상이나 굿즈도 모아두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탁상 위에 놓을 수 있는 작은 피규어였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 검을 높이 들어올리며 포효하는 모습, 밝게 웃는 모습, 다양한 피규어가 탁상을 채워놓았다. 그의 일과 중 하나는 이 피규어들을 먼지 한 톨 없이 닦고 벽에 걸어둔 버트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던 길렌 백작에게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백작님.”
푸른비늘 기사단장 네르딜. 그는 한 때 길렌 백작의 연인이었으나 버트에게 밀려난 지금은 가신이 되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 나라에서 동성애가 그렇게 환영받는 것도 아니거니와 언제까지 그 관계가 계속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길렌 백작은 종종 그를 챙겨주었다. 네르딜이 아무리 거리를 둔다고 해도 정신적, 육체적 관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네르딜. 혹여 그 망측한 사진집이 다시 나오기라도 했더냐?”
“아, 그건 아닙니다. 그저 별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헌데…… 급한 것 같습니다.”
“급한 거?”
길렌 백작은 네르딜이 건넨 쪽지를 받았다.
“그렇군.”
길렌 백작은 쪽지를 구겼다.
“출정 준비를…… 아니, 그냥 별과 접선할 자리를 마련해라.”
“예.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왕국 국경지대.”
백작은 옷을 대강 입고 장식으로 걸어둔 검을 들었다. 그러다 뭔가 고민하더니 다른 검을 집어 들었다.
“어찌하여 그 검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기사를 만나러 가는데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지.”
네르딜은 집어든 검집에 알알이 박힌 버트의 캐리커쳐를 보며 많은 생각을 삼켰다.
“부디 조심하시길.”
“그래. 무슨 일이 있다면 정기 발매되는 사진집을 구해 놓도록. 돌아와서 전부 감상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길렌 백작이 출정하게 되고…… 이 비슷한 상황은 블랙 남작의 영지에서도 일어났다.
*
페이니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건……”
그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너무 얕아서 확신할 수 없었다. 흡사 희미한 열기가 피부를 스친 듯한 애매한 감각이었다.
“왜 그러지?”
엘도트는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페이니는 펜대로 탁상을 탁탁 두드리며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엘도트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페이니는 방금 느낀 기운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전달해준 정보 알고 있어?”
“어느 정도는.”
“버트와 루하다의 최근 위치는 어디까지였어?”
“키런 왕국으로 향하던 중에 사라지셨다고 한다. 그 후 행방을 찾다가 로이첸 왕국에서 마지막 소식을 접했다고 들었다.”
“비슷하네.”
페이니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다 인상을 찌푸리며 턱짓했다.
“나와.”
그녀의 말에 창 밑의 그림자에서 몽마 한 명이 솟아났다.
“어때?”
“그릇께서 마신의 일부를 흡수하신 뒤 기절하셨습니다. 그 후 벨루그하가 그릇을 데리고 키런 왕국을 횡단하고 있습니다.”
“골치 아프네.”
페이니는 펜대로 머리를 긁었다. 엘도트는 몽마의 보고에 페이니를 보며 물었다.
“위험한 거 아닌가?”
“위험하지. 버트가 의식을 잃은 게 그들끼리 말하는 ‘로그아웃’이 아니라면 위험한 거야.”
“……그럼 도우러 가지 않는 건가?”
“가야지.”
엘도트는 몽마를 보았다. 페이니는 그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그림자를 통한 이동은 루하다도 할 수 있어. 저 녀석은 그냥 흉내내는 수준이고. 뭐가 됐든 평면에서의 이동은 그만한 육체 적응 능력이 있어야 해. 애초부터 그림자였던 둠워퍼 족이나 구체적 형태가 없는 나이트피어가 아니면 못 써.”
“그렇군.”
“몽마를 통한 지원을 하려 해도 백신들의 견제가 있어. 그들이 언제까지고 방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몽마를 함부로 써서 자극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어쩔 셈이지?”
“갈 준비 해.”
“위치는?”
“저 녀석이 안내해줄 거야.”
“그래.”
엘도트는 무심하게 돌아섰다.
“너 말고 다른 녀석을 보낼 수는 없지?”
“그래. 하지만 걱정 마라.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그래줘.”
엘도트는 잠시 페이니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돌아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페이니는 엘도트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몽마가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물론.”
“리어페어리들에게 도움을 청할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다크나이트들이 나서는 것만으로도 국제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지금 저기서 루하다가 잡히는 순간 끝장이야. 입국 신청 기록은 말소했지?”
“네. 판테스 왕국에서 키런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 중 습격을 받고 소실된 상단과 섞어서 조작했습니다.”
“그래. 이제 너도 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몽마는 물러났다. 그렇게 페이니가 집무실에서 일처리를 마무리 짓는 동안 엘도트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제 로디아 마을도 제법 발전하게 되었다. 당장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영주성도 그렇고 기사들 수 십 명이 훈련할 수 있는 넓은 훈련 시설도 있었다. 점점 부유해지는 마을처럼 엘도트를 비롯한 다크나이트들도 강대해졌다. 그렇게 모집한 인원들 전부 마성자 출신이거나 숨은 실력자들이었다. 하나하나가 과거 엘도트나 다른 기사들을 가뿐히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현 다크나이트를 통솔하는 건 엘도트였다. 그를 보좌하는 건 2명의 부단장 이디아와 브론트였다. 그 중 실질적으로 2인자에 가까운 건 이디아였다. 브론트가 머리 쓰고 나서기를 싫어하는 것도 있었지만 유달리 실력이 늘고 있었다.
“출정 준비를 해라.”
“네? 아직 실전 훈련도 제대로 못했는데요. 어디랑 싸우는 건가요?”
“싸움이 아니다. 아니, 싸울 수도 있겠군. 우리는 키런 왕국으로 간다.”
“……오.”
키런 왕국. 기사들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았고, 한 번 쯤은 동경해보았을 기사의 나라!
“무슨 일 있었나요? 전쟁이 터진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주군을 구하러 간다.”
“주군……? 버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기어코 키런 왕국에서 일을 벌였나 보군요.”
“그런 게 아니다. 준비부터 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언행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이디아는 다른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엘도트도 이디아에게 말을 전달해두고 그 길로 브론트를 찾아갔다.
“오셨습니까.”
“나 대신 페이니를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디아와 산하 다크나이트를 데리고 키런 왕국으로 떠난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군.”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브론트는 가슴을 퉁퉁 두드리며 말했다. 엘도트는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자신의 수하가 된 기사들…… 다크나이트들이 있는 자리였다.
“들어라.”
그들은 훈련 중이었다. 그러다 엘도트의 나직한 한 마디에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출정이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여 집결하도록.”
간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잽싸게, 하지만 큰 소리 없이 준비를 끝냈다. 몇 달 동안의 훈련으로 보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건 이디아 산하의 다크나이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출정 명령이 내려진지 15분도 안 되어서 나갈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길렌 백작과 비슷한 시기에 키런 왕국으로 출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