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79 요새 누즐라 上
* * *
스터그는 버트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섣불리 버트를 딸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그리운 감정을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네.”
“하지만…… 그렇게 여기마.”
한순간 스터그의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버트는 그의 대답에 빙긋 웃었다.
“좋아요.”
버트는 스터그의 두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건 버트와 흐릿하게 겹쳐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검은 생머리의 여인…… 버트가 리아라고 부르는 그녀가 스터그를 보고 있었다. 스터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아가 입을 뻐끔대는 걸 보았다.
‘신경…… 쓰지…… 마……?’
그 순간 스터그는 마음 속에 불이 피어올랐다.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 리아의 한 마디로 안도감과 해방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를 묻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리아가 사라져버렸다.
“아.”
“아,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난…… 그래, 괜찮다.”
스터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
“이동하마.”
“네.”
두 사람은 그대로 신전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타난 곳은 무려 로이첸 왕성이었다. 처음 스터그가 나타났던 그곳이었다. 왕좌에서부터 주변 청소를 하고 있던 하인들은 화들짝 놀랐다.
스터그는 그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버트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좌표 이동은 능숙하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차피 여기 나라라는 곳에 있으니 딱히 갈 곳은 없구나. 다른 곳으로 가든 다시 돌아가든 차차 생각해봐야겠지.”
“아하”
버트는 스터그의 말에 한 가지 떠오른 게 있었다. 케틀라이아가 자신에게 집착했던 이유. 그걸 떠올려 보니 스터그의 역할과 겹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재밌는 제안을 해볼 생각이었다.
“꼼짝 마라……!”
“대체 왕성에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이 타이밍에 병사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원래대로라면 기사들이 모여야 했지만 여왕이 테러를 당하고 휴식 중에 있었고 에이어 공작이 정리 중이었다. 그래서 지금 달려온 병사들도 공작의 영지군들이었다. 그들 중 버트를 보고 곧장 반응하는 이는 없었다. 오직 기사들과 케틀라이아, 우탄 후작, 에이어 공작뿐이었다. 그나마 몇 명이 버트가 현상수배가 걸렸던 얼굴이란 걸 알았지만 수배가 걷어진 지금 큰 의미가 없었다.
병사들의 경계 때문일까. 스터그가 살기를 넘실대며 노려보았다. 작정하고 흩뿌린 드래곤의 기세를 누가 버틸까. 병사들은 다리를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아빠.”
버트가 스터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살기가 씻은 듯이 걷혀졌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걱정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이제 더 이상 저를 쫓지도 않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구나.”
버트는 주춤대는 영지군들을 훑어보다 스터그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그마한 속삭임을 듣던 스터그는 고민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터그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 하니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그를 향해 달려갔다. 몇 명은 버트를 경계해야하나 싶어서 주춤거렸다. 아무래도 공사를 위해 최소한의 병력만 배정받다보니 당장 지휘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당장은 알현실을 벗어나려는 스터그를 쫓는 게 최선이었다.
[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 겁니까? ]
루하다는 그림자 안에 있어서 버트가 스터그에게 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스터그에게 로이첸 왕국을 수호해보는 건 어떠냐고 했다. 그녀가 강자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고 심정도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래서 빚도 지우고 스터그에게 할 일도 줄 겸 이런 제안을 해보았다.
스터그는 생각보다 선뜻 받아들였다. 비록 병사들의 오해를 한 몸에 받으며 이동했지만 덕분에 시선도 끌 수 있었다.
‘괜찮아.’
[ 걱정되시나 보군요. ]
‘아, 응…….’
버트 근처에 남은 병사는 몇 명 뿐. 다들 스터그를 막기 위해 우르르 몰려간 참이었다. 스터그의 진심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적어도 버트 자신을 딸로 여기는 듯 했다. 비록 스터그의 욕망에 맞추어 연기를 했다지만 버트도 그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춤거렸지만…… 가야 했다. 루하다나 판타지아에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시간을 벌었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었다.
“가자.”
“뭐…… 갑자기 무슨 소리냐!”
“움직이지 마라!”
병사들은 버트의 혼잣말에 무기를 들며 경계했다. 그래봐야 기사들조차 막지 못한 버트를 그들이 제지할 수는 없었다. 버트는 단숨에 병사들을 제쳤다. 왕성에 침투했을 때처럼 날렵하게 달려갔다. 그렇게 달리던 버트는 무언가를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보인 건 저 멀리 걷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스물 남짓한 기사.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서있는 남자!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은 검집에 눈이 갔다.
“저건……?”
[ 리아주크의 일부입니다. ]
루하다 역시 바로 알아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키런 왕국에 있어야 할 검을 가져온 걸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여행이 좀 더 짧아졌다는 것이었다.
버트는 잠시 망설였다. 못 본 척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상황이었다. 경계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버트는 그러지 않았다.
탓
버트는 곧장 몸을 날려 골드로츠에게 달려들었다. 골드로츠는 한순간 그녀의 등장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만큼 날렵한 등장이었다. 그나마 곁에 있던 황금늑대 기사들이 반응하여 검을 찔러갔다.
쉬익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버트의 목적은 기습이 아닌 검을 뺏는 것! 그랬기에 골드로츠의 지척까지만 다가가고 남은 거리는 몸에서 그림자를 뽑아내어 검을 가져갔다.
착
거리를 벌린 버트는 손에 들린 검을 확인했다.
『밤 그림자의 검』
그것이 단숨에 몸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세트 아이템에 대한 문구가 추가되었다. 밤 기사의 강림일 때 보았던 문장, 마신의 허물이 되었을 때 보았던 문장이 합쳐졌다.
태초에 리아주크가 내려앉아 이 세상을 만들었으니…… 어둠뿐인 세계에 빛이 나타나게 되고…… 새 생명이 탄생하여 빛과 어둠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세트 아이템은 ‘마신의 육신’이 되었다. 그걸 확인한 버트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딱히 바뀐 건 없었다. 이번에도 세트 옵션에 대한 설명이 주루룩 올라갔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상하다……”
“당신은……?”
황금늑대 기사들은 검을 뽑아든 채 버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골드로츠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골드로츠의 입에서 나온 건 공격 명령이 아닌 전혀 다른 말이었다.
“어……”
버트도 골드로츠를 보고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만 버트를 기억하고 있는 골드로츠와 달리 그녀의 반응은 흐릿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반응이었다.
“칼라 해변에서 봤던……”
“아, 과몰입 하시던 기사님?”
“음…… 그렇게 말하니 조금……”
기사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 주춤거렸다. 눈치 빠른 그들은 이모탈끼리의 대화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어째서 골드로츠의 검을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골드로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왜 자기 검을 가져갔는지 몰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검은 돌려주십시오. 왕께서 하사하신 검입니다.”
“아, 이게 저도 사정이 있어ㅅ”
버트는 말을 하다 말고 휘청였다. 한순간 그녀의 두 눈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어라……?”
버트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그림자에서 루하다가 나타나 받쳐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을 것이다.
루하다는 이해 못할 얼굴로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마신의 일부를 흡수하고 이렇게 정신을 잃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 분석해야 했지만 눈앞에는 방해물이 있었다.
골드로츠와 황금늑대 기사들. 그들은 두 사람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검을 뽑아든 그들이 차츰 거리를 좁혀왔다.
츠르릇
루하다는 그림자를 뽑아냈다. 그러나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버트와 달리 루하다는 어느 정도 생각이 깊었다. 그래서 이들을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무슨 일을 초래할지 알 수 없었다. 루하다 본인만의 안위가 걸렸다면 가차없이 죽였을 것이다.
문제는 버트였다. 이들을 죽이고 추가적인 공세가 올 수 있었다. 복색을 보니 로이첸 왕국 쪽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경계해야 했다. 특히 기사들 같은 경우 심지가 남다른 녀석들이 태반이었으니 집요하게 추격해올 것이다.
루하다의 선택은 두 가지. 그들을 전부 참살하거나…… 달아나는 것.
루하다는 후자를 택했다.
탓
루하다가 갑자기 뒤로 날아오르더니 벽을 타고 올랐다. 그 모습에 골드로츠가 소리쳤다.
“쫓으세요!!”
기사들은 그 말을 기다렸단 듯이 앞으로 내려달렸다. 루하다는 그 모습에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외성벽은 결코 낮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뛰어내린 즉시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기동을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루하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착지하자마자 달릴 수 있었다. 근데 그것이 황금늑대 기사에게도 해당되었다.
탓
타탓
그들은 중갑으로 무장한 것치고 상당히 가볍게 내려앉았다. 골드로츠 역시 그들을 따라 내려왔고 루하다를 뒤쫓았다.
“후우……!”
루하다는 버트를 두 팔로 안아 든 채 달렸다. 그림자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버트와 함께 갈 수 없었다. 이런 평면 이동 기술은 둠워퍼 일족만 할 수 있었다. 다른 생물을 끌어 들였다가는 2차원 세계에 갇히거나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몰랐다.
무엇보다 버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루하다의 마기까지 조금씩 빨아들이는 걸 보면 보통 상태가 아닌 듯 했다. 어쩌면 리아주크가 부활을 하기 위한 준비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하다는 당장 버트를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쫓기고 있었다.
‘떨쳐낸다.’
일단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 뒤를 쫓는 기사들을 죽이는 건 나중에 골라도 되는 선택지. 버트가 깨어난 뒤까지 생각한다면 도망을 치는 게 맞았다.
문제가 있다면 루하다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그들의 추격을 떨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루하다가 강하다고는 하나 도주 실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분명 한순간 속도는 빠를지 몰라도 버트를 보호하고 신경 쓰면서 가야 하니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설사 떨쳐낸다고 해도 그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뒤를 쫓고도 남았다.
타탓
골드로츠를 비롯한 기사들은 묵묵히 루하다를 쫓아갔다. 아무렇지 않게 황금늑대 기사들을 따돌리려는 체력…… 그리고 골드로츠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검을 채간 버트. 이것만으로도 로이첸 왕국에서 벌어진 일의 중심에 두 사람이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왜 검을 가져갔으며 도망만 치고 있는지였다. 상황을 보니 버트를 지키려는 듯 했지만 왕성에서 소란을 일으킬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란 뜻. 그들이 왕성에서 걸어나온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검을 돌려받아야 했다.
착 착
골드로츠가 수신호를 보냈다. 2번의 신호로 5명씩 나뉜 4개의 조가 분산되었다. A조와 B조가 옆으로 빠졌다. C조는 골드로츠를 따랐고 D조는 뒤로 빠졌다. 그들은 루하다가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닫고 빙 둘러 포위망을 만들 생각이었다.
루하다는 행인들을 피해 앞으로 달려 나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인원이 줄었다. 그걸 확인한 루하다는 앞을 가로막을 거라는 생각에 경로를 틀어 골목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자 골드로츠가 휘파람을 불었다.
삑 삐익 삑 삑 삑
루하다는 최대한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 올라가더니 건물 위쪽으로 뛰어다녔다.
삑 삐이이익
골드로츠와 황금늑대 기사들 역시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보이는 건 2개의 조 뿐이었다.
나머지는?
루하다가 그 생각을 하며 건물 하나를 뛰어넘은 그때…… 바로 아래에서부터 검이 솟구쳤다.
탓
루하다의 발끝이 도약한 기사의 검 끝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대로 발 끝에 힘을 주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장창
공격을 하려던 기사는 그대로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나자빠졌다. 루하다는 다음 건물에 착지하자마자 건물로 올라온 3명의 기사와 대치했다. 그 중 조장을 받은 실력자도 한 명 있었다.
“후우”
루하다는 한 팔로 버트를 끌어안았다. 전투는 불가피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하다는 바로 기사들의 정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간을 끌면 뒤쫓는 기사들이 올 것이다.
츠릇
루하다는 어느 정도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로이첸의 영지군들은 보지도 못 했던 엄청난 속도! 그러나 기사들은 달랐다. 그들 중 2명은 반응하여 막아냈다. 다른 한 명은 조금 늦긴 했지만 몸을 틀어 치명상을 피했다.
스각
루하다는 팔을 한 번 휘두르고 거둔 다음 두 번의 공격을 더 이어나갔다. 루하다의 그림자가 그만큼 유연하고 무게를 무시하는 속도를 발휘했기에 가능한 연속 공격이었다. 그러나 처음 한 번의 공격만 통했을 뿐 그 다음은 통하지 않았다.
차캉 카강!!
그들은 정확히 검을 들어 막았다. 그들 중 둘은 다음 공격을 갑옷으로 빗겨냈다.
노련한 방어 기술. 그러나 그림자에 담긴 힘이 대단했기에 균형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루하다는 그들이 휘청이는 틈을 타 추가 공격을 더했다. 동시에 그들의 벌어진 사이를 노리고 몸을 날렸다.
“큿”
기사들은 균형을 잃었다. 루하다가 뚫고 지나가는 여파까지 더해지니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루하다는 그와중에도 가벼운 공격을 더했다. 그림자를 바늘처럼 쏘아 목이나 눈을 노렸다. 견제에 가까운 공격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위협적이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틀거나 검을 들어 바늘의 경로를 빗껴 나가게 했다.
그렇게 루하다는 그대로 건물을 타고 도시 밖까지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루하다가 조금이라도 견제에 힘을 썼거나 전투에 집중했다면 포위됐을 것이다. 죽거나 다칠 일은 없겠지만 시간이 지체되었을지도 몰랐다.
탓
루하다는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무작정 서쪽으로 향했다. 루하다는 대강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지명이나 국가의 위치까지 꿰찬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좌표를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가 동쪽 끝인 건 알고 있었다.
“후우…… 후……”
루하다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지켜드리겠습니다. 반드시.”
*
버트…… 아니, 은송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
분명 은송은 『밤』 세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세트 아이템이 합쳐진 것까지 기억났다. 그 후가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로그아웃이 되나 싶더니 다시 접속할 수 없었다. 지금도 4번째 로그인 시도를 실패하면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은송은 몇 번이고 접속해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연락을 넣어야 했다.
“로그아웃 했을라나……?”
은송은 스마트폰을 들어 두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세영은 일을 하는 중인지 대답이 없었다. 예상 외로 동혁에게서 빠른 대답이 왔다.
[ ㅇ? ]
은송은 곧장 동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로그인이 안된다는 메시지를 보내니 동혁이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고 답장했다.
“음……”
고민은 짧았다. 지금 당장 접속도 할 수 없었고 듀크 사에 문의를 넣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은송은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
동혁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학기 중에서도 자주 못 봤고 방학 중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얼굴이나 볼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다. 하려는 일도 휴식기였고 조사해야할 것도 있어서 로그아웃을 한 참이었다. 은송의 메시지는 정말 타이밍이 잘 맞았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동혁은 누군가 어깨를 툭 치자 피식 웃으며 돌아보았다.
“아니, 나온 지가 언젠ㄷ”
동혁은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거기에 서있는 건 은송과 닮은 여인이었다. 그건 정말 이질적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은송과 지금 눈앞의 여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머리 모양만 바꿔도 금방 알아차리고 눈에 쌍거풀만 생겨도 인상이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너…… 은송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미친”
동혁은 은송의 팔을 잡았다.
“대체 뭐야 너? 머리는 왜 붉어졌어? 키도 좀 컸어. 얼굴도 좀 바뀌었다고. 혹시 성형이라도 했어?”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니가 니 얼굴을 봐!”
동혁은 은송의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은송은 잠시 스마트폰을 바라보다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좀 달라진 게 보여? 너 지금까지 거울도 안 보고 살았어?”
“뭐가 달라졌어?”
“어?”
동혁은 은송의 질문에 역으로 당황했다. 그러다 콧김을 푹 뿜더니 옛날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봐.”
“어”
“그리고 다시 이걸 봐.”
동혁은 지금의 은송과 예전의 은송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그걸 보던 은송은 잠시 괴리감에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달라졌다. 누가 봐도 이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하물며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은 왜 몰랐던 걸까.
골격 자체가 변한 건 아니었다. 살이 좀 찌거나 빠질 수도 있었다. 머리는 염색을 하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가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지금 은송의 모습은 게임 속 실버트리와 엇비슷해져 있었다.
“어…… 어어……?”
“미치겠네. 세영이도 모르고 있어?”
“모, 몰라. 모르겠어. 왜 몰랐지? 이게 뭐야……?”
동혁은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일단 앉자. 진정하고 얘기부터 하자.”
동혁은 혼란스러워하는 은송을 데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은송은 음료를 주문하고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앉아있었다. 동혁은 자리로 돌아오다 그런 은송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보았다.
예쁘다. 분명 이전에 검은 머리였던 은송도 수수하지만 예쁜 편에 속했다. 비록 세영이라는 빛에 가려졌을 뿐 그녀도 나름 미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예뻐졌다. 얼굴 윤곽이 또렷하게 잡혀있었고 눈망울은 더 크고 선명해졌다. 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긴 단발…… 머릿결도 좋은 데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돌고 있었다. 그렇게 훑어보다 보니 몸에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펑퍼짐한 옷인 데도 볼륨감이 느껴졌다. 작정하고 노출을 하면 얼마나 대단할지 감이 안 오는 몸이었다.
그때 은송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음. 그래서 그걸 계속 몰랐단 거지?”
“응……”
동혁은 진동벨을 내려놓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은송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씨앗이 심어진 직후?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동혁이 알려줬을 것이다.
그럼 세트 아이템을 모으고 있을 때? 아니면 마신의 힘을 깨우쳤을 때? 그것도 아니면 리아가 나타났을 때……?
은송은 혼란스러워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테이블을 붙잡고 한숨쉬었다.
“역시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런 건지……”
“부모님은 아무 말도 없으셨고?”
“없었어. 평소라면 머리 염색했냐고 물었을 텐데……”
은송은 자기 머리카락을 당겨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보니 정말 이상했다. 염색을 한 적도 없는데 머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얼굴이나 몸도 조금씩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혁은 그런 은송을 보며 말했다.
“이건 확실히 이상해. 비정상적이야. 게임 좀 오래했다고 뭐라 해야할지…… ‘동기화’한다는 건 이상하잖아.”
“응……”
“그나마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건 마신의 씨앗 때문인데…… 세영이는 어땠어? 겉으로 큰 변화는 없었지?”
“어? 어…… 잘 모르겠어. 방금까지도 내가 이상하단 걸 몰랐으니까……”
“차라리 잘 됐어. 그냥 당분간 접속하지 마.”
“어……?”
“어차피 접속도 못한다며? 그냥 그대로 있어. 네 캐릭터에게서 무슨 이상 증세가 생긴 게 분명해. 그나마 세워볼 수 있는 가설은 마신이 깨어나서 버트의 몸을 차지하고 로그인이 불가해진 거지.”
은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깨어난 걸까.”
“어차피 부활시킬 생각 아니었어? 마신의 육신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루하다라는 친구가 부탁도 했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빨리 될 줄 몰랐어.”
“조금 더 즐긴 후에 부활시키려 한 거구나?”
은송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동혁은 잠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 말했다.
“지금은 그냥 쉬어. 요즘은 거의 판타지아만 했잖아. 며칠 정도는 현생을 살라고.”
“그래도…… 신경 쓰여.”
“왜?”
“그야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루하다가”
“게임이잖아.”
동혁이 은송의 팔을 잡았다. 은송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려다보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 과몰입하는 거 좋지 않아.”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설득력 하나도 없어.”
“난 적어도 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놀았지. 조금 씹덕질은 했을지언정 너처럼 빠져 살진 않았거든?”
“그러시겠지.”
“그러니 당분간은 접속하지 말고 있어. 시도도 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살다살다 너한테 잔소리 듣는 날이 올 줄 몰랐네.”
은송은 가볍게 한숨 쉬며 말했다. 방금까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아졌다. 동혁이 곁에 있어서 그런 걸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뭘 이 정도로. ……친구잖아.”
“그래, 고마워. 그래도 역시 걱정은 되네. 루하다나 다른 사람들도……”
“정 걱정되면 내가 세영이에게 말해둘게. 아니면 네가 말할래?”
“으음…… 네가 말해줘. 아무래도 게임 속에서 만나는 게 더 빠를 거 같네.”
“그래, 뭐. 먼저 만나는 쪽이 얘기 하는 걸로 하자.”
얘기가 마무리 되니 동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심해. 괜히 접속 시도하려다 잘못 되지 말고.”
“알았다니까~”
“그럼 나 먼저 간다.”
“엄청 바쁘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어”
동혁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게 있어.”
“알았어.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은송은 동혁을 떠나보내고 스마트폰을 보았다. 검은 화면에 비친 낯선 얼굴. 여전히 와닿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단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왜 이런 건지도 알아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