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81화 (81/104)

〈 81화 〉 81 ­ 요새 누즐라 下

* * *

며칠이 지났다.

은송은 간간이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있다가 스마트폰을 보았다. 간간이 유튜브를 보다가 접속기기를 보고…… 그러다 잠시 낮잠을 잤다. 다시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스마트폰…… 그러다 심심해서 컴퓨터를 키고 여러 사이트에 접속했다.

한가하다.

판타지아를 하지 않는 자신이 이렇게나 재미없고 지루할 줄 몰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게임만 하던 그녀에게서 게임을 빼버리니 여유 시간이 엄청 많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만날 여유는 없었다.

세영이는 알바로 바빴고 동혁은 판타지아 일 외에도 다른 일로 바쁜 것 같았다. 괜히 두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묘한 거리감. 그것 덕분에 세 사람은 정말 오랜 시간 알고 지낼 수 있었다.

“심심하네.”

은송은 슬쩍 모니터를 보았다.

동기화.

몇 번이고 검색해봤지만 결과물은 없었다. 스마트폰에서 종종 판타지아를 방송하는 유튜버를 봐도 크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게 금방 보였다면 은송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얘기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자신의 변화를 동혁 외에 몰랐다는 점이었다.

“음음……”

은송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러면서 동기화를 슥슥 써내려가더니 화살표를 그었다.

“……자주 보는 사이에게 각인 시킨다든지?”

이런 비슷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조금씩 인체의 특정 부위를 키워나가면 상대가 눈치를 채냐 못 채느냐에 대한 동영상이었다. 대머리인 사람의 머리가 1cm씩 커지더니 급기야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처음 변화를 곧장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소위 말해 둔감해진다. 처음에는 작은 부분이 바뀌고 그게 익숙해진다 싶으면 차츰차츰 한 군데씩 바뀌어나간다. 하지만 그게 아무리 시간을 길게 잡아도 지금처럼 큰 변화에 대해서는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물며 시간도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은송이 판타지아를 시작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판타지아 내에서는 그에 준하는 시간이 지났을지 몰라도 현실은 아니었다. 얼굴은 종종 보았지만 엄마도, 아빠도 은송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배려해준 거라면……?”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가정은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세영이는?”

어쩌면 은송이 놀라지 않게 하려고 모른 척 해준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동혁에게도 언질을 해두었을 테고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가 됐든 상대가 알면서 모른 척 했다는 가정은 들어맞지 않았다.

“……직접 물어봐야 하나.”

은송은 방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변화를 알아챈다면 그 원인을 물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몰래 기저귀를 차고 버렸던 사실까지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생리대로 할 걸 그랬나……?”

은송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헬멧을 보았다. 그러다 왠지 모르게 아랫배가 후끈거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물어보지 말고 넘어가기로 했다. 뭐가 됐든 지금 변화가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몸의 볼륨감이나 건강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던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브래지어도 잘 맞지 않게 됐고 바지는 발목이 다 드러났으며 엉덩이나 허벅지가 꽉 꼈다. 그저 살이 쪄서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자세히 보니 몸이 잘 단련되어 있었다.

“으음……”

거울에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도 굉장한 몸이었다. 버트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동성들은 제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만큼 예쁜 몸이었다. 얼굴도 역시 평소보다 나아졌다.

피부에 종종 일어나던 트러블도 가라앉았고 자잘한 솜털조차 없을 정도로 매끈했다. 이제 다리나 팔의 잔털을 밀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 후 다시 헬멧에 시선이 갔다.

조금 더 하게 되면 완전히 버트처럼 변하는 걸까?

이제는 그 원리나 과정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의문이 들게 되니 거기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정말 계속 접속을 못 하나란 걱정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판타지아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더 근질거렸다.

“아.”

은송은 뒤늦게 이 근질거림의 원인을 깨달았다. 어째선지 몸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은송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은송이 판타지아를 안 했을 때 이렇게 몸이 달궈진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판타지아에서 당했던 후 몸이 뜨거워진 적은 있어도 갑작스레 흥분한 적은 없었다.

금단현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발정이라도 난 건가? 그랬다면 왜 지금까지 이러지 않았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은송의 손이 무심결에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아!!”

은송은 옷 안에 손을 넣으려다 멈칫했다. 분명 자위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판타지아를 하기 전에는 아주 가끔 손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그저 성욕이나 다른 욕망이 적었을 뿐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기겁하며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은송 자신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다.

왜 그랬지?

다시 의식하며 손을 넣으려 하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은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기분이었다.

“……왜 이러지?”

은송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흥분했으면서 정작 그걸 해소하려 하니 망설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뺐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은송은 자기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조금씩 손을 내렸다.

간만에…… 해볼까.

*

3번의 연기.

적을 발견했으며 교전 중.

그걸 확인한 초소에서는 다른 초소에 수기를 보냈다. 멀리 보이는 초소를 향해 지원 요청을 보냈다. 초소에서는 수기를 받자마자 대기하던 병사들을 출병했다. 그들은 군말 없이 병장기를 챙겨 들고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소를 향해 달렸다.

평원. 연기를 향해 달리다 보면 초소보다 훨씬 먼저 보이는 게 있었다.

콰앙­!!

폭발 소리. 특정 초소마다 배치해둔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폭발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흙먼지가 뒤섞인 연기 속에서 인영 하나가 뒤로 뛰었다. 키런 왕국에 침입해온 불청객이었다. 왕명으로 내려진 건 단 하나.

침입자 저지. 상대의 생사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막아낼 뿐이다. 그것이 이 요새에서 내려진 전통이고 키런 왕국의 병사로서 해내야 할 임무였다. 상대가 정말 위험하고 강하지만 어느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나타난 케르베로스.

악몽의 기사.

이 두 가지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은 나가 떨어질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대륙에 내려진 시련이었다. 한 번만으로도 나라가 흔들리는데 그게 2번이나 거쳐간 것이다. 이것 외에도 자잘한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도 요새의 자부심은 높아졌다.

“막아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이 일개 변방의 병사였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의 나라 키런의 병사였다. 그것도 살아 숨쉬는 역사나 다름없는 누즐라 요새의 병사였다. 말단 병사라고 해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초소 경비의 임무도 능히 해냈다. 마음가짐부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그들은 동료가 날아가고 나뒹굴고 나부껴도 전진했다.

차캉!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에 아군이 없다 싶으면 대포 세례가 퍼부어졌고 틈이 있다면 화살이 날아갔다. 그들은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쓰러뜨려라!!”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전진했다. 그들은 침입자를 향해 고슴도치처럼 뻗은 창들을 내질렀다. 하지만 창은 순식간에 부러졌다. 검은 무언가가 휙휙 움직이나 싶더니 그대로 창을 잘라버린 것이다. 곧이어 바닥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병사 셋을 꿰뚫었다.

푸샥­

“크흣……!”

“카학­!!”

절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치고 말았다. 옆에서 동료가 기이한 방식으로 당했음에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진 창대를 내던지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덤볐다.

“다가오지 마라, 저급한 놈들.”

루하다가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다. 한순간 그의 몸에서 마기가 흘러나와 앞 열의 병사들을 기절시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버티지 못할 압도적인 기세였다. 하지만 이것도 마냥 쓸 수 없었다.

쐐액­

루하다가 몸을 비틀며 그림자로 벽을 쳤다. 검 3개가 동시에 한 곳을 찔러왔다.

카각­

분명 검의 진격은 막았지만 루하다의 몸도 흔들렸다. 방금 공격은 황금늑대 기사들이 벌인 일격이었다. 셋이서 동시에 한 점을 공격한다는 건 상급자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합격술은 일반 병사들도 해냈다. 다만 그들은 지금처럼 일격에 치는 게 아닌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연계형이었다.

뭐가 됐든 루하다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그들의 훈련 상태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만일 혼자서 그들을 죽이라 한다면 하루도 안 되어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족쇄가 많았다.

버트를 지켜야 한다. 그녀의 상태를 돌봐야 한다. 죽이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힘이 잘 나지 않았다. 언젠가 리버화이트가 겪었던 마기 결핍 현상. 그것이 루하다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본질적인 힘까지 뺏기지 않았지만 루하다 정도 되는 강자에게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버트와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루하다는 함께 하는 걸 택했다. 계속 마기가 빨리면서 이성을 잃은 건지 아니면 개인적인 욕심인지 몰라도 그는 이상한 선택을 고집하고 있었다.

“끼야아앗­!!”

기사 셋의 합공. 그 직후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다. 그림자가 잠시 흔들린 틈에 이어진 연계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차칵­

한순간 그림자 일부가 찢겼다. 그 틈을 노리고 다음 병사들이 창을 찔러왔다.

쩌걱­

창이 그림자를 뚫고 들어왔다. 비록 창날이 전부 들어오지 모샇고 도중에 막혔지만 제법 위험했다.

탓­

루하다는 그림자가 뚫린 걸 보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도 버트의 상태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버트의 몸에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처음 쓰러졌을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일일이 음식을 먹여주고 씻겨주었으니 당연했다.

“놓치지 마라!”

“D 섹터로 간다! 봉화를 올려!”

“봉화를 올려라!!”

루하다는 눈을 굴렸다. 그림자를 넓게 펼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멀리 설정해둔 좌표를 인식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방어에 전념하느라 주변 탐색을 할 수 없었다.

타탓­

루하다는 꿋꿋하게 나아갔다. 멀리 성이 보였기에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듯 싶었다. 느리긴하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상대 쪽에서 성을 피해갈 것을 염두에 두고 진형을 쳤을 것이다.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 그래서 루하다는 앞으로 나아갔다.

며칠에 이른 추격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힘겹지 않았다. 오히려 누즐라 요새 근방에 들어서며 겪은 몇 시간이 더욱 힘들었다.

“돌파한다.”

루하다의 두 눈에 귀기가 서렸다.

*

“미친 놈.”

주카 자작.

그는 성벽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새의 총 책임자인 그는 왕명을 전해 듣고 경악했다.

단신으로 성 근방을 돌파하려는 자가 있다!

조금 이상했지만 그는 각 초소에 연락해 방어책을 구축했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도 지원이 왔기에 돌파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든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그나마 살 확률이 있는 건 후방 뿐이었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았다. 심지어 거의 요새에 직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오고 있었다.

분명 다른 곳에 세워진 포위망은 촘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요새가 있었다. 하루 이틀 해서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포격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고 온갖 마법적 강화도 이룬 참이었다.

근데 그런 요새를 정면돌파 한다?

요새가 수많은 시련을 겪긴 했으나 완전히 막아낸 적은 없었다. 성 하나를 함락시킬만한 강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시해도 될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의 강자가 돌파하는 매뉴얼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을 택했다.

“포박대를 보내라.”

“예!”

금속추와 쇠줄을 건 기마병이 일제히 성문을 나섰다. 이 백 중 일 백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위해 훈련했다. 나머지는 출동 병력이었다.

다각 다각­

포박대는 저 멀리 병사들과 교전 중인 루하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넓게 퍼지며 저 멀리 쓰러진 병사들을 확인했다.

“준비!”

훙­ 훙­ 훙­

거리가 가까워지자 쇠줄이 던져졌다. 병사들과 기사를 쳐내며 나아가던 루하다는 그들이 던진 쇠줄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아주 효율적으로 그림자를 분산하고 돔 형태로 만들어 막았다. 구멍이 송송 난 그림자 돔 위로 쇠줄이 걸쳐졌다.

츠캉!

그때 무게추가 흔들거리나 싶더니 줄과 엉겨 붙었다. 그림자 돔 위로 쇠줄로 만들어진 돔이 겹쳐졌다.

“끌어!!”

포박대가 말에서 뛰어내려 줄을 당겼다. 그러자 엉켜버린 그림자가 당겨졌다. 쇠줄 자체의 무게도 가볍진 않았기에 루하다가 주춤거렸다. 그렇다고 무너지진 않았다.

꾸구국­

“당겨!!”

“빈틈으로 화살을 쏴라!!”

루하다는 그림자를 펼치려 했다. 그러나 무슨 마법적인 가공을 한 건지 쇠줄은 상당히 뻑뻑했다. 여기에 틈을 주지 않고 화살이 날아오는 바람에 돔을 탄탄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같잖은 수작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효과는 탁월했다.

빠져나가야 한다. 이차원에 숨겨둔 괴물들을 풀어놓을까? 하지만 그들은 절제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지만 병사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콰과곽­

루하다의 몸이 땅 속을 파고들었다. 그 후 한 포박대의 옆에서 솟아올랐다.

“어?”

그림자 돔은 남아 있었기에 포박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새 땅굴을 판 것인가?

“끼야앗!!”

포박대는 쇠줄을 놓고 막대기를 꺼냈다. 현대에서는 전기충격봉이나 다름없는 마법 무기였다. 그러나 루하다는 그걸 맨손으로 낚아채고 역으로 그의 얼굴에 처박아주었다.

빠자작­

“크학­!!”

루하다는 포박대 하나를 제치고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사태도 방비를 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화살비가 쏟아졌다.

촤자작­

루하다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달렸다. 화살 몇 대가 아슬하게 스쳤지만 루하다를 맞추지 못했다.

“잡아라!”

“4차 방어선까지 가!!”

루하다는 옆을 보았다. 저 멀리 지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니 조금 더 늦게 갔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힘이 다 빠져나갈 것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먼저 쓰러지는 건 루하다였다.

그 전에 전달해야 한다. 만일의 경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버트를 지킬 준비가 되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리아주크를 위해 싸웠던 그때.

루하다는 겹겹이 쌓여가는 전선을 노려보았다.

“카학­!!”

*

“생각보다 길어.”

주카 자작은 연달아 들리는 안 좋은 소식에 머리를 싸맸다. 이제는 초소에서 봉화가 아닌 봉화대의 불빛만이 피어올랐다.

해가 졌다.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루하다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원병까지 투입되었다. 그들은 루하다의 경로를 예측하여 포위망을 쌓았다.

전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들 하나하나는 루하다와 비교하면 약했다. 그들이 뭉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발목을 잡기엔 충분했다. 최대한 나아가는 걸 지체시킬 수 있었다. 점점 지치게 만들 수 있었다.

점점 약해지면서 제한까지 걸린 루하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촤라락­

그들은 집요하게 루하다를 괴롭혔다. 게다가 대응 역시 유연했다. 쇠줄을 이용한 방식이 통하지 않자 다른 방법들을 이용해 루하다의 전진을 막았다.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도구로, 때로는 구조물을 이용했다.

그때마다 루하다는 방어진을 돌파했다.

“카학!!”

“끄아아악!!”

콰자작­

콰창!!

빠각!

꽈르릉­

모든 건축물이 박살났다. 황금늑대 기사 다섯이 쓰러졌고 병사 수 백이 쓰러졌다.

“후우……”

루하다는 땀을 삐질 흘렸다.

첩첩산중. 병사들이 줄어들지 않았다. 한 번에 하나씩. 확실하게 쓰러뜨려도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서서히 어둠이 찾아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라.”

루하다는 그림자 돔으로 몸을 뒤덮었다. 병사들은 그 틈에 루하다를 포위했다. 그리고 창을 높이 들어 전투에 대비했다. 혹시라도 땅을 뚫고 나올 경우를 대비하여 이중 삼중으로 포위망을 만들었다.

“궁수들! 준비!”

시위에 일제히 화살이 걸렸다. 그들은 돔을 노리고 있으면서도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아직까지 저지하지 못한 괴물이었다. 이미 매뉴얼대로 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런 괴물과 마주하니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벽이 걷히는대로 쏴라!”

그들은 앞만이 아니라 뒤쪽까지 경계했다. 그렇게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두가 숨죽여 돔을 지켜보았다.

츠르륵­

돔이 걷혔다. 그리고 거기서 나타난 건…… 괴물들이었다.

“어, 어?!”

“쏴라!!”

“으아아악­!!”

돔 안에 있던 것치고는 너무 많은 괴물이 쏟아져나왔다. 하나 같이 기괴한 짐승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들 중 드러커스의 미로 전투에서 참전한 병사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몰골이었다.

“괴, 괴물!!”

“으아아악­!!”

그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겪은 지옥은 참담했다. 키런 왕국의 병사라는 자부심으로 군에 남았지만 그때 겪었던 괴물들은 이름 그대로 괴물들이었다.

여러 짐승이 뒤섞인 듯한 괴물들. 그것들은 화살에 맞아도 꿋꿋이 병사들을 밀고 들어갔다. 병사들 중 일부가 패닉에 빠지니 다른 병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다행히 끝까지 저항하려는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 어…… 지금 뭐하는……”

“아, 아……! 살려줘……! 아흥……!”

촉수 범벅의 늑대가 병사 하나를 발가벗겼다. 그러더니 그의 엉덩이에 촉수를 꽂아넣었다.

“저게 뭐하는……”

“아아악! 살려줘허엉……! 흐어아앙……!”

비명. 그 이후 들리는 건 신음이었다. 이 괴물들은 다름 아닌 케틀라이아를 능욕했던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덮쳤다. 그게 수컷이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컷이어도 관계 없다는 듯이 겁탈했다.

“히아아악­!!”

“그만! 아앗……! 그만해­!!”

이건 다른 의미로 지옥이었다. 동료들이 무참히 강간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아무리 검으로 베고 창으로 찔러도 소용없었다. 단단한 껍질로 튕겨내거나 무기를 녹여버렸다. 그런 다음에는 무기를 박살내거나 무력화 시킨 뒤 겁탈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병사 삼백 여 명이 겁탈 당했다. 그런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이백의 병사가 투입됐다.

루하다는 비척거리며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이런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키런 왕국의 황금늑대 기사. 그들은 일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남았지만 아직 황금늑대 마흔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골드로츠도 있었다.

타닷­

힘겹다.

루하다는 뒤를 집요하게 쫓아오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루하다를 쫓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루하다는 몇 번이고 고민했다. 이제는 죽이지 않고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붙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루하다는 고민했다.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버트를 지킬 방법. 이대로 홀연히 사라지게 할 방법이 있었다.

‘이대로 그릇을 품은 채 땅 속으로……’

이 방법의 단점이 있었다. 지킬 수는 있어도 그의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상관없다.’

루하다는 이대로 버트를 품고 땅 속으로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루하다를 스쳐 지나갔다.

그건 어두운 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새까만 빛. 루하다를 순식간에 지나친 그 존재는 골드로츠에게 덤벼들었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루하다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버트를 끌어안은 상태로 주저앉았다.

카강!!

“큿?!”

골드로츠는 무심코 검을 들어 막았다. 검에 전해진 충격…… 그 수준이 상당한 나머지 그는 무심코 스킬을 쓰고 말았다.

{황금 검기}

츠츳­

금빛 기운이 올라서더니 검을 휘감았다. 그리고 흉흉하게 생긴 장군도를 쳐냈다.

탓­

뒤로 밀려난 건 검은 중갑옷의 기사였다. 검은 호랑이 문양이 그려진 갑옷. 그걸 본 골드로츠는 뭔가 섬뜩함을 느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제법 짙은 살기였다. 루하다에게서조차 못 느낀 살기 때문에 무심코 반응했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뒤이어 그와 비슷한 복색의 기사들이 황금늑대를 일제히 저지했다.

“다크나이트.”

골드로츠를 공격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다크나이트의 단장, 엘도트 그라이버다.”

“……키런 왕국에서 샬론 백작위에 있는 골드로츠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왔다.”

엘도트의 나직한 말과 함께 그의 휘하 다크나이트 100여 명이 진을 쳤다. 하나 같이 흉흉한 기세를 풍겼다. 그 모습에 황금늑대 기사들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노스페라투 기사!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강자였던 괴물들! 그들과 같은 섬찟한 기운에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에게는 부여된 왕명이 있었다. 골드로츠는 그걸 깨닫고 나직하게 경고했다.

“아드레이 왕국의 선전포고라고 봐도 될 테지?”

“아니. 우리는 아드레이 왕국에서 온 게 아니다.”

“허면?”

엘도트는 고민했다. 그러나 그렇게 길지 않았다.

“블랙 남작님을 섬길 뿐이다.”

“블랙 남작? 그 자가 왜……”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뒤를 부탁하지, 이디아.”

골드로츠는 엘도트의 어깨 너머로 푸른빛을 보았다. 그는 루하다와 버트를 함께 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골드로츠는 엘도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황금늑대들이여. 눈앞의 침입자를 쳐내라.”

“예!”

황금늑대 기사들과 다크나이트가 격돌했다. 이디아가 이끄는 다크나이트들은 무사히 루하다와 버트를 인계받고 떠나갔다.

사상자 1342명. 사망자 0명.

루하다가 다크나이트에게 넘겨지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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