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43화 (43/104)

〈 43화 〉 43 ­ 드러커스의 미로 上

* * *

“미친……”

현재 판타지아는 갑작스럽게 부상한 붉은 미로에 대한 이슈로 타올랐다. 판타지아의 내부와 외부 가리지 않고 이 미로에 대한 이야기는 점유율 7할에 이르는 핫이슈!

유튜브나 트위치, 아프리카TV 같은 영상 플랫폼은 물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 등의 SNS에서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현재 드러커스의 미로로 추정되는 지형이 솟구치고 있는 가운데……”

“와, 이거 진짜 공략 불가 지역이 지상으로 올라왔단 거는 큰 의미가 있거든요?”

“이번 상황에 대해서 각국의 입장은……”

“각 나라에서 테러 행위가 일어났다는 정보가~”

“최강국 베톰 왕국에서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바­”

하나 같이 어그로를 끄는 제목과 내용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캐치하고 있었다.

“공대장 그 인간이 있었다고?”

세영은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녀 역시 원정군에 참전할까 생각했지만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권력 다툼이 한창이었기에 발을 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원정군 중계방송을 보고 있던 중 이번 일이 터진 것이다.

그녀가 주목한 곳은 판타지아의 공식 사이트! 대부분 다른 커뮤니티나 SNS으로 얘기를 나누었으니 이곳은 그저 민원을 제기하거나 게임을 구매하는 용도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정보망에 서투른 이들이 이곳 게시판을 이용하기도 했다.

세영은 이곳에서 이따금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월척이 될 만한 정보가 눈앞에 있었다.

전설의 랭커이자 공격수인 공대장에 대한 정보!

‘분명 그 아저씨들이랑 뜻이 안 맞아서 서쪽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공대장은 세영과 같은 베타테스터 중 하나였다. 그것도 오픈 베타 유저인 세영보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클로즈 베타 유저!

어쩌다 보니 그와도 인연이 닿았지만 다른 테스터들처럼 마음이 맞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왕이나 귀족에게 줄을 대려고 알랑방귀 뀌는 게 싫댔지? 근데 용기사가 되었던 거야?’

세영이 알기로는 공대장의 직업은 창기사였다. 그건 다른 이들의 입소문과 인터뷰를 토대로 확정된 믿을만한 정보였다.

그런데 용기사라니!

베타테스트 때도 전직 방법이 불투명했던 것을 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건방진 아저씨.’

세영은 입을 삐죽 내밀며 다른 정보에 집중했다. 공대장이 등장한 건 확실히 예상 외였다. 악몽의 성 공략에 실패한 꽐라소주나 샤만의 해저에 발도 못 붙이고 광탈한 바다코끼리처럼 그냥 포기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이번 원정에 참여하다니……!

‘문제는 이건데.’

세영이 보고 있는 건 흐릿한 붉은 머리의 검사였다. 멀리서 찍어서 화질이 나빴지만 세영은 그게 버트란 걸 한 눈에 알아보았다.

‘메일드로우 때도 그렇고 대체 뭘 하는 거람.’

세영은 피식 웃으며 지상으로 드러난 미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말도 안 되는 일만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 같이 규격 외의 것들이라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심지어 공략 불가 지역에 갇혔을지도 모르는데 걱정이 되기는커녕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설마 이번에도 보스를 덮치거나 그러진 않겠지?’

세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판타지아에 접속했다.

이제 암투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

“여긴 끝났습니다!”

푸른비늘 기사들은 다급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갑작스레 솟아난 붉은 벽에서는 화살이 뿜어지거나 손이 튀어나와 왕국군을 공격했다. 그런 와중에 검은 병사들과 함께 새로이 합류한 키메라와의 싸움은 고됐다.

더군다나 왠지 모르게 기운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병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버트와 길렌 백작이 있었다. 검은 병사들은 길렌 백작의 지휘 하에 차례차례 쓰러져갔고, 키메라는 버트가 맡아서 처리했다. 그렇게 마지막 검은 병사를 처리하고 나서야 그들은 쉴 수 있었다.

“젠장, 이것뿐인가.”

푸른비늘의 단장인 네르딜은 한탄하며 인원을 둘러보았다. 푸른비늘의 기사를 포함해도 몇 백이 되지 않는 수였다.

본래 군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

원정군은 검은 병사에게 희생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게다가 유일하게 볼 수 있던 하늘은 벽에서 자란 천장에 막혀버렸다. 이제 그들과는 소통도 어려웠다.

그들에게 남은 건 앞길과 뒷길 뿐! 게다가 가는 길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어떤 함정과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네르딜의 질문에 백작은 심사숙고했다. 이대로 원정을 강행하면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병력과도 단절되었고, 보급도 없다. 무엇보다 지금 그들의 사기는 거의 바닥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로에 집어삼켜질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의 체면이 구겨진다.

“……돌아간다.”

“백작님……”

기사들은 탄식했고, 병사들은 안심했다. 적어도 길렌 백작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할 위인이 아니었다. 총사령관의 직위를 달았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진 않았다.

타박­

“이봐, 지금 어딜……”

“네?”

모두가 침울해하고 있을 때 미로의 안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버트였다.

그녀는 멍하니 걸어가다말고 네르딜의 부름에 멈춰섰다. 네르딜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자네, 지금…… 안쪽으로 가려고……?”

“아, 죄송해요. 후퇴한다고 하셨죠?”

버트가 후다닥 돌아가려 하자 백작이 막아섰다. 버트는 어쩔 줄 몰라 뻘뻘거리고 길렌 백작은 버트의 앞길을 막아선 채 말했다.

“네르딜.”

“예, 백작님.”

“이들을 데리고 후퇴해라.”

“예?”

“나는 총사령관으로서 이번 임무를 끝내겠다.”

“백작님!?”

네르딜은 다급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안됩니다, 백작님! 이 앞은 미지의 영역!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방금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런 정체모를 함정이 가득한 곳에 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길렌 백작은 잠시 네르딜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앞은 이제까지 누구도 닿은 적이 없던 곳이다. 그러니 더더욱 후퇴하라 이르는 것이다.”

“어찌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저버리시려는 것입니까! 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총사령관이 사라진다면 왕국의 괴담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허면 국격에도 큰 타격이 입을 겁니다!”

“이대로 너희 전부를 희생시켜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최소한의 전력은 보존할 수 있겠지. 후퇴하라.”

“백작님!”

“명령이다.”

백작은 나직하게 말했고 네르딜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녕 가시려는 것입니까?”

“정말이지 부끄러웠다. 나는 한 나라의 귀족이자 수 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지휘관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 바란 건 그게 아니다. 그건 그대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백작은 슬쩍 버트를 바라보았다. 네르딜은 한순간 백작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자신의 강직함과 충직함을 보였을 때 백작이 보여주었던 눈빛과 같았다.

아니…… 뭔가 조금 더 그윽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설마……?’

네르딜은 잠시 버트를 보았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허나 모든 원정군을 찾아낼 때까지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네르딜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후퇴할 것이다! 허나 우리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아군이 고립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과 합류하여 모두 무사히 탈출한다!!”

“예!”

푸른비늘 기사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남은 병사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 아군을 떠올리며 나름 납득했다.

“그럼 가겠습니다.”

“크람스에서 보자꾸나, 네르딜.”

“예!”

그렇게 네르딜을 포함한 원정군이 물러나고…… 백작은 버트를 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지.”

“아, 네.”

판테스 왕국의 원정군…… 이들은 길렌 백작과 버트, 단 두 명으로 축소되었다.

*

“어찌 그리 태연하게 앞으로 갈 생각을 했나.”

길렌 백작의 질문에 버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야, 이곳에 오라고 했으니까요……?”

푸흐­

백작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당장 자신은 원정군의 안위를 위해 도망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몸을 사리느라 그런 것이었다.

카르고의 강력한 힘을 보고서 어느 누가 경계하지 않을까. 설사 그것이 중간보스격인 간부였다고 해도 쉽사리 진군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여인은 어떤가. 강하다. 하지만 그걸 떠나 대담했다. 한 치 앞도 모를 곳을 향해 서슴없이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이 어찌 이모탈과 다름없는 행동인가.’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절대로 오만방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 모욕을 주었을 때 왜 가만히 있었는가.’

버트는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백작 자신이 소인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배포는 대단했다.

만일 자신이 힘을 감춘 상태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을까? 설사 억제되었다 하더라도 표정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그녀는 순수하게 굴욕을 느꼈고 순진하게 달아났다. 대체 그런 힘을 지니고 어째서 그런 것일까.

‘결코 범인은 아니다.’

백작은 버트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는 걸 느꼈다. 강굴 했던 백작의 마음에 버트의 마기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강한 힘에 대한 동경. 위기 상황에서의 등장. 백작의 마음이 유약해진 틈을 타 버트의 마기가 치명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물론 버트는 아직 이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힘을 인정하여 같이 간단 생각만 하고 있었다.

“버트, 라고 했나?”

“네? 아, 네.”

“이번 일이 끝나면 너를 푸른비늘 기사단으로 스카웃 해올 것이다.”

“예?!”

“너는 블랙 남작의 밑에 있기에는 아까워. 아니, 그만한 힘과 고귀함이면 내 직접 폐하께 건의 드려보지. 작위를 받게 해주마.”

이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준남작 위에 해당하는 기사직이 되는 것뿐이었다. 평민이 남작이 될 확률은 그야말로 극악! 이모탈이 귀족이 되는 건 이것보다 어려웠으니 버트가 남작위를 받았을 때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다만 버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제안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도 현재 남작이고 웬만한 귀족들과 견줄 정도의 재화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저 게임에 취하고 다른 일에 전념하느라 그걸 알 방법이 없었을 뿐이었다.

만일 니스가 버트의 위치였다면 모든 알바를 때려치고 하루 종일 놀고먹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버트의 거절에 백작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녀에 대한 호감은 제치더라도 고위 귀족이나 되는 자신의 제안을 뿌리치는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어째서지? 블랙 남작이 네게 있어서 그만큼 소중한 존재인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충성을 할 정도로?”

“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버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생긋 웃었다.

“저는 귀족이랑 맞지 않아요.”

“응……?”

“그냥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요. 따뜻한 태양빛도 좋고, 서늘한 그늘도 좋고, 구름이 껴서 흐릿한 날도 좋고, 비나 눈이 오는 것도 좋아요.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도 좋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 좋아요. 나뭇가지를 밟거나 눈을 밟거나, 얼음을 깨거나…… 그런 모든 게 재밌어요.”

버트는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는 정말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귀족이 되기엔 무리가 있을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백작은 버트와 대화하면 할수록 새로운 영역을 보는 기분이었다.

명예나 직위를 벗어나다 못해 초연한 태도……! 아이와도 같은 깨끗한 모습에 백작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 위험에 거리낌 없이 나아가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를 무엇으로 회유해야 한단 말인가. 맛있는 음식이나 귀여운 동물 같은 걸로 꼬실 수도 없지 않은가! 당연히 힘이나 직위를 이용한 협박조차 먹히지 않을 것이다.

버트는 점점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되어갔다. 엄청난 괴리감……! 바로 곁에서 걷고 있는 데도 손을 뻗으면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경외심이 드는 격차는 오히려 백작의 호감을 폭발시켰다.

‘고결.’

그 무엇으로도 묶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난폭하지 않다.

‘아름답다.’

평범했던 버트의 모습이 유달리 아름다워 보였다. 곳곳에 묻은 더러운 피와 흙먼지조차 장식으로 보였다.

백작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이 느낌……’

버트를 보는 백작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렇구나……’

격하게 뛰는 가슴은 한 가지 결론으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난 이 여자를 사랑한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듀크 사의 회의실. 서류 더미를 팽개치는 부장의 외침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분명 그 흡혈귀들은 향후 30년 간은 드러나지 않아야 했어!! 현실 시간으로 30년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이놈들이 미로를 지상으로 드러냈느냔 말이야!!”

“그것이…… 메일드로우가 반파 되어서……”

“메일드로우가 반파?”

부장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그걸 부술 수 있는 건 드래곤밖에 없어!! 설마 드래곤 그것들이 규약을 깨고 행동에 나섰단 거야, 뭐야!”

“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데!”

“키런 왕국이랑 로이첸 왕국의 왕이 납치되어서……”

“씨발!!”

부장은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때려부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다른 이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판타지아를 만든 일등공신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더 높은 위치를 거절하고 현재의 자리를 고집하고 있었다. 부하 직원들한테도 늘 웃는 모습, 존댓말과 조곤조곤한 말투로 인기가 있었다.

어느 직원이 프로그래밍에 실패를 했던 걸 직접 덮어주기도 했고 외부로 기밀이 유출됐을 때도 그가 나서서 막아주었다. 사원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워너비인 상사가 지금은 욕설을 하며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진정해라 고경태. 지금까지의 시련들 역시 예상외의 것들! 드래곤이 일개 인간과 친구를 맺은 것도, 플레이어 하나가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도 전부 커버가 가능하다!’

고경태 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백신 집결하라.”

스마트폰을 통해 판타지아의 내부로 통신이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수많은 백신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꼼짝하지 않았다.

“……뭐?”

[ 발견. 오류. 대기. 계산. 보류. ]

경태는 이마에 핏줄이 서는 걸 느꼈다. 지금 대답하는 백신은 판타지아의 조율을 맡고 있었다. 이모탈이라 지칭된 플레이어가 게임에 과하게 간섭하여 문화를 바꾸거나 인식을 개선하는 걸 막는 것이 임무! 그런데 지금 이 백신은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계산을 못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오류인가? 젠장, 상관없어. 어차피 백신 하나의 전력이면 드래곤 두셋은 잡을 수 있다.’

경태는 다른 백신만 호출 하고나서야 심호흡 했다.

“지금 이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마세요. 이번 이벤트는 상당히 나중에야 벌어졌어야 한 것입니다. 기획부와 홍보부에서 태클이 올 테지만 전부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들 하면 됩니다. 아셨죠?”

“네……”

사원들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실상 경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판타지아의 운영부서랍시고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플레이어로써 정보를 수집하거나 특정 엔피시들이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걸 막는 게 고작이었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최근 들어서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백신의 위치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이 했던 일을 보고하는 것 정도…… 그 방대한 가상현실 게임에서 운영부가 몇 안 되는 사람으로 구성 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신 3호에 대한 관찰 기록 전부 가져오세요.”

경태는 침착하게 얘기했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렸다.

올 것이 왔구나.

“잠시……”

경태는 그대로 부장실로 들어갔다.

“여보세­”

[ 나야. ]

“……희정이?”

의외의 사람이 건 전화에 경태는 헛기침을 했다.

“왜, 무슨 일이야?”

[ 백신 긴급 호출하면 나한테 연락 오잖아. 잊었어? ]

“아……”

경태는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매만졌다. 그런 기능이 있었단 걸 안 것도 10년도 더 된 일! 아니,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그걸 일일이 기억할 만큼 경태는 한가하지 않았다.

[ 그래서 이번 미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

“……일단은.”

[ 놔둬. ]

“뭐?”

[ 상부에서 지시가 왔어. 지금 다른 부서에서 개지랄 하지 않는 것도 상부의 지침이라더라. ]

경태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무슨 소리야 그게?”

[ 이것조차 마케팅으로 삼자는 말이 나왔어. 지금 듀크 주식 오른 거 못 봤어? ]

“젠장, 이번에 이 정도 임팩트 주면 나중에 선보일 이벤트 전부 종이쪼가리 되는 거 몰라? 칼라 해변 레이드 같은 것에도 만족 못하게 된다고! 강약을 조절해야 한단 말이야!”

[ 나도 알지. 하지만 윗선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걸 어쩌겠어. 게다가 이번 이벤트 싱겁다는 얘기가 종종 나오고 있어. ]

“그건 이상한 녀석 때문에 그런 거야! 규약을 어긴 드래곤이든, 숨어있던 은거기인이든 백신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어!”

[ 가이람 백작도? ]

경태는 입술을 콰작 씹었다.

“씨발……”

[ 또, 또, 또. 너 설마 이번 일로 성질 터져서 지랄한 거 아니지? ]

“……했어.”

[ 하여간 감정 조절 좀 잘 해. 이번 해변 이벤트로 샤만의 해저 떡밥을 뿌리려던 건 알겠는데 말이야…… ]

“내 나름 역작이었다고! 해저인과 교류해서 산소 방울만 얻으면 어느 정도 공략이 가능한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주잖아! 뭐가 3대 공략 불가 지역이야! 애초에 공략 난이도만 따지면 만트라 대협곡이 훨씬 더 어렵다고!”

[ 그 과정이 힘든 거잖아. 세상 어느 누가 그곳에서 주구장창 낚시나 하며 지내겠어? 그렇게 놀기 좋은 관광지에서 그만한 주접이 없지. ]

“큭……”

[ 하여간 너무 멘탈 깨지지 마. 이사님이 격려금 쏴준다고 했으니까. ]

“……다른 지침은 없었어?”

[ 없어. 그러니 오늘 부하들 데리고 소고기나 먹으러 가. ]

경태는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백신, 다시 본래의 임무로.”

경태는 그 한 마디를 하고 한동안 부장실을 나서지 않았다.

*

“흐흐흐…… 나약하기 그지없는 생물이구나.”

미로 곳곳에서 벌어지는 생명 반응은 전부 도망치기 바빴다. 그걸 보는 셀기디어는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100년도 이릅니다. 뭐, 100년이 지나도 그들이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요.”

게르티몽. 그는 거만하게 말했지만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드러커스의 미로 전체에 연결되어 생명반응을 비춰주는 지도만 해도 이 대륙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타티샤의 일은 유감이구나.”

“그런 규격 외의 일에는 누구라도 대응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런 짓을 한 게 대체 누구인지……”

게르티몽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분명 타티샤는 그의 제자였지만 그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냉정한 답변이었지만 셀기디어는 그가 제법 분노하고 있단 걸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로를 올리는데 적극 찬성할 리가 없지.’

셀기디어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솔직히 페슈트 그 암컷이 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들의 나라에 그만한 전력은 없을 것이다. 기껏 해야 살리마 왕국에 있는 마법사들 정도나 꾸밀 수 있겠지만…… 그만한 위력의 마법은 아직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왕국 정벌 이후 상황이 안정되면 수색을 할 예정이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뭐냐, 히레이즈.”

“제가 보았을 때 메일드로우를 공격한 이와 나이트피어 일족의 수장과 연관되어 있을 듯 합니다.”

그는 전략가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메일드로우의 함정 배치는 물론 드러커스의 미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병사들의 통솔과 지휘 및 작전 시행도 반드시 그를 거쳐갈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이미 몇 번이고 나온 소재였지만 셀기디어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가 원인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해서였다.

“근거는 무언가.”

“백신들은 저희가 지하에서 나오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배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분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저희를 건드리기보다는 서쪽에서 난리를 치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니다?”

“예. 그렇다고 이모탈일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하나의 나약한 종자일 뿐 가진 것이라고는 불사성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국가 하나를 어쩌지도 못하는데 어찌 이곳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그들은 미로의 입구에만 도달했을 뿐, 저희가 숨겨놓은 암호조차 풀지 못했습니다.”

“마법사들도 있지 않던가?”

“그들의 호기심이라면 진즉 뚫고 왔을 테지요. 허나 그만한 힘을 가진 이는 없습니다.”

“나이트피어에서 그런 힘을 가진 녀석이 있던가?”

“없습니다.”

셀기디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

“허나 실종된 이가 있지 않습니까.”

“둠워퍼…… 최후의 장로 벨루그하 다프모스!”

“페슈트의 힘은 둠워퍼 일족과 비슷합니다. 갈가리 찢긴 그의 힘을 수급해서 메일드로우에 쏟아 부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아니면……”

“아니면?”

“마신의 씨앗을 써서 그 자를 회복시키고 힘을 합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셀기디어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미로 밖에 대한 일은 굵직한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에 비해 페슈트 그년은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으니 정보력에서는 이길 수 없어. 재수 없으면 블랙스타나 다른 추종자들과 규합해서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년이니 누군가 속아서 휘둘릴 가능성도 있고.’

셀기디어는 히레이즈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달리 리아주크의 편애를 받았던 엠파이어 일족이었으니 다른 이들의 질투를 받는 건 당연지사! 그런 와중에 마신의 씨앗을 갖고 있으니 자기들이 리아주크의 유일한 계승자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건 텅 빈 영혼에 불과하다. 육신은 찢겨 없어지고 정신은 비어있는 리아주크를 이 이상 모독해서는 안 돼!’

셀기디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게르티몽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왕이시여. 미로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뭐?”

셀기디어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겠단 생각을 하다 눈을 번쩍 떴다. 희미한 불빛. 합쳐서 몇 십도 안 되는 수의 생명 반응이 안쪽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프하하하­!!”

우렁찬 웃음! 그들이 있는 공간이 전율할 정도였다.

“그래, 흑사병대와 노스페라투를 상대하고도 진입할 생각이 든다는 건가? 과연 대단하군. 한데 이곳에 오는 게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인가? 프흐흐…… 안타깝군, 안타까워. 정말로 안타까워!”

셀기디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이 바뀌었다. 미로로 녀석들을 전멸시킬 생각이었지만, 예정을 변경한다.”

“허면……?”

“미로의 기능을 중지시켜라, 게르티몽.”

“그러면 그저 단단한 미로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직접 나선다.”

“왕께서 말입니까……?”

“어디보자…… 그러고 보니 왕이 납치된 곳끼리 연합한 곳이 있었지? 이쪽이 가장 많이 오고 있군.”

셀기디어는 마흔 남짓한 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키런 왕국과 로이첸 왕국의 연합입니다만…… 동행하겠습니다.”

“아서라. 대신 너희에게 나머지를 맡기지. 게르티몽, 너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그리고 수호대와 기사단도 물러두어라. 운 좋게 이곳에 도달하는 녀석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우르간드, 히레이즈, 루번, 너희 셋이 알아서 나누어져 놀아라.”

셀기디어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흐릿해지나 싶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얼떨결에 직접 공격에 나서게 된 세 명의 제자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내가 이쪽으로 가지. 마법사들의 시신을 가져다주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면 나는 도망자들을 처리하지.”

우르간드는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러자 루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 제가…… 저 쪽을 맡죠.”

단 둘 밖에 오지 않는 이들. 히레이즈는 판테스 왕국군에서 떨어져 나온 신호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