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42화 (42/104)

〈 42화 〉 42 ­ 노스페라투 기사단 下

* * *

셀기디어의 산하에는 세 조직이 있었다.

첫 번째, 노스페라투 기사단. 셀기디어의 마기를 직접 부여받은 흡혈귀만 엄선해서 만든 기사단으로 그 수는 100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일반 병사(흡혈귀)를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두 번째로 드라큘 수호대. 거인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소수 정예라 불리는 노스페라투 기사단보다 훨씬 수가 적었다. 대신 그들은 타고난 힘과 전투 능력으로 수를 보완했다. 이들은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홀로 입구를 막거나 왕이 사는 곳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만드라고라. 이들은 약물이나 시술을 통해 신체 개조나 종족의 변환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대표 작품이 바로 판타지아를 시련으로 몰고 갔던 ‘켈베로스’였다. 이들이 만들어낸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인체를 강하게 해주는 약물이나 강력하게 개조한 몬스터 군단 역시 만들어냈다.

현재 드러커스의 미로를 공격해오는 왕국군을 향해 만드라고라와 노스페라투 기사단의 합심으로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곳……

“이곳이다.”

판테스 왕국의 수도, 크람스. 이곳에 붉은 갑주를 걸친 10인이 나타났다.

노스페라투의 기사들! 그들은 셀기디어의 명령으로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했다. 가장 먼저 그들이 하기로 한 건 각국의 수장을 납치하는 일! 그걸 위해서 무려 10명이나 되는 기사를 투입했다.

판테스 왕국만이 아니었다. 키런 왕국과 살리마 왕국, 스카이 왕국과 로이첸 왕국에도 기사들을 보냈다.

노스페라투 기사단의 절반이 투입된 이 작전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습격을 막아낼 만한 곳은 살리마 왕국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비상사태에 돌입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샤악­

10인의 기사, 그들은 가볍게 왕도를 통과했다. 일반 병사들은 물론 기사직에 있는 자들조차 그들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죽여라.”

“엇……? 누구……”

“크아아악­!!”

병사들이고 기사들이고 그들 손에 죽어나갔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수 백에 달하는 정예병이 죽었다. 그 사이에 귀족도 있었다. 하지만 왕성은 이 소란을 감지하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 당연히 소란이 일기 전에 노스페라투 기사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나약하군요.”

“인간들이기 때문이지.”

노스페라투 기사들은 그렇게 순조롭게 왕성에 침범했고 곧 뮬러 7세가 있는 집무실까지 쳐들어왔다.

“양동 작전이라……. 힘의 여유가 있지 않는 한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

뮬러 7세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그 모습에 판테스 왕성 공격조의 조장 네스라후가 말했다.

“우리의 왕께서 친히 보자고 하시니 순순히 따르거라.”

“만일 그대들의 왕에게 같은 짓을 했다면 어떻게 나왔을 텐가?”

네스라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불경한…… 우리의 왕을 욕보이는 것이냐?”

뮬러 7세는 네스라후가 내뿜는 살기에도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마신의 마기를 겪어본 몸이었다. 아무리 네스라후가 강하다고는 하나 마기에 휩쓸릴 위인이 아니었다.

“블랙 남작…… 대체 얼마나 많은 힘을 숨기고 있는 건지……”

뮬러 7세의 나직한 혼잣말. 그게 끝나자마자 네스라후가 그의 눈앞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뒤로 훅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네, 네놈은……?”

뮬러 7세의 옆에는 귀신같은 갑주차림의 검은 기사가 서있었다.

리실버……

아니, 리실버란 흑기사로 위장한 루하다였다.

“네놈?”

루하다는 방금 네스라후의 코뼈를 주저앉힌 주먹을 들어보였다.

“셀기디어 이놈이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는지 알겠군. 동등한 추종자의 입장이라고는 하나 한 때 장로의 위치에 있던 나다.”

루하다의 몸에서 끈적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네스라후가 흘린 살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끈적한 기운……!

“그런 내게 그따위 언행이라니!”

“공겨억!!”

네스라후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루하다가 달려들었다. 나머지 9인의 노스페라투 기사…… 그들은 루하다를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하고 전멸했다.

주먹 한 방에 한 명씩. 뮬러 7세가 본 건 두 팔을 늘어뜨리며 서있는 루하다와 바닥에 나동그라진 10인의 기사였다. 그가 어떻게 공격했고, 그들이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루하다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노스페라투 기사가 한 명씩 죽어나갔다.

‘굉장해.’

뮬러 7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출정하기 전 블랙 남작이 일러준 몇 마디 말 때문이었다.

‘호위기사로 이 자를 두고 왕성에 귀족파들의 정예병을 집결시켜라.’

고작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뮬러 7세는 페이니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 이것 역시 버트의 조언이라 생각했고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그럴 거라 믿었다.

다행히 귀족파 귀족들은 왕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기사와 정예병을 주둔시켜주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전력 보존이었다. 겸사겸사 왕을 지켰다는 공적을 세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설마 가장 안전하리라 생각한 곳이 가장 위험할 거란 생각도 못한 채……

‘블랙 남작의 대리인이 블랙스타의 추기경이라도 되는 건가?’

뮬러 7세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주었을 뿐인데…… 뮬러 7세는 무사히 살아남게 되었다.

‘가만, 여기에 보냈다는 건 다른 곳도 위험하단 뜻인가?’

뮬러 7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탁상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와 연락해봐야겠군.”

“기다려라.”

루하다는 뮬러 7세의 앞을 막았다.

“무슨 짓이냐? 길을 비켜라.”

“페ㅇ…… 블랙 남작이 이르길. 일이 생기면 곧장 나서지 말고 10분에서 20분 정도 지난 뒤에 보내주란 말이 있었다.”

“뭐라? 어째서……”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으니 그 여자한테 직접 물어봐라.”

루하다는 혀를 차며 말했고 뮬러 7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뒤늦게 페이니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들이 들어서기까지 내게 찾아오는 이들이 없다!’

그만큼 이들이 은밀했거나 아니면 오는 도중 그들이 전부 죽었거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조용할리 없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다급한 움직임과 함께 병사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나서야 뮬러 7세는 페이니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다른 곳에서도 수습하는데 상당히 시간을 잡아먹을 터. 무엇보다 왕을 노린 이들의 배후를 캐내고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소요된다. 아마 방금 연락을 넣었더라면 다른 나라에서 우리의 전력을 의심하거나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지도 몰랐다는 건가?’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공격을 받고 곧장 연락이 닿는다면 의심을 할 것 같았다. 이만한 전력을 순식간에 물리치고 무사히 연락을 하다니……!

“폐하! 괜찮으십니까!”

릴본 자작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뮬러 7세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괜찮다. 바깥은 어떠냐?”

“그것이…… 일단 확인된 바로는 벨리오 공작과 하얀사자 기사단이 전멸했습니다. 그 외에도 귀족 다수와 기사들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뮬러 7세는 그 소식에 눈을 크게 떴다.

하얀사자 기사단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당장 왕실 기사단과 맞붙어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쳐들어오고 큰 소란 없이 전멸했다니? 그렇다면 그런 괴물들을 단숨에 때려죽인 이 리실버란 자는 얼마나 강한 것인가!

그때 블랙 남작이 회의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귀족파 귀족들을 후방에 배치하고 왕당파 귀족을 앞으로 내보낸 것도……?’

뮬러 7세는 점점 소름이 끼쳤다. 이제는 그녀를 도구로 이용하는 게 아닌 그녀에게서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왕이었다. 수 십 만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자 우두머리였다.

“그렇군…… 이곳에 쳐들어온 이들이 어찌 부상이 많다 했더니 나의 신하들과 그 부하들의 희생 덕분이었구나. 일단 시신을 수습하라. 그리고 이번 일의 배후를 수색하고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다른 나라에게 통신을 요청하라.”

“알겠습니다!”

릴본 자작은 자리를 떠났고 뮬러 7세는 루하다를 돌아보았다.

“자네의 공적은 눈에 띄지 않게 해두었네. 아마 이것 역시 그녀가 의도한 바일 테지?”

“흠…… 그렇겠지.”

“일단 잠시만 기다리지. 자네는 임시라고는 해도 나의 호위기도 하니……”

그렇게 시신들을 수습하고 배후를 쫓기 시작했을 때가 2시간…… 원정군이 노스페라투 기사들과 조우하고 대치하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

[ 가면 안 돼. ]

몇 킬로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페이니가 주의를 주었다. 카르고와 대치중인 길렌 백작을 보던 버트가 돕고 싶다는 뜻을 표해서였다.

버트로서는 참으로 미운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애초에 눈앞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까.

[ 그건 기사의 자존심을 긁는 일이야. ]

그렇게 말했을 때 버트는 얌전히 있기로 했다. 갑자기 카르고가 백작을 압도했을 때부터는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고 그가 발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어딜 보고 있­”

네르딜은 버트의 뒤를 노리는 검은 병사를 쳐내며 소리쳤다. 멍하니 서있는 버트가 앞으로 움직이려는 걸 보았다. 그 뒤는 보지 못했다. 그곳에는 흙먼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네르딜이 본 건 저 멀리…… 수 십 미터 밖에서 카르고를 베어 넘기는 버트의 모습이었다.

*

분명 유약한 기사였을 것이다. 아니 기사란 이름을 달기에도 민망한 여식이었다. 비록 백작이 준 시련은 잘 견뎠지만 그래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지금 길렌 백작의 눈앞에는 자신을 압도한 적을 일격에 쓰러뜨린 기사가 서있었다.

“괜찮으세요?”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

“커흑……! 네년……! 대체 뭐하는……”

카르고는 피가 쏟아지는 상처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버트는 마기로 만들어낸 검을 가볍게 털어내며 그를 겨누었다.

“말했잖아요? 버트라고.”

“그러니까 어디서 온 년이란 거다!!”

카르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버트에게 달려들었다. 버트는 침착하게 검을 세우더니 카르고의 주먹을 쳐냈다.

쩌엉!

카르고는 버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다른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버트가 쳐낸 팔이 누가 옆에서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쭉 뻗어나갔다. 버트가 쳐낸 힘이 어마어마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 팔을 따라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고 카르고는 휘청댈 수밖에 없었다.

그 빈틈을 노리고 버트가 검을 내질렀다.

푹­

“크헉?!”

카르고는 자기 배를 관통한 검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허리를 최대한 틀어 피하려 했는데 정통으로 맞았다.

빠르다……! 보고 반응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공격당한 뒤였다.

강하다……!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버트의 공세를 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체……!!’

카르고는 이를 악물며 다시 주먹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버트가 가차없이 검을 휘둘렀고 그대로 팔이 절단났다.

“크아아악­!!”

자신이 백작에게서 뺏으려 했던 팔을 잃은 카르고……! 그는 피를 흩뿌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무리 버트의 공격이 강하다지만 카르고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보다 더한 상처와 고통을 수없이 겪은 카르고였지만 어째선지 버트의 검은 너무 아팠다. 절단면에서부터 무언가 물어뜯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격통이 그를 괴롭혔다.

“대체 넌 뭐하는 년이냐!! 대체에!!”

“몇 번이나 말해요.”

서걱­

“버트라고.”

버트는 망설임 없이 카르고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툭 떨어진 머리를 보며 속이 안 좋은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헛구역질까지 몇 번 하던 버트는 그대로 백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어요?”

“아.”

백작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말을 못하고 버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손에서부터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쿵­

그의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백작은 놀란 얼굴로 버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버트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웠다. 햇빛을 등지고 서있는 모습이 후광처럼 보였다. 피비린내가 달콤한 향기로 느껴졌다. 손에 닿은 그 부드러운 느낌에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백작이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고 있자 버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른 곳을 보았다. 검은 병사들에게 애를 먹고 있는 원정군을 보더니 백작을 냉큼 안아들었다.

“헛?!”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드릴게요.”

버트는 그렇게 생글 웃으며 백작을 공주님처럼 안고 달렸다.

*

“혹시 이거, 내가 괜한 간섭을 한 건가?”

“당신은……?”

골드로츠는 갑작스레 강해진 르와이스 때문에 애를 먹었다. 당연히 뒤로 계속 밀리다 위험에 처했고, 그 틈을 노리고 누군가 싸움에 끼어들었다.

덥수룩한 수염. 나른한 눈빛의 아저씨는 투구를 제외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남자를 알아보는 건 대부분 플레이어들이었다.

‘현 랭커이자 모든 지역을 타파한 남자……!’

‘수많은 공격대를 이끈…… 공대장!’

‘전설의 레전드다!!’

‘퍼·제(퍼스트 제네레이션) 길드도 온 건가?’

공대장은 어버버한 골드로츠를 보며 피식 웃더니 르와이스의 검을 쳐냈다. 그가 들고 있는 흉흉한 기세의 단창이 이내 르와이스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헛?!”

르와이스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공격을 막은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가 인지하기 어려운 속도로 반격까지 해왔다.

셀기디어의 힘을 해방한 지금 자신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방금 그의 공격을 피했는데도 정신이 잠깐 날아갈 뻔했다.

‘대체 이게 무슨……’

르와이스는 그를 경계하는 눈으로 검을 들었고 공대장은 피식 웃으며 단창을 어깨에 걸쳤다.

“나 원, 갑자기 메일드로우가 반파 됐다길래 길드 사냥도 제치고 달려왔다고. 근데 진짜 누가 저렇게 만든 거야?”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아, 그런 딱딱한 말투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뭐, 그래도 돕기로 했으니까……”

공대장이 창을 그러쥐며 르와이스를 겨누었다.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드래곤의 기세가 피어오르더니 드래곤 장식의 투구가 씌워졌다.

“용신 강림.”

*

“에잉…… 쯧쯔쯔…… 이제야 오는 게냐?”

그레노의 불평은 메르다의 마법을 막고 있는 라이에게 향했다. 라이는 메르다가 던진 집채만한 붉은 구체들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이요, 영감?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내 체면 다 구겨지고 도우러 오면 뭣하누.”

그레노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보인 적 없는 가벼운 모습을 보이며 혀를 찼다. 라이는 눈가를 씰룩이면서 한 손으로는 신성 마법을, 다른 한 손으로는 원소 마법을 시전하며 말했다.

“아니 왕국 본진도 위험해서 시간 좀 걸린 걸 어쩌라고요! 나름대로 이 악물고 텔레포트 난사해서 왔더니만……!”

“거 올 클래스 매지션이라더니만, 째깍째깍 못 오나? 으잉, 쯧쯔……”

“와씨!”

그의 두 손에서 두 가지의 마법이 합쳐졌다.

신성 마법 {절멸의 광창}

원소 마법 {지독한 불꽃}

그 둘이 합쳐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불꽃 창이 만들어졌다. 이윽고 그건 메르다를 향해 날아갔다.

메르다는 다급하게 피하려 했지만 라이의 마법은 너무 빨랐다. 그래서 그는 정면에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콰작­

하지만 라이의 마법은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단숨에 메르다의 방어막을 부수고 그의 신체의 7할 가량을 불태웠다.

“이런…… 미친……”

메르다는 그대로 절명한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라이는 그런 메르다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그레노에게 따지고 들었다.

“제가 동반한다니까 뭐라 했어요? 혼자서도 충분하다면서 거드름 피우더니만!”

“갑자기 저 놈이 힘이 상승할지 내가 알았누?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이해심이 없어서……”

“이 꼰대 영감……!”

“나한테 소리 지를 시간에 다른 녀석들이나 구해주는 게 어떻누?”

“나중에 보자고요!”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마끼야또가 한 녀석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녀석들이 라이의 마법에 서른이 넘는 수가 쓰러졌다.

‘인재로다.’

그레노는 라이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언제 봐도 그의 마법은 대단했다. 어쩌면 넬하트의 전성기 시절보다 더 강해질지도 몰랐다.

‘다만 아쉬운 건 그 힘을 받쳐줄 세력이 없다는 것인데.’

라이는 분명 강했다. 하지만 그는 추종자보다 질시하고 위해를 끼칠 자들이 많았다.

‘그것만 보완된다면…….’

마탑…… 어쩌면 이 대륙은 가장 무서운 사람을 상대해야 할 지도 몰랐다.

*

“뭐?”

셀기디어는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고를 올리던 노스페라투 기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재차 말했다.

“네스라후 조장과 시벨드 조장이 실종 상태입니다. 그와 함께 보낸 기사들 역시……”

“이게 대체 무슨……! 당장 풀지 못하겠느냐!”

한창 보고를 올리던 중 한 여인이 소리쳤다.

그녀는 로이첸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 케틀라이아였다. 그 옆에 묵묵히 서있는 자는 위대한 기사라고도 불리는 키런 왕국의 왕 바틸카스였다.

셀기디어는 그 둘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비록 내 정예라고는 하나 이렇게 맥도 못 추고 잡혀오는 것들이 왕이라니…… 그래, 그 둘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건가?”

“네. 살리마 왕국은 몰라도 판테스 왕국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 줄은……”

“변수가 있는 게지. 혹여 라이칸슬로프가 관여한 게 아니더냐?”

“그건 아닙니다. 그것들이 저희를 싫어한다고 해서 인간 편을 들 놈들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녀석들한테 당할 정도로 저희는 나약하지 않습니다.”

셀기디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허면 대체 무엇이……”

“아마 살육전을 벌이느라 늦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오래 걸린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추가로 조원을 보내야……”

그때 보고를 올리던 기사가 눈가를 움찔거렸다.

“왕이시여, 이건……”

“됐다.”

셀기디어는 손을 휘적거리더니 그 기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기사의 눈에서 빛이 뿜어지며 한 영상이 비춰졌다.

끝없이 눈발이 흩날리는 배경. 분명 해가 떠있는 시간일 텐데도 어둑한 눈밭이 보이면서 한 여인이 비춰졌다. 셀기디어는 그가 누군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마르가트.”

“조약을 잊었더냐, 셀기디어. 리아주크의 수족들 전부 이 세계의 흐름대로 살기로 하지 않았나?”

셀기디어는 잠시 속이 끓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는 셀기디어 본인도 승리를 장담키 어려웠다.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백신과 함께 리아주크를 상대했던 종족이었고, 그들 중 가장 녀석이 바로 이 남자였다.

“이건 엄연히 정당방위다. 먼저 우리의 땅을 침공한 건 이들이다.”

“에델바흐가 침공 명령을 내렸다고? 애초에 거기까지 가려면 나라 2개는 거쳐가야 한다. 살리마에서 원조를 한 게 아닌 이상 이 나라의 병력이 거기까지 갈 리 없지 않나.”

“세계의 흐름도 읽지 못하는가 보군. 골방 늙은이 신세라더니……”

“뭐라?”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압박감! 영상을 쬐고 있는 기사조차 몸을 벌벌 떨 정도였다.

“입을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본래의 이름을 잃은 종족이여. 스카이 왕국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번 네 실수는 눈감아 줄 테니 두 번 다시 눈 덮인 땅을 밟지 말거라!”

화면이 끊어지고 기사는 제정신을 차렸다.

“대체…… 방금 그건……”

“마르가트.”

셀기디어는 나직하게 말했다.

“마르가트 에필리어 룬데일로스. 다섯 번 째 드래곤이자 리아주크의 신봉자를 억제하던 녀석들 중 하나다.”

“마신을 말입니까……?”

“서른의 수족을 잃은 건가. 마음이 아프군. 나탈리가 애완견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상심이 커.”

셀기디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풍당당한 풍채에 기사는 절로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두 왕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둘을 향해 말했다.

“이 침공에 대한 반격은 정당방위…… 그러니 그대들의 땅을 뺏는 것 역시 정당방위다.”

“뭐라……?”

“메일드로우는 본래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소였다. 생존 능력, 전투 능력, 판단력, 육감, 정신력, 통솔력…… 모든 것을 단련시키기 위해 자가 수복이 되는 온갖 함정들과 위험한 장치를 설치해둔 것이지. 헌데 어떻게 그것이 지상에 있을까?”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검지를 세웠다.

“올려라.”

그그긍­

땅이 격동했다. 케틀라이아와 바틸카스가 당황한 눈치로 바라보았다.

“건축가 게르티몽, 설계사 타티샤, 조달자 우르간드, 전략가 히레이즈, 기술자 루번…… 엠파이어 일족의 모든 기술이 집대성된 최흉의 미로…… 무참하게 죽어갔던 선대 엠파이어의 왕 드러커스의 뜻을 기리며 만든 무적의 공간…… 이것 역시 지상으로 떠오른다.”

*

“뭐, 뭐야?”

공대장, 라이, 버트의 참전으로 어느 정도 우세를 취하던 원정군이 일제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

라이는 흔들리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본 건 지하에서 맥동하고 있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뭔지 알아챈 라이는 목청껏 소리쳤다.

“젠장! 전부 뒤로 물러서!!”

라이는 온힘을 다해 살리마 왕국군과 마탑의 마법사들을 전송시켰다. 하지만 일부 병사나 마법사는 보낼 수 없었다.

콰곽!

붉은 벽이 솟구쳤다. 얼마나 두꺼운지도 모를 높은 벽이 솟아나면서 지원군들을 갈라놓았다.

“이게 뭐야!?”

벽은 하나만 솟아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솟구친 벽은 전부 이어져 있었다.

“미로……”

“말도 안 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원군들이 당황하는 와중에 르와이스의 가슴에 창을 꽂아 넣으려던 공대장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3대 공략 불가 지역…… 드러커스의 미로……”

막대한 규모의 붉은 미로. 플레이어들은 물론 모든 나라에서조차 최악이자 미지로 불리는 장소!

드러커스의 미로가 지상에 드러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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