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44 드러커스의 미로 中
* * *
[ 그릇께서는 무사한가? ]
루하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의 앞에는 타국과 통신하느라 바쁜 뮬러 7세밖에 없었다.
각 나라의 지도자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후 뮬러 7세의 통신에 응답한 건 스카이 왕국뿐이었다. 살리마 왕국은 왕이 중태에 빠졌고 키런 왕국과 로이첸 왕국은 지도자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뮬러 7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각 나라에 대해 왕의 구출 작전을 언급하는 한편 구원 병력을 추리겠다고 넌지시 일렀다. 동시에 이번 사태에 대해 루하다에게 넌지시 물었다. 루하다는 이에 대한 답을 위해 페이니에게 정신 연결을 시도했다.
[ 미로에 갇히긴 했지만 괜찮아. ]
[ 미로……? 그 박쥐놈들의 미로 말이냐? ]
[ 엉. 여간 열받은 게 아닌가봐. 미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던데? ]
[ 그런 놈들에게 당하리라고 생각은 안한다만…… 정말 그릇께서는 무사한 거겠지? ]
[ 이렇게 걱정투성이인데 용케 내 말에 따랐네. ]
[ 그릇께서 널 믿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다. ]
[ 그러다 내가 배신이라도 한다면? ]
페이니의 떠보기의 피해를 본 건 뮬러 7세였다. 루하다가 마기를 감추지 않고 뿜어댔기 때문이었다.
[ 보나마나 괜한 데다 성질부리고 있겠지? 걱정 하지 마. 마신의 그릇을 그렇게 쉽게 내칠 리가 없잖아? 엠파이어 녀석들은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
[ 헛소리를 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괜찮나보군. 내가 갈 필요 없단 것으로 받아들이지. ]
[ 이제 머리 좀 굴릴 줄 아네. 그래, 거기서 혹시 모를 변수를 막아달라고. 충분히 빚을 지워둬야 우리 그릇에게 큰 힘이 되어줄 테니 말이야. ]
[ 그래. 그러면 이번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려주면 되지? ]
[ 반 정도? 우리의 정체까지 걸리지 않는 선에서만 알려줘. ]
[ ……알았다. ]
루하다는 정신 연결을 끊고 뮬러 7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혹여 이번 사건이 드러커스 미로와 관계되어 있는 건가?”
루하다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뮬러 7세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현재 판테스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두 나라는 지도자가 실종되어서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럴 때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나중에 외교를 할 때 유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판테스 왕국도 그렇게 여유가 없단 점이었다.
귀족파 병력 7할 소실. 귀족파의 주요 기둥이었던 벨리오 공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의 6할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이걸로 귀족파의 세력은 크게 줄어서 중립파의 도움 없이도 왕당파의 힘만으로 찍어누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판테스 왕국의 국민이자 전력이었다. 그들의 약화는 곧 왕국의 약화였다.
‘드러커스 미로를 공략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구출과 연계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다. 그래야만 병력 운용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뮬러 7세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미로가 지상에 드러나?”
릴본 자작은 고개를 숙였다.
“예. 대부분의 원정군이 미로 안에 갇힌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보급책은 어떻게 됐나?”
“미로 안과 밖이 거의 차단되어 있어서 입구를 찾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무엇보다 내부가 어떤 상황인지조차 알 수 없어서 함부로 진입할 수조차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뮬러 7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역시 드러커스의 미로를 공략하기에는 아직 일렀던 것인가!
루하다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전령이 간신히 물어온 정보를 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앞서 물어온 정보는 페이니가 사전에 알고 있었단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지금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루하다의 판단은 정확했다. 만일 그가 미로나 원정군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언급했다면 그를 의심하거나 경계했을 것이다. 다행히 뮬러 7세에게 루하다는 블랙 남작의 또 다른 비밀병기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우선 남은 인원들을 추슬러라. 왕성 수비란 명목으로 병력을 모은 뒤 추후 원정군과 연락이 닿았을 때 행동을 개시하지. 현 수비 쪽 에틸가의 검은 누구인가?”
“본래 벨리오 공작이 맡은 것을 마르판 후작에게 이어받기로 되어있었습니다만……”
“마르판 후작까지 당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는 무사합니다. 다만 패닉에 빠져서……”
“쯧…… 남은 이들의 상태 전부 그런 것이냐?”
“대부분 그렇습니다. 아, 페멜로 백작과 시미어 백작은 멀쩡합니다. 오히려 병력을 통제하여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한 쪽은 왕당파, 한 쪽은 귀족파였다. 다만 능력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시미어 백작에게 검을 계승시켜라.”
“예? 하오나 그는……”
“지금 같은 상황이니 그런 것이다.”
릴본 자작은 잠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명령이니 받아들였다. 직후 시미어 백작은 자신에게 검이 계승되었단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됐다. 그리고 묘한 얼굴로 왕가의 인장을 내려다보다 병사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소식을 기다리는 것 뿐인가.”
*
황금늑대.
키런 왕국의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강직한 기사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검은 병사들을 상대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의 인원에서 무려 4분의 1이 출정한 상태! 그리고 그들 중 반 정도가 원정군을 추스르고 잠시 물러난 상태였다.
나머지 반은 골드로츠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 이유는 공대장을 통해 들은 소식 때문이었다.
“키런의 왕이 납치당했다는 군.”
키메라를 쓰러뜨리고 쉬고 있던 황금늑대의 기사들이 반발했다. 키런의 왕 바틸카스가 어떤 인물이던가! 그저 통치를 잘 하는 왕이 아닌 뛰어난 전투 실력도 고루 갖춘 왕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나머지 황금늑대들이 있었다.
그런데 납치라니? 하지만 공대장이 동봉 받은 스크린샷을 보여주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왕께서 납치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이 한탄하고 있을 때 공대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격한 녀석들의 모습을 보아 하니 그 검붉은 갑옷의 녀석들과 같은 놈들이다. 그러니 미로 안쪽으로 납치해왔을 가능성이 있어.”
공대장은 골드로츠와 황금늑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쩔 텐가?”
그들의 대답은 당연히 진격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원정군을 돌볼 사람도 필요했기에 원정 나온 황금늑대 일부는 떨어져나갔고 지금의 구성원이 만들어졌다.
“자네의 용기는 높이 사겠네.”
황금늑대 기사 중 하나가 골드로츠에게 말을 붙였다. 갑자기 미로의 함정과 키메라가 나타나지 않으니 여유가 생긴 듯 보였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골드로츠는 당황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 자네가 쓰러진 다음에 그 뒤를 이어가려 했네. 하지만 막상 나서려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
골드로츠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금늑대 기사들 중 제법 상위권의 실력을 가진 자였다.
그의 솔직한 발언에 골드로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역시 두려웠습니다. 저는 그저 폐하에 대한 충성심과 젊은 치기로 극복했을 뿐입니다.”
“이모탈도 죽음이 두렵던가?”
“두렵습니다. 한 번의 죽음으로 잃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시 살아나지 않던가?”
“무력한 복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면에 드는 게 나을 정도지요. 만일 선배님께서 다시 살아났을 때 갓난 아기가 되면 어떠시겠습니까?”
“푸흐흐, 젊어지는 거니 좋겠지.”
기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살아 돌아간다면 자네를 추천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골드로츠가 어느 정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인간들.”
두려운 왕 셀기디어 헬디스. 그는 비율 좋은 거구를 내보이며 찐득한 마기를 뿌려댔다.
한 눈에 보기에도 강대해보이는 모습에 공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거물인 걸.”
공대장은 단창 하나를 뽑아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참…… 지금 죽으면 템 복구 상당히 힘들어지는데 말이지.”
“그대는……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도마뱀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말이야.”
골드로츠와 황금늑대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공대장이 창을 뻗으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좀 더 뒤로 가서 좌측으로 빠져 그런 다음 쭉 나아가다 보면 안쪽으로 갈 수 있을 거다.”
“예? 하지만 당신은 어쩌려고……”
공대장은 피식 웃으며 돌아보았다.
“복수전.”
“……복수?”
골드로츠는 이해 못할 얼굴로 되물었고 공대장은 말없이 셀기디어를 노려보았다.
“가라고, 어서. 너희의 왕을 구해야지?”
골드로츠는 주춤거리다 뒤로 물러났다. 황금늑대 기사들도 눈치를 살피다 물러섰다. 그제야 셀기디어가 입을 열었다.
“미로의 구조를 꿰고 있다라…… 네놈, 정체가 뭐냐?”
“나?”
공대장은 씩 웃더니 단창을 겨누었다.
“이 미로를 기획한 놈.”
*
셀기디어가 공대장과 만난 것처럼 미로 곳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볼품없는 녀석이로군.”
라이는 자신의 마법을 받아치는 덩치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을 우르간드라 소개한 이 남자는 괴랄한 마법 저항력을 자랑했다. 라이의 마법이 그렇게 약하지 않은 데도 정면에서 마법을 맞고도 멀쩡히 서있었다.
“카하학! 좀 더 놀아보자고!”
라이는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우르간드는 2m도 안 되는 신장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대단했다. 마치 거인과 싸움을 하는 느낌이었다.
“젠장! 다들 뒤로 물러서!”
라이는 그렇게 소리치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뻗어진 두 손에서는 강렬한 불꽃이 뿜어졌고, 우르간드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불길을 빨아들였다.
“뭐……?”
“푸하악!!”
우르간드가 숨을 내뱉자 라이가 쏘아낸 불이 그대로 흩뿌려졌다. 그레노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불길에 휩쓸렸다. 방어하기 급급한 그들을 보며 라이는 머리가 빙빙 돌았다.
‘마법을 삼키고 다시 뱉어내? 이런 놈이 있었나?’
이따금 마법을 튕겨내거나 무효화하는 녀석들은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라이의 두 눈이 녀석의 몸을 쭉 훑었다.
‘힘 수치와 저항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그 대신 다른 수치는 규격 이하. 방금 상대했던 검붉은 흡혈귀랑 큰 차이가 없어.’
아이템 코드조차 식별할 수 있는 라이의 눈은 우르간드를 분석했다. 하지만 그런 라이조차 드러커스의 미로를 구성하는 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건축물이 분명한데 어째서 생명 반응이 있는 거지? 게다가 이 무식한 방어력은 뭐야……? 메일드로우의 벽과 같은 건줄 알았더니 별개의 물질이잖아……?’
라이는 깡총거리며 우르간드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우르간드는 강화 마법이 더해져 잽싸진 라이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는 마법이 거의 먹히지 않았지만 반대로 라이를 잡을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우르간드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치기 마련이지!’
우르간드는 이를 악물더니 라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라이는 옆으로 피하려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인지했다.
‘미친!’
그의 뒤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라이는 그걸 보자마자 방어막을 펼쳤다. 미리 준비한 주문도 아닌 다급하게 전개한 방어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두께였다.
콰작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작정하고 방어를 했더라면 모를까 어정쩡한 방어는 우르간드에게 기회를 줄 뿐이었다.
“잡았다!”
우르간드는 주먹으로 방어막을 짓누르더니 박살내버렸다. 라이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주먹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뻑!!
라이가 코피를 뿌리며 뒤로 날았다. 우르간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가는 라이를 보며 달려갔다.
“이런! 막아!”
다른 마법사들이 다급히 공격 마법을 시전 했지만 우르간드에게는 상처조차 주지 못했다.
“카하하하!!”
우르간드는 풀쩍 뛰어오르더니 깍지 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라이의 몸을 내리쳤다.
쾅!
직선으로 날아간 라이는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그러나 우르간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펑
우르간드는 허공에서 땅으로 도약했다. 모두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아무 디딜 것도 없는 곳에서 다리를 쭉 피더니 라이와 비슷한 속도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작!
가속도가 붙은 우르간드의 내려찍기! 바닥에 박힌 라이의 몸에 정확히 꽂혔고, 라이는 눈을 까뒤집으며 피를 토해냈다.
“쯧. 귀찮게 앵앵거리더니.”
우르간드는 혀를 차며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어디, 이 녀석 말고 건질 놈은 없나……”
“피, 피해라!!”
한 마법사의 외침에 모두가 마법을 쏘며 달아났다. 우르간드는 그들의 마법을 대충 얻어맞으며 사람들을 살폈다.
쾅!
그때 우르간드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우르간드는 고개를 삐걱 돌렸다.
“피하거라.”
“부탑주님!!”
“피하라 했다!!”
그레노는 손을 뻗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번개와 불이 동시에 뿜어지며 우르간드에게 적중했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쏘아지는 번개와 불을 손으로 밀어내며 전진했다.
“제법이야.”
우르간드는 그렇게 전진하다 그레노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지.”
우르간드가 히죽 웃고 있을 때 그의 등에 폭발이 일었다.
“아항?”
“부탑주님을 내려놔라!”
“끄륵……! 피하라 했건만……!”
그레노가 우르간드의 손안에서 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다 이내 실신했고, 우르간드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들쳐멨다.
“자, 그럼…… 이번에는 실수로 안 죽여 버리게 조심해야지.”
우르간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사들의 비명 속에서도 라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
기술자 루번. 그는 미로의 기동이 꺼졌음에도 미로를 확실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미로 내부에 갇힌 다섯 나라의 원정군 전부를 공략하는 일이었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 백 명씩 흩어진 원정군 사이로 루번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났다.
“헉?!”
병사 하나가 놀라 검을 휘둘렀지만 루번은 꿈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루번의 모습을 본딴 미로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루번의 분신들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는 위대한 엠파이어 일족의 땅을 침범했다. 그 대가로 네놈들 전부 우리의 자원으로 쓸 것이다.”
“미친……!”
“헛소리 하지 마라!”
당연히 원정군은 저항했다. 특히 키런 왕국의 병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련하군.”
루번의 분신들은 똑같은 목소리로 탄식했다. 분신은 삐걱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제각기 다른 무기를 들어 원정군을 공격했다. 미로의 일부라고는 하나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약화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원정군들에게는 큰 위해를 끼쳤다.
“아아악!”
분신체 하나하나의 힘은 노스페라투 기사보다 약했지만 검은 병사보다 강했다. 그래서 강한 이들이 없는 곳은 몇 분도 안 되어서 전멸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버티는 곳도 루번의 분신을 막기에 급급했다.
‘이 무슨 괴랄한……!’
중앙군의 군단장을 맡게 된 에뉴다 백작은 당황했다. 그 이유는 루번의 분신체 때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앞으로 가서 나서서는……”
블랙 남작, 그녀가 불만스레 말했고……
“위험에 처한 이가 있지 않나. 그러니 나설 뿐이다.”
호랑이 장식이 된 검은 중갑의 기사가 분신체의 둔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 사이 블랙 남작의 곁에 있던 늑대 장식이 된 푸른 경갑의 기사가 반투명한 활을 들었다. 그가 활을 꽉 쥐자 백색의 빛으로 물들었고 시위가 만들어졌다.
퓩
어느 누구도 그가 시위를 당기는 걸 보지 못했다. 분신체의 머리와 어깨가 박살나는 걸 보고 나서야 그가 뭘 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뭐, 됐어. 무슨 수작인지만 알면 되는 거니까.”
블랙 남작, 페이니는 부채를 펴며 살랑대며 웃었다. 처음에 에뉴다 백작은 그녀를 생초짜라고 생각했다. 전장에 나서는데 체인메일조차 걸치지 않고 파티용 드레스만 걸쳤다. 심지어 신발은 하이힐! 식사 때도 고급 음식이 아니라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틈틈이 병사들을 지휘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공적에 미친 허접한 지휘관. 그것이 블랙 남작에 대한 총평이었다.
‘저만한 인재가 내 밑으로 온다면……!’
백작은 혀를 날름거리며 탐욕스런 눈길로 다크나이트들을 보았다.
“눈빛 장난 아닌 걸?”
“……저런 놈 밑에 들어가고 싶진 않아.”
페이니의 말에 이디아가 몸을 떨었다.
“그보다 버트는 무사한 거겠지?”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전부 걔만 걱정한다니까. 내 걱정도 좀 해주지.”
“우리를 거의 죽일 뻔했던 게 누군데.”
“흥, 어차피 걔는 우리가 없어도 잘 할 거야. 그러니 우리한테 닥친 일에 먼저 신경 써. 뭐, 그전에…… 우리 1군 사령관을 좀 구워 삶아야겠지?”
페이니의 말대로 버트는 갸우뚱거리며 반토막 난 분신체를 보고 있었다.
“뭐였을까요……?”
“묻지도 않고 부순 건 너다.”
“……죄송해요. 뭔가 함정이 아닐까 싶어서.”
길렌 백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함정의 기동이 멈춰서 안심하던 중 나타난 현상이다. 그녀도 놀랄만 했다고 납득했다.
“됐다. 그보다 이 길이 맞는 건가?”
“아, 네. 뭔가 이끌리는 느낌이라 해야 할지, 이쪽으로 가면 될 거 같아요.”
“……신기해. 네 말은 참으로 설득력이 있어. 그 어떤 근거도 없는데 말이야.”
길렌 백작의 말에 버트는 바보처럼 웃었다.
“그분들은 괜찮을까요……?”
“만일 이곳이 미로라면 조금 헤매겠지만 허무하게 죽을 녀석들은 아니다. 일단 가지.”
“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두 사람의 코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단 둘이서 여기까지 오다니…… 간도 크군.”
전략가 히레이즈. 그는 버트와 백작 두 사람을 마주보며 하얀 장갑을 고쳐 꼈다.
버트는 갸우뚱거리다 백작을 바라보았다.
“같이 싸우실 건가요?”
“……내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역시 너희가 정예였군. 좋다. 혼자서든 둘이서든 전력을 다해 덤벼보아라.”
히레이즈는 히죽 웃으며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사출된 건 하늘거리는 실…… 바위조차 가볍게 갈라버리는 강력한 실은 수 백 개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버트는 그런 히레이즈의 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노스페라투 기사 카르고를 일격에 갈라버렸던 마기의 검을 만들어냈다.
*
“음?”
게르티몽은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쓸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비친 건 버트와 길렌 백작이었다.
“손님이 먼저 올 줄이야.”
게르티몽은 혀를 차며 등을 보였다. 그러자 백작이 검을 꺼내들며 그를 겨누었다.
“네가 이 미로의 주인이냐.”
“왕께서는 잠시 유흥에 나섰다네. 잠시 기다리면 곧 돌아오실 건데…… 가만 어떻게 온 거지?”
“무슨 소리지?”
“혹시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나?”
게르티몽의 질문은 어쩔 수 없었다. 드러커스의 미로는 엠파이어 일족을 감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명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 반응이 지체하는 것으로만 싸움이 결착이 나는지 진행 중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긴 했지만…… 무슨 꿍꿍이지?”
“아니, 아무 것도 아닐세. 그럼 잠시 기다리게. 그 정도 인내심은 있을 테지?”
게르티몽은 운이 좋아서 피해갔단 생각을 하며 차분히 왕을 기다렸다. 졸지에 시간을 죽이게 된 백작과 버트는 말없이 서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뭐야 이것들은?”
우르간드가 여러 명의 마법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
“왕을 알현하러 온 손님이다.”
“푸하하 잘도 다른 녀석들 손아귀에서 도망쳤네. 뭐, 미로가 멈춰있으니 운만 좋다면 도달할 수 있었겠지. 그럼 내가 상대하면 되나?”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왕의 뜻을 알아야겠지. 기다려라.”
“킁 운이 좋은 놈들이군.”
우르간드는 비웃는 얼굴로 백작과 버트를 보았다. 그리고 몇 분이 더 지났다.
“루번.”
루번은 말없이 돌아와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폐하의 손님이랍신다. 건드리지 말래.”
“운이 좋군.”
루번은 우르간드를 힐끔 보았다.
“마법사들은?”
“감옥에 넣어뒀으니 알아서 가져가. 그러는 네 쪽은?”
“도합 1만 정도 지하 밑으로 몰아넣었다.”
“나머지는?”
“죽거나 도망쳤지.”
“어설프구만!”
“네가 했다면 대부분이 도망쳤을 거다.”
“그럼 남은 건 히레이즈인가……”
“내가 놓친 잔당을 치워주겠지.”
그렇게 다시 시간이 지났다. 우르간드의 얼굴에 지루함이 내비칠 때 쯤……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헉…… 헉……”
골드로츠. 그가 지친 얼굴로 이 공간에 들어섰다.
‘희생이 있었다.’
골드로츠 역시 루번의 분신체를 상대하며 황금늑대 기사를 상당수 잃었다.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엄청난 희생이 일어났다. 실제로 죽은 기사도 있었고 누군가는 분신체나 검은 병사들을 상대로 시간벌이를 위해 남았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다른 황금늑대 기사가 골드로츠를 눈여겨본 것과 같은 이유라고 하겠다. 골드로츠의 용기를 확인한 그들은 주저 없이 그를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차례차례 나아가던 중에 본 건 지하로 통하는 길.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다.
“여긴……”
골드로츠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게르티몽 쪽을 보다 버트와 백작을 보았다.
“당신들은……?”
“이거 참, 폐하의 변덕으로 미로를 멈추지만 않았어도……”
“그럼 이것도 기다려야 하나?”
“어쩔 수 없지. 스승,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어.”
어쩌다 보니 골드로츠 역시 셀기디어를 기다리게 됐다. 처참한 그의 모습을 보며 버트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괜찮으세요……?”
“괜찮…… 아, 당신은 그때 칼라 해변에서……”
버트는 눈을 깜빡거리다 감탄사를 냈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옆에 계신 분도……?”
“아, 아니요. 이분은 길렌 백작님이세요.”
“백작……! 본인은 키런 왕국의 기사 골드로츠입니다. 이모탈로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판테스 왕국의 고른 드 길렌 백작이라 하네. 그대도 상당한 수준의 기사인 듯 한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유감이군.”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셀기디어가 나타났다.
“음?”
“공대장……!”
그의 손에는 공대장이 한쪽 팔을 붙잡힌 채 질질 끌리고 있었다. 셀기디어는 버트 일행을 힐끔 보더니 게르티몽을 보았다.
“이것들은?”
“운 좋게 왕성에 도달한 녀석들입니다.”
“그렇군.”
셀기디어는 공대장을 툭 내던졌다.
“가둬두어라. 정신을 차리면 내게 말하고.”
“예.”
루번이 고개를 숙이며 공대장을 끌고 갔고, 셀기디어는 왕좌에 앉았다.
“그래, 무슨 볼 일이냐고 물어도…… 내 땅을 침범한 녀석들이니 목적은 하나겠지.”
그는 나른하게 팔걸이에 턱을 괴며 말했다.
“녀석들을 치료해주어라, 게르티몽.”
“예.”
게르티몽이 짧게 주문을 외우더니 세 사람에게 빛이 뿌려졌다. 세 사람, 특히 골드로츠는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내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다. 힘을 전부 써버린 녀석들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까딱거렸다.
“오너라.”
*
파스스
우르간드의 공격으로 땅에 처박힌 라이의 몸이 들썩였다. 그러다 라이가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흑……!”
라이는 크게 기침하며 자기 몸을 살폈다. 몸속의 장기와 뼈가 전부 짓뭉개졌었지만 되살아났다.
구느하르의 마법 중 하나인 {두 번째 삶}이 제대로 적용한 것이다. 본래 이렇게 살아난 직후에는 모든 힘이 절반으로 감소했지만 라이는 다른 수단이 있었다.
“후우……”
광신교 데마스에서 쓰는 비전 신성 마법, {소생}으로 회복하고 귀르디의 비전인 {저주 회복}을 사용함으로서 {두 번째 삶}의 패널티를 전부 극복하고 회복한다!
“……지랄 맞게 세네.”
라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저항하면서 남긴 마법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야 공략할 맛이 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