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41화 (41/104)

〈 41화 〉 41 ­ 노스페라투 기사단 中

* * *

드러커스의 미로 레이드.

모두의 관심이 이곳에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전 대륙적인 규모로 병사가 일어났던 건 지금까지 손에 꼽았다. 리치 귀르디의 등장이나 기사의 타락 등의 레이드조차 몇 개의 국가만이 나섰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3대 공략 불가 지역 중 한 곳을 노리고 베톰 왕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규합했다.

회의를 해서 힙을 합치는 게 아니라 그저 동시다발적으로 군세를 일으키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플레이어들을 환호시키기에 충분했다.

“좆된다……”

“진짜 판타지아로 영화 한 편 뽑아도 되겠다 싶다니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한 플레이어 시점의 영상이었다. 진군하는 병사들 속에서 난전이 펼쳐지는 전장이 보였다.

몬스터! 그것들은 하나 같이 흉측하게 변이되어 있었다.

판타지아의 몬스터는 어디까지나 동물이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몬스터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특히 사람 손이 여럿 달린 곰이 병사 서넛을 두들겨 패는 모습은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나마 청소년 보호용 모자이크가 있었기에 인터넷에 떠돌 수 있었던 거지 아니면 진즉 규제를 먹었으리라.

몇 만이나 되는 군세가 동시에 메일드로우를 공격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인상적이었다. 병사의 시점이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든 간에 모두의 마음을 불사르기 충분했다.

“듀크가 진짜 맘 먹었나본데? 이런 대규모 이벤트를 또 벌이다니……”

“솔직히 칼라 해변 레이드는 싱겁긴 했어.”

“그거야 라이벨 때문에…… 어, 그러고 보니 살리마 왕국군 쪽에 그 녀석은 없나?”

“그러고보니 블랙 남작은?”

“커뮤니티에서도 얘기가 없어. 그 정도면 한 번은 꼬리가 잡혀야 하는데……”

그렇게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는 버트는……

챙강­

‘검이 너무 약해.’

팔이 4개 달린 두더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람 몸뚱이만한 손을 막기 위해 검을 세웠지만 검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나마 버트였기에 검이 부러지고 끝났지 다른 병사들은 아니었다.

“아악­!”

“뭐야 이 괴물은……!”

몬스터는 판테스 왕국군을 헤집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 수 십 명이 들러붙어도 수 십 명이 휘둘리는 모양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름 훈련된 왕국의 병사들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

그때 푸른비늘 기사단이 나섰다.

“후퇴!”

그들은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몬스터 당 여섯 명의 기사가 붙어서 녀석들을 묶어놓았다.

케에엑­!!

몬스터는 앞발을 휘둘렀지만 기사 셋의 합공에 막혔다. 그 빈틈을 노리고 다른 세 명의 기사가 양옆과 뒤를 노리고 검을 찔렀다. 분명 억센 털과 두꺼운 가죽 때문에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야 정상이거만 그들이 내지른 검은 강했다. 단숨에 몬스터의 근육까지 꿰뚫어서 피를 쏟아냈다.

쿠에엑!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녀석의 몸을 찔렀던 기사들도 뒤로 빠졌다. 앞서 공격을 막았던 세 기사가 배를 동시에 찔렀다. 몬스터는 피를 쏟아내며 발버둥쳤지만 결국 얼마 안가 잠잠해졌다.

“천인장은 각 백인장과 십인장을 통해 피해 상황을 보고 받아라! 아직 미로에 진입하기 전이다! 피해를 최소화해! 수비 진영을 갖춰!”

기사들은 그렇게 얘기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전황이 아니었다.

바로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길렌 백작이었다.

화려한 검술.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에틸가의 검 장식으로 인해 길렌 백작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본디 총사령관에게 주어지는 물건인 만큼 화려하긴 해도 그만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당장 백작의 뒤를 노리는 몬스터의 공격을 반투명한 방어막이 막아주었다. 높은 수준의 방어 마법이 후방의 공격을 차단해주었다. 그리고 검은 더욱 날카롭게 바뀌고 감각은 예리해졌다. 덕분에 길렌 백작은 누구보다 날렵하고 강한 몸짓으로 몬스터를 도륙해나갔다.

“푸른비늘 기사단이여! 나를 따르라!”

“오오오­!!”

최전방에서 벌이는 백작의 싸움은 병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으나 기사단의 활약과 백작의 화려함으로 그들은 승리를 예감했다.

“싸우자! 길렌 백작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와아아­!!”

병사들의 사기 넘치는 진격과 지휘관의 열렬한 지휘로 판테스 왕국군은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비단 판테스 왕국군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원정군 역시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1분대는 물러나라!”

골드로츠. 최초의 귀족 작위를 얻을 뻔했던 그가 최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키런 왕국군은 대부분 검밖에 쓸 줄 몰랐기에 진격하는 속도가 늦었다. 하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지휘 체계와 강인한 병사들이 있었다.

기사의 나라! 그 이름값을 하듯 일개 병사들조차 웬만한 플레이어를 능가하는 실력을 선보였다. 그래서 판테스 왕국군과 비슷한 수였지만 사상자의 수는 압도적으로 적었다.

골드로츠는 그곳에서 검을 치켜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작위를 쟁취한다! 그 생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

“조잡하게 뒤섞인 키메라가 아니다. ‘켈베로스’ 때처럼 엄연히 하나의 개체가 되었다.”

11성 마법사이자 마법사의 탑의 부주인 그레노는 턱을 문질렀다. 지금 그는 상공에서 가만히 쏟아지는 몬스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드러커스의 미로에는 우리도 모를 미지의 기술이 있다!’

켈베로스에게 희생된 마법사의 복수. 그건 명분일 뿐이었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원한 건 그걸 만들어낸 미로의 기술이었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메일드로우의 외벽만 연구해도 마탑의 가치는 크게 오를 수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모종의 이유로 반파된 지상의 전투 마을. 흡혈귀들이 다급하게 수리 중인 지금이 기회였다.

“대마법을 준비하라.”

그레노의 손짓에 특별히 엄선한 10성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뿜어내는 마나가 마법 술식을 이뤄내고 빛을 만들어냈다.

“준비 됐습니다!”

10여 분에 다다른 마법진 제작 끝에 마법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레노는 그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법진에서 뿜어진 힘 때문에 그의 손이 떨렸다. 그레노는 다른 손으로 팔을 잡으며 집중했다.

“튀어오르는 불꽃…… 서서히 피어나는 폭발의 꽃이여…… 대지를 녹이고 대기를 삼켜라. 이 땅에 내려앉아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어라.”

그레노의 주문과 함께 살리마 왕국군의 진영이 요동쳤다. 실상 1만도 안 되는 왕국군은 주력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적은 마탑의 마법사들이야말로 이 진영의 주였다. 그들이 큰맘 먹고 벌이는 마법이니 결코 약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봐도 살이 떨리는 군.’

총사령관으로 파견된 말트 공작은 씁쓸한 얼굴로 그레노를 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역할은 마법사들의 시간 벌어주기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이 막고 있었으니, 그냥 병풍이나 다름없었다.

자존심은 상하나 이것이 최고의 효율이다. 지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고 선택했어도 가슴은 갑갑했다.

‘부럽구나.’

키런 왕국처럼 옥죄는 곳이 부러운 게 아니었다. 당연히 로이첸 왕국이나 스카이 왕국처럼 약소국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에게 밀리되 어느 정도 존중을 받는 걸 원할 뿐이었다.

‘판테스 왕국……’

말트 공작은 저 멀리 전투 중인 판테스 왕국군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 일에 집중해야 한다.’

화륵­

공작은 시선을 돌려 그레노를 보았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과 함께 거대한 불의 구름이 일어났다.

“불 거인의 땅(Muspelheim).”

구름은 찐득한 움직임을 보이며 서서히 메일드로우를 향해 날아갔다. 말트 공작은 옆에 내려서는 그레노를 보며 물었다.

“저 마법은 무엇입니까?”

“10성 마법은 평범한 이가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한계치지요. 현재까지 알려진 마법은 12성까지 존재합니다.”

“허면 저것이 12성 마법입니까?”

그레노는 고개를 저었다.

“11성 마법, 대마법이라고도 불리는 불 거인의 땅. 세간에 떠도는 올 클래스 매지션이 선보인 ‘르뤼에’나 ‘라그나로크’와 같은 마법입니다. 아마 눈에 보이는 땅의 반 이상은 용암이 되고 숨만 쉬어도 폐가 타버리는 고온의 지형이 될 것입니다. 덤으로 불의 비도 내리겠지요.”

“엄청나군요.”

공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 마법이면 몇 천의 군세가 잡아먹힐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도시 하나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지도 몰랐다.

이것이 마법사의 힘……! 절로 입이 벌려질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이러니 전 대륙에서 마법사를 규제하려고 난리겠지. 허면 이런 마법을 난사하는 드래곤이란 존재는 얼마나 강한 것인가……!

“다른 곳에서도 무난하게 대처 중이군요.”

“키런 왕국군은 완전히 반대편이라 보이지 않지만 판테스 왕국군의 움직임이 흐트러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큰 문제가 없는 듯 합니다.”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는 수 십 년 동안 버텨온 괴물 같은 곳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비상시에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그레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법사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무적인 건 아닙니다. 당연히 공작 각하의 병사들의 보호가 필요할 때가 올 것입니다. 공작 각하와 병사들이 없다면 저희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 말이지요.”

어찌 들으면 화살받이나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것처럼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살리마 왕국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공작의 열등감이나 마법사가 아닌 이들에 대한 대우를 알고 있었다.

이건…… 그의 배려이자 독려였다.

“……물론입니다, 부탑주.”

“험험…… 그럼 다음 마법을 준비하…… 음?”

그레노는 갑자기 우뚝 멈춰서 메일드로우 쪽을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있다.

결코 그의 눈이 침침하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 그 광경을 본 그레노는 털이 쭈뼛 섰다.

“위험하군요.”

“네?”

“전투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레노처럼 다른 곳에서도 위기를 감지했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이모탈들은 잡몹 처리가 끝나고 중간보스…… 혹은 2페이즈 전투에 돌입했단 걸 깨달았다.

각 왕국군의 눈앞에는 시꺼먼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피처럼 붉은 말을 타고서 해골을 꿰뚫은 장창을 쥐고 있었다. 세 왕국군의 앞으로 각각 5백에 달하는 검은 병사들 사이로 깃발이 솟구쳤다.

난생 처음 보는 문양. 그건 어떤 나라의 깃발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저 문양은……?’

그는 한 때 드러커스의 미로 공략에 나선 경력이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것도 수많은 지역을 제패한 랭커와 함께 했던 플레이어였다. 그는 여전히 남은 미련을 풀기 위해 이번 전투에 합류했다.

그랬기에 검은 병사들이 든 깃발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문지기가 착용하고 있던 갑주에 그려진 문양……!’

그가 이렇게 질색하는 이유는 문지기의 강력함 때문이었다. 모든 길드원이 꼬박 하루 동안 공격하고 나서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괴물……! 악몽의 성을 지키고 있는 커프스 골렘처럼 크고 강력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지성이 있었다.

강한 마법이 준비된다 싶으면 공격을 해왔고, 속임수를 쓰더라도 잘 속지 않았다. 심지어 연계 공격을 끊기도 하고 역으로 속임수를 보이기도 했다.

강한 주제에 그런 식으로 잔머리까지 굴리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문지기를 쓰러뜨리고 문에 도달했지만 열쇠는 가짜였다. 가짜 조각이 하나 섞여서 문은 열리지 않고 열쇠는 폭발해버렸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열쇠 조각처럼…… 그들 역시 흩어지게 됐다.

‘괜찮아. 벌써부터 정예가 미리 나올 리가 없잖아. 다만, 그 문지기와 연관되어 있는 건 분명한 사실……! 조심하라고 일러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나쁜 기분을 지우려 했다.

그리고……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

“이게…… 대체……”

메일드로우에서 쏟아진 몬스터들은 어느 정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진하려던 순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검은 군대…… 당연히 그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었고, 수도 훨씬 적었기에 안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얼마 안가 무너지고 말았다.

콰가각!

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검은 병사 하나하나가 가진 힘은 방금까지 상대한 몬스터들을 웃돌았다. 원정군의 정예병이 상대를 해도 힘겨운 마당에 일반 병사들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아아악­!”

“살려줘!”

“흐아악!!”

검은 병사들이 내지른 창에 병사 서넛이 꿰뚫렸다. 그러더니 그대로 위로 치켜세워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병사들을 꿰뚫었다.

정신나간 근력……! 그들은 괴랄한 힘을 내세우며 전진해왔다. 병사들만 강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 역시 강했다. 말이 내지른 발굽에 병사의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거나 짓이겨졌다. 어쩔 때는 입으로 병사를 물어뜯기도 했다.

그야말로 참극! 10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에 원정군이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누가 르와이스의 검을 받겠나.”

검붉은 갑옷. 그건 검은 병사들이 입은 것보다 더 끈적하고 음침해보였다. 게다가 그가 내뿜는 요사스러운 기운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핏빛 운무와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병사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나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뻔했다. 당장 지휘관들도 겁에 질린 판국에 어느 누가 나설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나 위대한 대 키런 왕국의 기사, 골드로츠가 상대하지.”

키런 왕국군과 대치중인 르와이스의 앞으로 골드로츠가 나섰다. 이곳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도 용감하게 붉은 갑주의 맹장과 싸우기를 자처하며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판테스 왕국의 길렌 백작이다.”

“귀르디의 의지를 이어받는 자들 중 하나인 그레노라 한다네.”

길렌 백작과 그레노의 앞에는 어떤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덩치, 천옷만 걸친 남자가 서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대며 한 발 앞으로 나섰고……

전투가 시작됐다.

*

쾅­!!

르와이스와 골드로츠의 격돌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한 번 검을 부딪쳤을 뿐인데 주변에 퍼지는 파장 때문에 키런 왕국의 병사들이 나동그라졌기 때문이었다.

“제법이군.”

“그쪽도.”

두 사람은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다시 한 번 검을 맞부딪쳤다.

쾅!!

힘과 힘의 대결! 막상막하처럼 보였지만 땅바닥을 보면 누가 우세한지 알 수 있었다.

‘밀린다.’

골드로츠는 바닥에 밀린 흙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르와이스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건만 골드로츠 자신은 발자국이 길게 남아있었다.

‘대단한 힘이다…… 하지만……’

골드로츠는 검을 뒤로 뺀 뒤에 빠르게 내질렀다.

{빛뚫기}

거의 비전이나 다름없는 비장의 기술!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필살기이자 최후의 수단이었다.

골드로츠가 가진 힘에 스피드가 더해지면서 순간적으로 강한 공격을 가한다!

르와이스가 강하긴 했으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단 걸 알고 한순간에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르와이스는 골드로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다급히 몸을 틀었지만 옆구리 일부가 크게 꿰뚫렸다.

“큿……”

르와이스는 상상치도 못한 공격에 놀랐고 골드로츠는 이 일격으로 끝내지 못해 당황했다.

주춤거린 두 사람은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

‘강하다. 그러나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놓쳤어. 하지만 피해를 입었으니 지장이 생길 거다.’

둘의 검은 다시 한 번 부딪쳤다. 곧이어 폭풍이 분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전투가 시작됐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대치! 변수조차 없는 공격 일직선! 방어를 염두에 두지 않는 무모한 일격들!

방어나 회피는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서로가 서로의 급소만을 노렸다. 공격으로 공격을 상쇄하지 못하면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

키런 왕국군은 이런 둘의 전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골드로츠와 르와이스 둘 다 엄청 강하다는 것.

그리고 둘의 승패에 따라 서로의 군세의 사기가 판이하게 바뀔 거라는 것.

실제로 골드로츠가 밀린다 싶으면 키런 왕국군이 움츠러들었고 르와이스가 밀린다 싶으면 검은 병사들 측이 움츠러들었다. 그랬기에 둘에게 전투의 중압감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여기서 패배하면 그들에게 남는 건 없었다.

‘두려운 왕에게 영광을.’

‘블랙 남작을 꺾고 귀족이 된다!’

다른 곳에서의 전투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저마다 강하다고 알려진 이들이 나선만큼 붉은 갑옷의 인물들 역시 쉽게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그대가 내 마법을 지웠나?”

“그렇다.”

그레노의 질문에 자신을 메르다라고 소개한 검붉은 천옷의 남자가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지극히 평온했지만 그 주변은 초토화가 되었다.

“날뛰는 벼락.”

“붉은 가시밭.”

그들의 손짓과 동시에 시전된 마법……! 땅에는 거대한 벼락이 용틀임을 하고 수 백 개의 붉은 가시가 솟구치며 모든 걸 꿰뚫었다.

덕분에 살리마 왕국군과 검은 병사들의 싸움은 이들의 마법에 휩쓸리며 피해를 입었다. 한창 싸우다가 그레노와 메르다의 마법을 피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운찬 노인네구만!”

그를 따라온 플레이어 마법사 중 하나인 마끼야또는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확산형 레이저.”

미리 외워둔 주문을 따라 그의 손에서 광선이 뿜어졌다. 확실히 그의 마법은 강했다. 9성 마법사이고 플래시 슈터라는 이명으로 불릴 만큼 빛과 번개 마법에 능통했다.

하지만 검은 병사들은 이 마법을 정면에 맞고 단 한 명도 쓰러지지 않았다. 제법 강한 마법이었지만 그들을 물리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개중에는 마끼야또의 마법을 쳐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익……!”

마끼야또는 자존심이 상해 전력으로 마법을 발휘했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끽해야 한 둘의 검은 병사를 쓰러뜨리고 끝났다. 나름 고위 마법사라 불리는 마끼야또가 이랬으니 다른 마법사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히려 그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하지 않았다.

“커흑……!”

“씨발! 파르쿠!”

“도망쳐, 라인!”

“모두 뒤로 물러나! 정면에서 대치하면 안 돼!”

검은 병사들은 마법을 창으로 훑어내거나 갑옷으로 받아내며 돌진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에도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을 쏘는 동안 거리를 좁힌 병사들의 반격에 죽어나갈 뿐이었다.

“마법사들을 지켜라!”

“최선을 다해 막아!!”

살리마 왕국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마법사들의 앞에 나섰다. 마법사들은 그런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근차근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열세였다. 부디 자신들의 지휘관이 이기길 빌 수밖에…….

*

투칵­

카르고. 길렌 백작이 상대하는 붉은 갑주의 사내는 덩치가 상당했다. 그리고 그 큰 몸뚱이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백작을 압박해갔다. 그가 뻗은 주먹을 분명 막았는데도 기압이 몰아치면서 백작의 피부를 두드렸다.

“막고 피하는 것 하나는 잘 하는구나!”

카르고는 호탕하게 소리치며 주먹을 내질렀다. 백작은 침착하게 그가 내지른 주먹을 검으로 쳐내면서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그렇게 갑옷의 빈틈을 찌르려 할 때 카르고의 몸이 뒤로 훅 넘어갔다. 동시에 그의 발이 솟구치면서 백작의 턱을 노렸다.

츳­

카르고의 뒤꿈치가 백작의 턱을 스쳤다. 백작이 급하게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한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다. 그러나 그 한 번 스친 것으로 백작에게 타격이 들어갔다.

‘뇌가 울린다.’

적지 않은 충격……! 고작 턱이 스쳤을 뿐인데 머리가 어질거렸다. 뇌진탕이 온 것이다.

그 틈에 카르고가 몸을 홱 틀더니 차올리지 않았던 반대쪽 다리를 휘둘렀다. 불안한 자세에서 급하게 벌인 공격! 그렇다고 공격이 약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카르고의 타고난 근력 덕분이었다.

백작의 옆구리를 노리고 다리가 휘둘러졌고 백작은 띵한 머리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어쭈?’

회피 동작 이후 연계된 두 번의 공격. 그것들은 전부 카르고가 의도한 것이었다. 완전히 명중하진 않더라도 상대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당연히 백작의 뇌진탕 역시 계산된 결과였다.

그런데 상대는 어지러운 와중에 자신의 공격을 정확하게 피해냈다. 공격이 들어오는 걸 인지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복잡하게 꼬인 감각으로 피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말도 안 되는 반응이었다.

‘예측했군.’

백작은 실전 경험이 많았다. 검과 검의 대결만이 아니라 검이 아닌 것과의 대결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 중에는 카르고처럼 무투파도 있었고 덩치로 밀어붙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뇌진탕이 걸리기 이전의 상황을 토대로 추측하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샤악­

카각­

백작은 그냥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휘둘렀던 검을 그대로 올려치며 카르고의 다리를 노렸다. 그렇게 휘둘러진 검은 다리를 감싼 갑주를 긁으며 튕겨졌다. 카르고는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두 손으로 땅을 쳐냈다.

쐐액­

그냥 두 손으로 땅을 힘껏 밀어낸 것뿐인데 카르고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백작은 다시 정신을 차렸으나 피하는 게 늦었다.

퍽­

카르고의 발에 얻어맞은 백작은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크훅……!”

백작의 힘과 경험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실제로 랭커 중에서도 백작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의 경험의 한계가 있었으니…… 바로 카르고처럼 상식을 초월한 힘을 가진 이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방금 날아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괴물이군.’

백작은 빠르게 검을 세웠다. 튕겨진 반동으로 물러났던 카르고 다시 한 번 날아들어서였다.

챠앙!

맑은 금속음과 함께 카르고의 주먹과 백작의 검이 대치했다. 카르고는 백작이 조금도 밀리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적당히 놀아선 안 될 놈이야.”

카르고는 히죽 웃더니 투구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창백한 회색 피부와 툭 튀어나온 송곳니, 검은 눈자위를 가진 흡혈귀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두려운 왕으로부터 힘을 수여받았다. 그저 그런 엠파이어가 아니란 말이지.”

“엠파이어……? 뱀파이어가 아니라?”

카가각­

카르고에게서 검붉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의 공격을 버티고 있던 백작의 몸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지상은 우리가 접수해야겠어.”

퍽­

카르고의 한 마디가 끝나고 백작의 몸이 뒤로 쭉 날아갔다. 카르고의 발길질이 백작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작렬한 것이다.

콰당탕­

그렇게 바닥을 구르는 백작의 뒤로 카르고가 나타나 그대로 가슴을 내리찍었다.

퍽!

“커헉!”

백작은 땅에 반쯤 처박혀서 피를 게워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검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거슬렸는지 카르고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하여간 르와이스도 그렇고, 검을 쥐는 것들 생각은 도통 모르겠다니까.”

카르고는 발을 쭉 들어올렸다.

“일단 팔 하나.”

백작은 힘없이 카르고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있는 힘껏 내리치면 팔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강하다.’

이대로 자신이 죽으면 다음은 왕국군이었다. 카르고는 강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검은 병사들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손에…… 힘이……’

백작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며 검을 놓치려했다. 그와 동시에 카르고의 발이 백작의 팔을 내리찍었다.

콱!

“엉?”

아프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카르고의 얼빠진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백작은 눈이 흐릿한 와중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보았다.

“넌……”

“구하러 왔어요.”

버트는 해맑게 웃으며 카르고의 발을 밀어냈다. 카르고는 뒤로 기우뚱 넘어가나 싶더니 그대로 상체를 틀어 옆차기를 날렸다.

퍽!

“어­?”

카르고의 회심의 일격! 그건 버트의 서투른 방어 자세에 막혀버렸다.

버트는 뒤로 날아가지도 않고 밀리지도 않았다.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서 카르고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무슨……”

백작은 놀란 눈으로 버트를 쳐다보았다. 카르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그의 공격을 이토록 쉽게 받아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체 넌 뭐하는 년이냐.”

“버트.”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마기로 검을 만들어냈다. 뭔가 말을 이어나갈 타이밍인 거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음…… 그냥 버트야.”

서걱­

버트는 검을 휘두른 뒤의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 새?

길렌 백작은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걸 놓칠 정도로 쇠약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건 시뻘건 피의 분수. 카르고는 놀란 얼굴로 자기 몸에서 뿜어지는 피를 보고 있었다.

“크학!?”

카르고가 상처를 감싸 쥐며 뒤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그가 뿜어낸 피를 버트가 고스란히 맞게 되었다.

피범벅이 된 버트는 길렌 백작을 보며 방긋 웃었다. 피에 젖어 섬뜩해야하건만 백작에게 그 미소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윽고 버트의 눈에 백작의 상태 이상이 보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