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2 11 / 친애하는 내 친구 카르티에게 (1)
* * *
(1)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
이 도시에 와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고, 죽을 뻔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라오후와 길드 간의 알력다툼에 말려들기도 하고, 식물인간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드래곤에게 노려지기도 하고. 정말 생각해보면 용케 살아남았다 싶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모든 게 잘 풀렸다.
일단 가장 큰 근심거리도 어떻게든 해결 국면에 들어갔고.
키에리.
한결 편안한 안색으로 잠들어있는 그녀의 손을 페리링이 꼭 잡고 있었다.
“키에리의 상태는 좀 어때?”
“독은 전부 빠져나갔어요. 다만… 그 과정에서 체력을 많이 쓴지라 지금은 좀 쉬어야 해요. 의식을 차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발단은 이 녀석과 1년만에 만난 일이었지.
레짐에서 같이 창녀 노릇을 하던 친구, 키에리가 웬 도적단에 몸을 두고 있었던 건 다소 놀랐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키에리가 정신을 잃은 것에서부터 출발했고.
그래도 평온한 얼굴로 잠든 키에리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에 힘을 풀었다. 페리링도… 키에리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을 텐데.
페리링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품에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페리링은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내 가슴에 뺨을 부비면서 아양을 부렸다.
“늑대 새끼들은 내가 데려다주고 온 참이야. 정령왕과의 계약을 나몰라라 했다간 무슨 보복을 당할지 알 수가 없기도 하고.”
키르케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행 준비 만만. 이제 이 녀석도 떠날 때가 되었지.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키르케.”
“흥, 그냥 도와준 거 아니니까 나중에 어떻게 갚을지 생각이나 해둬.”
헤카이트 당주는 벌써 떠났다고 했다. 매정한 스승님이다.
“페리링, 넌 어떻게 할 거야?”
“저도 오늘 중에 왕도로 돌아가야 해요. 스승님… 술라 님께서 일을 마치는대로 돌아오라고 하셔서요. 아, 얘기하실 거면 저는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페리링도 왕도로 돌아가는 건가. 섭섭하다.
그런 얼굴로 봐버렸는지, 페리링은 곤혹스러운 듯이 웃다가 방을 나섰다.
“페리링도 가버리는 건가아… 으, 쓸쓸해지겠어.”
베어링턴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제 갈 길로 떠나간다. 어딘지… 섭섭한 기분을 느꼈다. 다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때가 오긴 할는지… 뭐, 이번처럼 난리통에 모이는 건 사양하고 싶지만.
하지만…
키에리가 깨어나는 걸 누구보다 기다렸을 꼬마 도령 토마스의 모습은 그날 이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래핑 크로우 유적단이 라오후의 거점인 ‘이주’를 뒤진 날, 소년 토마스도 함께 사라졌다는 소식은 꽤 충격적이었지.
“저 하프엘프만이 아니라고.”
래핑 크로우 유적단의 단장 잭 씨가 한동안 토마스를 분주하게 찾아다닌 모양이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고.
“나도 오늘 중으로 여길 뜰 거야. 왕도에서 하다 남은 일들이 좀 있었거든… 넌 어떻게 할 거야? 이 고생을 했으면 슬슬 학회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아?”
솔직히 조금… 고민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여행을 다니고 싶은 생각이다. 게다가 아직 알브레히트는 어떤 동네인지 구경도 못 했다고.
“그래도 일단 목적지는 찍고 돌아가야 하잖아.”
“그 깡촌에 대체 볼 게 뭐가 있다고.”
“가 봐야 알지. 설마 여기에서보다 더 고생하기야 하겠어?”
장담하건대, 향후 1년간 할 고생은 베어링턴에서 다 했다.
이제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느긋하게 쉰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할 거라고.
키르케는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손을 흔들며 문으로 향하다, 누군가와 마주쳐서 걸음을 세웠다.
흐응, 하고 추임새를 곁들이며 흥미롭다는 눈으로 키르케가 마주친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쪽하고도 또 볼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글쎄, 모를 일이지.”
키르케는 은근히 카르티를 마음에 들어하는 모양이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카르티에게 뭔가 제안을 한 모양이지만, 무슨 제안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궁금하게시리. 카르티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는 키르케를 지나쳤다.
“좋은 답변 기다릴게.”
“아, 좀 보채지 말라니까.”
…카르티는 질색하는 모양이다.
대체 뭔 기류가 둘 사이에 오가는 건지. 키르케는 그대로 방을 나섰고, 카르티는 키르케가 앉아있던 의자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몸은 좀 어때?”
“슬슬 괜찮아졌어…. 너도 같이 험한 꼴 봤잖아. 넌 좀 어때?”
“나야 몸이 재산 아니냐.”
카르티는 평소처럼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조금 안심했다. 한때는 다시는 이런 별것 아닌 시간이 돌아오지 못할 것까지도 각오했었는데, 그 각오가 바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키르케 그 바보랑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그거… 동문 아니냐? 바보라니.”
굳이 말하자면 동문의 선배지만, 나나 걔나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니다보니.
카르티는 조금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바닥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냥 좀…. 별 거 아냐.”
카르티답지 않다. 얼버무리려 들다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입 안에서 말을 골랐다.
재미있어 보이니까 추궁한다.
“뭔데. 둘이 대체 내가 모르는 무슨 꿍꿍이를 꾸몄어?”
일단 심리적인 수단.
말로 구슬린다. 거기에 옆구리를 한번 쿡, 찌르는 물리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니, 카르티가 도끼눈을 했다.
“야, 하지 마, 하지 마.”
“얼른 말이나 해, 그럼.”
뺨을 긁적이던 손이 머리로 간다.
더더욱 말하기 싫어진 모양이지만, 결국 카르티는 두 손을 들었다.
그녀의 실토는 어떤 내용이려나.
“그냥 날 좀 고용하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그냥 그것뿐이야.”
“…겨우 그것뿐이라고? 그런 걸 뭘 그렇게 뜸을 들였어?”
조건이 괜찮으면 고용되는 건 용병의 당연한 생리인데.
도끼눈을 뜬 그대로 이쪽을 바라보는 카르티와 시선을 맞추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녀석, 오늘따라 어쩐지 말을 아끼고 있다.
“로즈 넌 진짜 귀찮은 년이야.”
갑자기 또 뭔 소리래.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카르티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천장을 하릴없이 올려다보았다.
“실은 열나게 고민 중이라고. 센 영감도 오늘내일 중에 여길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간다고 그러고 있고. 난 아직 아무 것도 결정 못 했는데.”
“…음….”
요컨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 갈피를 못 잡고 있단 얘긴가?
나와 같이 알브레히트에 가든, 센을 따라 가든, 키르케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어느 쪽을 택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뭐, 나와 같이 다니면서 죽을 뻔한 일도 두어 번 있었고 귀찮은 일은 엄청나게 많이 있었지. 카르티가 동행해주면 마음 든든하지만 그렇다고 고용한 것도 아닌데 날 따라와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열라 고민돼, 지금.”
침대에 머리를 푹 묻고는 읊조린다. 오늘따라 하는 행동이 퍽 귀여워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눈가만 빼꼼히 보인 카르티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조금 놀란 토끼눈을 했다가, 그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로즈, 사실 나 말야….”
눈가만 빼고 얼굴의 반을 침대에 묻고 있었던 터라, 카르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녀는 이 순간에도 자신이 이 말을 해야 할지 말 그대로 ‘열라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뿐.
“…아냐, 됐다. 그나저나 넌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네 얘기는 정작 못 들었어.”
“일단 나도 베어링턴은 슬슬 지겨워졌거든. 루시탄이랑 얘기 좀 해 보고 어떻게 할지 정하려고.”
“…왕자 나리 말이지….”
카르티는 막막하다는 듯이 꿍얼거리고는 얼굴을 들었다.
뭔가 목에 막히는 떡을 억지로 삼킨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널 따라가겠다고 하면, 방해하는 게 되나?”
불쑥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는데. 뭣보다… 루시탄이랑은 그런 사이가 아직은… 아니다.
그 녀석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만큼, 나도 그 녀석에게 품은 호의만큼이나 의문점이 있기도 하고.
“그런 거 아냐. 네가 같이 와 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카르티는 그런 점에서는 마음이 잘 맞으니까.
루시탄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체 종잡을 수 없다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내 말이 별로 마음에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내일 중에는 다들 뿔뿔이 흩어지는거네. 나름대로… 재밌는 일도 있었는데.”
“그러게.”
막상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아, 그렇지.
“카르티, 같이 좀 나갈래?”
언젠가 이 베어링턴에서 라면을 먹은 적이 있었지.
갓난아이 때 이 세계에 넘어온 카르티에게는 저쪽의 음식에 대한 향수가 없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맛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베어링턴을 떠나는 마당에 한 번쯤 더 먹고 싶은 생각도 있고.
“아니, 지금 거리가 난장판인데 지금 나가서 뭘 하게?”
“그래도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면 오늘 정도는 놀아도 되잖아. 가자.”
침대에서 내려와 로브를 걸쳐입었다.
카르티 말마따나, 거리가 엉망이 되었다면 그 가게가 문을 열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도시의 전경을 한 번쯤은 눈에 새겨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어울려 드릴게, 공주님.”
“야, 이상하게 부르지 마.”
공주님은 무슨. 낯간지럽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