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2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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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눅눅한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꺼풀 위로 빛이 다소 무겁게 짓눌러왔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허무에서 실감으로.
천천히 부상하는 의식을 따라 실을 더듬듯 이성을 되찾으며, 겨우 눈을 떴다.
“…돌아왔네….”
휴우, 하고 문득 한숨이 나왔다.
무슈마헤트의 의식도, 발스턴의 기억도 아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살고 머무르는 장소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가 돌아가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옅은 잠에 고개를 꾸벅거리는 그 소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불러보았다.
“…페리링.”
“으으응….”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에도 끄트머리가 뾰족한 귀끝이 살짝 움직였다.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눈꺼풀이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멈췄다가, 떨렸다.
“로즈 씨!”
소녀의 눈동자가 젖어들고, 고여들고, 흘러넘치려는 것을 손가락을 뻗어 훔쳐냈다.
페리링이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은걸. 페리링은 웃을 때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니까.
“어서… 오세요, 로즈 씨….”
페리링의 손이 내 손에 감겼다. 채 닦지 못한 뺨에 흘러내리는 젖은 자국이 내 손가락에 부비는 뺨에도, 손가락에도, 조금 자국을 남겼더라.
“무사하셔서 다행… 이에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당연하겠지만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죽을 뻔했던 적이야 엄청 많았지만, 절대 죽지만은 않겠다는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이번에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난 그렇다치고… 루시탄이랑, 카르티는?”
“두 분은… 헤카이트 님과 키르케 씨가 봐주고 계세요. 로즈 씨가 깨어나셨다면 아마 두 분도….”
아마 나와 같은 타이밍에 깨어났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된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머리가 핑 돌아서, 다시 침대 위에 허물어지기 전까지만.
“…몸이 무거워….”
“아, 그러실 거예요. 음… 마나맥이 너무 혹사당했어요. 조금 쉬셔야 해요.”
“그랬었지… 으으으, 하지만 마음 편히 누워있을 수만은 없어. 그래도 둘이 무사한지는 좀 확인해야….”
꾹 하고 페리링의 손가락이 누워있는 이마를 눌렀다.
…이마를 눌린 것만으로, 누워있는 사람은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가 보고 올게요. 잠시 그대로 쉬고 계세요.”
“부탁 좀 할게.”
내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페리링이다.
루시탄도, 카르티도, 키르케도, 헤카이트 당주와도 이래저래 목소리를 높여오거나 했지만.
페리링이 생긋 웃고는 내가 누워있는 침실을 나서는 것을 보곤 편안하게 사지를 늘어뜨린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오는 게 어때?”
페리링과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마치 방 안의 풍경에 녹아들었던 것처럼 투명하게 숨어있던 인물이 몸을 드러냈다.
“겨우… 이렇게 만났네. 당신이 ‘캐스’였어. 미래를 읽는 마녀, 캐슬린.”
“네. 정식으로 이름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죠? 로제이아 씨.”
여전히 얼굴은 면사포로 가린 그대로.
그 너머에 어렴풋이 보이는 눈은 그 무엇도 품지 못하도록 눈꺼풀이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것을 볼 것이다. 그녀의 스킬, ‘미래예지(Prophecy)’가 있는 한.
“윽….”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더듬은 안대 위로 질척한 피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반응? 반발? 반작용? 아니, 아니다. 죽은 피를 뱉어냈을 뿐이다. 내 잃은 눈을 대신하고 있는… ‘노신왕의 각인안’이, 캐스의 미래예지에 공명하고 있었다.
“과도한 힘을 손에 넣은 자에게는 과도한 책임이 주어지는 법이에요. 당신에게도 예외가 없어요, 로제이아 씨.”
“…책임 같은 건 딱 질색인데 말야. 그건 내게 일어날 일이야, 아니면 일어났던 일이야?”
마치 선문답 같다.
캐스가 내게서 보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녀의 닫힌 눈동자는 분명 내 왼쪽 눈에 닿아있었다. 왼쪽 눈구멍에 뻗친, 이제는 옥좌를 잃어버린 신의 권능으로부터 뭔가를 보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꽤… 한정되어 있거든요.”
“예언이라는 것도 생각만큼 편리하지만은 않단 얘기?”
“그런 셈이에요.”
캐슬린이 살짝 웃음지었다.
체념이 보였다. 권태가 보였고, 조소와 모멸도 언뜻 비쳤다.
“카테르네 씨의 일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카테르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이제는 없는 그녀의 손이 숨통을 꽉 조이는 것만 같다.
“…제가 이 시야를 얻음으로써 짊어져야 했던 대가라고 인정하기는 힘들었어요.”
그녀의 눈꺼풀이 살짝 바들거리는 게 보였다.
미래와 과거, 양자가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킨 그녀의 시야 속에서 캐슬린은 카테르네의 죽음을 몇 번이고 지켜봤을까. 나조차 꿈에서 그녀의 죽음을 몇 번이고 돌이켰었는데.
“네게 마담 윕… 카테르네는 뭐였어?”
“언니였어요. 친애하는 친구였고,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죠.”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을 말하는 것치고는 캐슬린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그 옛날의 연정과 친애, 사모가 모조리 닳아버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제가 ‘필그림’으로서 이 세계에 와서, 미래예시라고 하는 파격력(??力)을 깨우쳤을 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절 받아줬던 게 그녀였어요. 저는… 제 이름을 알았죠. 이전에 제 삶은 전부 지워지고, 이 스킬에 모든 것을 빼앗겼어요. 그리고 그런 제게… 있을 곳을, 해야 할 일을 준 게 그녀에요.”
문득, 그녀의 말투가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말씨가 아니라…
어린 소녀의 칭얼거림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카테르네가 저로 인해 상처받아, 당신에게 집착하고…. 당신을 위해 죽는다는 미래를 저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캐슬린은 처음으로 내게 자신의 원초적인 감정을 토로했다.
그 감정이 지나칠 정도로 뜨거워서… 살갗이 데일 것만 같았다.
“저는… 당신을 질투했던 거예요. 로제이아 씨.”
“…캐슬린.”
그 질투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속마음, 그 연정, 질투를… 내가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에게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과의 이별을 동시에 알게 되는 시간만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만.”
언젠가의 기억이 났다.
로젤라이를 이 몸에 받아들였을 때의 일이었을까.
노래하는 성녀도 캐스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테르네는, 로젤라이가 알고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기억을 참을 수 없어했다.
그만큼, 그녀의 부재가 카테르네를 황폐하게 만들었단 얘기가 되겠지.
그것은 결국…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카테르네는 날 위해 죽은 게 아니었어. 내게 비춰본 당신의 기억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거지.”
카테르네, 마담 윕은.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카테르네가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던 건 당신이야. 내가 아니야.”
그녀는 그저 내게 덧씌워진 캐슬린의 기억을 어떻게든 더듬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 사실이… 시원하도록 섭섭했다. 섭섭하도록 시원했다.
“…그건 로제이아 씨만의 생각인 거죠. 로젤라이의 생각이고. 이미 죽은 그녀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어요.”
“동감이야.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지만…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당신과 비교하면 정말 근거 없는 확신이지.”
언젠가 나도 카테르네처럼 누군가의 부재를 미치도록 아쉬워할 때가 올까.
그걸 물어보면 저 미래를 읽는 여인은 대답해줄 수 있을까.
만약 루시탄이, 페리링이, 카르티… 그들이 없는 때가 찾아온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아니, 됐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내 안의 살짝 치솟으려던 미련을 털어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은 조금 기억해두려고 애쓰도록 하죠.”
“…의외로 성격 나쁘네.”
카테르네처럼 말이지.
그 말까지 하면 어쩐지 기뻐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지만, 잘 숨겼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캐슬린이 웃은 것처럼 보여서.
“그러니까 이건 제가 드리는 답례이자 심술입니다.”
캐슬린은 한 마디 간격을 두곤, 얼굴에서 웃음기를 슬그머니 지워갔다.
“당신의 왕자님은 조만간 중대한 선택을 하나 내리게 되실 거에요. 하지만 그때 당신도 선택의 앞에 서게 되겠죠.”
캐슬린의 말이 똑똑히 귀에 스며들어왔다.
건조하고, 메마르고, 덧없이 울리는 예언이, 왜 이렇게 귓전에 계속 울리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 둘 중 한 분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에는, 그 뒤의 미래를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건 말 그대로… 당신들의 하기에 달린 일이니까요.”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할 수 있게 해 준 건 좀 고맙게 생각할게.”
캐슬린이 그 말을 해 준 것이 답례든, 심술이든…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은 뭔가… 당분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쳤으니까.
“어떻게 받아들이시든 그건 당신의 하기 나름이에요. 그럼 전 이만… 또 뵙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이제 베어링턴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녀는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을까.
그 의문은 아마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다가 망각 너머로 사라져버리겠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캐스를, 카테르네를, 로젤라이를… 후련하게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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