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22화 (122/157)

〈 122화 〉 2 ­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6)

* * *

(6)

캐슬린의 죽음. 아니, 살해.

석연치 않은 건 있었지만, 그녀를 살해한 것은 발스턴이다.

하지만 발스턴이 손을 더럽혔을지언정 뒤에서 그에게 칼을 쥐여준 이는 따로 있었겠지.

아마 루시탄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이 머리 좋은 녀석이 그 생각을 못 했을 리 없지. 루시탄이 한껏 침울한 얼굴인 채로 다시 한번 발스턴의 기억 재생이 끝났다. 마치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무대처럼 사라져간다.

“어, 그러니까… 방금 그건 대체 뭐였냐?”

카르티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찌푸리고, 주저앉아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캐슬린의 시신을 건드리려고 한다… 별로

보기 좋지 않으니 그만둬.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루시탄이, 이윽고 얼굴을 들었다.

혼란과 체념. 녀석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었던 감정의 파편들이, 내 가슴에 똑같이 파고드는 것 같다.

“…이거 참. 발스턴 자식. 나한테 이런 거나 보여주고 말이야.”

쓰게 웃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이 눈을 감는다.

저 눈꺼풀 아래에서 그는 기억의 조각을 퍼즐처럼 짜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나라의 왕가라는 곳의 피가 이렇게 더러울 거라곤.”

중얼거리고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든… 만약 발스턴의 의중이 루시탄을 괴롭히는 데 있다면, 놈이 성공했음은 확실했다.

“일단 가지. 아직 여기 상황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네.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어깨를 짚고 두들겨주는 것밖에는.

루시탄은 한번 웃고는, 내 손에 들린 랜턴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되는 걸까. 이 소년의 기억을… 흙발로 더럽히는 이 순례를 이어가도 되는 걸까.

적어도 이 자리의 선택권이 내게 있지는 않았기에, 루시탄의 말없는 채근에 따라 길을 비추었다.

“…뭐… 난 부외자라서 무슨 일인지는 요만큼도 모르겠지만… 대충 힘내라구. 왕자님. 어느 집안이건 높으신 분들의 집에는 더러운 구석 하나쯤은 있게 마련 아니냐. 안 그래?”

카르티는 정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어도, 어설프게나마 루시탄을 위로했다.

루시탄은 그저 웃은 채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문득 등불의 빛이 일렁였다. 천천히 등불을 들어보니…

무엇인가 거대한 형상이 언뜻 보였다. 그런데 그 생겨먹은 게…

“…우와. 저건 또…”

기괴하게도 생겨먹었더라.

이 세계에 온 뒤에 온갖 기괴한 것을 봐왔지만, 그 중에서도 원탑을 꼽으라면… 바로 눈앞의 괴물체를 꼽을 정도다. 두 번째는 무슈마헤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루 늪지의 키메라고.

“무슨 나무… 인가? 아니, 그런데 생겨 먹은 게 꼭…”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고깃덩어리가 나무에 꽉 감겼고, 그 나무는 뿌리 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가늘어졌다. 사방에 뻗친 잔가지와 바닥에 뻗친 뿌리 끄트머리가 꼭 앙상한 손가락들을 연상하게 생겼다.

굳이 말하자면… 어설프게 인간의 뇌와 척추, 신경계를 표현해놓은 것이려나.

나무뿌리에 묶인 고깃덩어리에는 주름마다 희번득거리는… 안구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었다.

“…그래서 저게 뭔데 대체.”

“로제. 저쪽 좀 봐. 저기 가운데쯤.”

카르티가 턱짓으로 가리킨 지점을 등불로 비춰보자, 뭔가 거기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가지와 덩굴에 휘감겼지만, 그것은… 꼭 발스턴이 들고 있던 검처럼 보였다.

“맞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도 되려나 몰라.”

루시탄이 조심스럽게 앞장섰다. 손에 검 한 자루를 쥔 채였다.

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갈수록 발밑에서 뭔가 질척한 느낌이 신발에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진흙인지, 아니면 말라붙은 핏덩어리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욱….”

검의 모습이 육안으로 확실히 보일 때쯤, 그 칼끝이 파고든 지점이 누군가의 머리, 정확히는 눈구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내 눈까지 아파오는 것 같아.

“…설마하니….”

지금 이 순간 나와 루시탄의 생각은 아마 일치했을 것이다.

카르티까지 그랬는지는 모르겠어도.

“발스턴… 그 자식인가?”

“글쎄.”

루시탄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꽂혀 있는 칼자루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주어서, 뽑아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검은 누군지 모르겠는 죄수의 얼굴에서 뽑혀나왔다.

칼날은 수액인지 피인지 모를 질척한 점액질로 더럽혀진 그대로였다.

“…아무 일도 없군.”

루시탄은 꽤 긴장한 낯색이었지만, 이제 녀석이 검을 뽑아내었음에도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낌새는 보이지 않…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카르티가 위를 올려다보고는 긴장감에 쥐고 있는 창을 꽉 움켜쥐었다.

고깃덩어리를 감싼 나무가 빠르게 시들어가는 게 보였다. 시들어가다 못해 말라비틀어져서,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게 보였다.

우리 셋 모두,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을 곱씹은 채로 각자의 무기를 의지하듯 들었다.

나무가 흩어지면서, 그 나무에 붙들린 것처럼 잡혀 있던 사람의 윤곽이 바닥에 쓰러졌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기묘한 액체에 젖은 채 앙상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그것이 천천히 머리를 무거운 듯 들었다. 하나 남은 눈으로 루시탄을 바라보았다.

“…왕자, 전하.”

그것이 입을 열어 말을 했고, 그 목소리가 쉬고 갈라진… 끔찍하게 일그러진 발스턴의 것임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루시탄은 말이 없었다. 그것… 발스턴의 말로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옅은 연민조차 없었다.

이제는 동정마저 식어버린 눈으로 내려다보지만, 그저 슬픈 듯이 보였다.

“발스턴… 네가 보여준 그건 전부 틀림없이 있었던 일이냐?”

발스턴이었던… 이제는 영락한 생물의 머리가 힘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루시탄은 눈을 감고, 독을 들이마시듯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지? 캐슬린을 죽이고, 로젤라이를 죽이고… 그리고 끈질기게, 이 여자마저 죽이려 했다. 난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오. 알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발스턴의 말이 조금 열기를 띠었다.

모든 생기를 악마에게 빼앗긴 듯 앙상한 팔이 앞으로 기어갔다. 루시탄의 발을 붙잡으려는 것을, 루시탄은 진절머리내며 피했다.

“…울자크 폐하를 위해서였고, 왕자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저 여자를 증오합니다. 전하를 망친 계집. 저 여자가 전하의 곁에만 없었더라면, 엘레나 님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어머니?”

…엘레나?

루시탄과 미하도르의 어머니로 보였던 왕비를 말하는 것인가?

주름투성이의 발스턴의 입가가 바들거렸다. 웃음처럼도, 비웃음처럼도 보였다.

“말해라. 뭘 알고 있는 거냐.”

“이미… 왕자님께서도 짐작하시는 것이고, 울자크 폐하께서도 짐작하시는 것입니다. 크크… 어린 날의 전하께서, 미하도르 전하의… 부정한 걸리버 계집을 마음에 들어하셨듯, 아버지 대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발스턴!”

루시탄이 고함을 질렀다.

루시탄이 로젤라이를 연모했음은 안다. 아버지 대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상대는 누구란 말인가. 루시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파국의 가능성이 치달아 엉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아버지가 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또한… 울자크 폐하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자, 저를 증오할 마지막 단서를 드리지요. 이제 당신이 왕위를 잇든 아니든… 나와는 상관없어. 내게 남은 건 저 여자와… 네가 파멸하는 걸 보는 것 뿐이야!”

카르티가 루시탄을 막아섰다.

악다구리를 쓰는 발스턴의 기세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나도, 카르티도 이 이상 루시탄이 저자의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창도, 마법도, 인간의 혀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네 어미를 죽인 것도… 그래, 나다! 크크크, 제 아내 정도는 손수 죽일 일이지! 끝까지 겁쟁이더군, 네 애비는! 자, 이제 나를 죽이면 너는 용을 쓰러뜨린 영웅이 되겠지! 피로 물든 왕관이 네 손에 들어갈 텐데, 그걸 머리에 뒤집어쓰면 너도 네 애비마냥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겠…!”

“닥, 쳐, 어어, 어어, 어!”

루시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마검이 발스턴의 등을 내리찍었다.

“닥쳐, 닥쳐, 닥치란 말이다, 네놈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루시탄은 미친 듯이 눈을 치뜬 채 발스턴의 죽은 몸을 연거푸 내리찍고, 내리찍기를 반복했다.

“…안 말려?”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냥 저러라고 내버려 둬.”

카르티가 슬그머니 물어봤지만 나도 루시탄이 끝까지 검을 내려쳐 발스턴을 다진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학, 학, 학, 학, 학….”

루시탄이 결국 지쳐서 검을 던져버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분풀이로서는 충분했길 바랄 뿐이다.

발스턴의 몸에서 완전히 숨이 끊기자, 그의 의식으로 이루어져있던 공간이 천천히 붕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쩌적, 쩌저적, 쩌저적, 쩌적…

사방에서 균열이 가면서, 이 공간 자체가 흩어지려고 한다. 우리 셋의 의식을 여기에 묶어두던 힘이 천천히 사라져가고, 대신 의식이 천천히 현실로 끌어올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있기를, 다만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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