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21화 (121/157)

〈 121화 〉 2 ­ 10 / 내 최악의 악몽, 발스턴에게 (5)

* * *

(5)

루시탄이 멍하니 중얼거린 한 음절의 소리가 그의 기분을 한 마디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루시탄도 잠시 얼굴이 굳었지만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숨을 내쉬었다.

기억 속의 대화는 이어졌다.

소식을 들고 온 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치는 울자크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프레드릭 님께서… 전선에서 크게 다치셔서 후방으로 옮겨지셨습니다. 다행히 전투는 승리했습니다만….]

초조하게 서 있던 울자크의 얼굴에 낭패감이 드리웠다. 잠시 비틀거리던 그가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고, 계속해서 전령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카르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나름대로 이야기의 구색을 짜맞추기 위해 끙끙거렸다.

“…느낌으로는 그 프레드릭 나리가 맞는 것 같긴 한데. 근데 형이라니? 어이, 왕자 나리.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 들어. 아버지와 바츠 경이 분명 가까운 사이이긴 했지만… 바츠 경이 왕실의 일원이라는 얘기는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어.”

“아이고, 골치야… 지금 벌어지는 일도 머리가 아픈데 이젠 남의 집안 내력에까지 끼어들어야 한다니.”

꼬여만 가는 상황에 골치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일단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칼 프레드릭 바츠 본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울자크 왕에게는 형이라고 칭할 만한 사이인 프레드릭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게 혈연적인 의미인지, 아니면 그저 호형호제하는 사이인지도 아직 모른다. 루시탄조차도 이에 대해서 특별히 들어본 적은 없다는 것 같고.

[당장 가봐야겠다! 전령은 앞장서라!]

[전하. 지금은 자중하셔야 할 때입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발스턴이 나서서 왕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격한 감정에 이리저리 안색이 바뀌는 훗날의 왕은 시시각각 초조함과 분노를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라파한 님께서 돌아가시고 프레드릭 님께서 변을 입으신 이상 전하만이라도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지금은…]

[이제껏 자중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발스턴, 자네는 즉시 캐슬린을 이리 데려오라.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울자크가 황망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고, 발스턴이 그 뒤를 쫓아 방을 나선 순간…

갑작스럽게 주변의 풍경이 검게 덧칠되어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그 녀석의 이 방에서의 기억은 여기가 끝인 것 같은데.”

조금 놀랐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아직도 다소 얼떨떨한 얼굴인 채 루시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우로제 별궁의 모습도, 왕의 모습도, 발스턴의 모습도, 전부 사라진 공간 속에서 숨을 내쉬었다. 손에 쥐어진 푸른 등불이 일렁이는 대로 입술을 깨문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지.”

루시탄은 몹시 체념한 투였다.

발스턴은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루시탄의 호위를 전담했다. 1년 전까지는 가장 충실한 심복으로서 곁에 있었던 입장이니, 그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 루시탄에게는 두려울 만도 했다. 무엇보다, 그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데에는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나에게는 말할 나위 없이 이 세계에서 만난 최악의 적이지만, 어쩌면 루시탄에게 발스턴이라는 인간은 내가 카테르네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위치… 일지도 모르겠다.

카테르네… 마담 윕.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고, 동시에 내게 지독히도 집착했으며,

나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놨던 여자. 지금의 그 여자가 날 보면 무엇이라 할지.

“니들 둘 다 얼굴이 장난 아닌데. 괜찮겠냐?”

“어?”

카르티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만지는 걸로 뭘 알 수 있겠으랴만, 뺨이 미세하게 바르르 떨리고 있는 듯도 했다.

“어… 난 괜찮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다. 일단 계속 가지. 옛날 일이야 어쨌든 지금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루시탄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앞서가는 등에서 무척이나 피로함이 느껴졌다. 정말 괜찮으려나, 저 녀석.

그 대화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도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게 되는 침묵이 잠시 더 꼬리를 이어가던 와중,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에 어떤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뭔가… 나왔잖아?”

루시탄과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카르티만이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깜빡거리는 와중, 천천히 그 희미한 윤곽을 향해 다가갔다. 손을 뻗어보니 세로로 그어진 틈의 양옆으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

루시탄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다.

만듦새가 호사스러운 문인데,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어디에서 봤더라.

답은 루시탄이 바로 알려주었다.

“이건 왕궁의 연회장 문… 인 것 같은데.”

그제야 문에 새겨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보니 알트슈타인 왕가의 상징인 왕관을 쓴 매와 그 옆을 따르는 세 마리의 작은 매였다. 블라우로제 성의 방에 이어 이번에는 왕궁의 연회장…? 이제는 뭐가 나올지 덜컥 겁이 났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얼른 안을 들여다보자고. 어차피 다 지난 일인 거 아냐?”

속 편해서 좋겠네.

카르티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밀었다. 그녀로서는 여기가 어딘지 알 바도 아니었을 테고, 그저 빨리 이 사태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을 테니까. 나도 루시탄도 미적거릴 수밖에 없었던 지금 그녀가 나서준 것이 내심 고마웠다.

안에는 이번에는 단 두 사람이 있었다.

발스턴과… 처음 보는 초로의 여인이었다.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 모습… 본 적이 있다. 다만 같은 모습을 했던 여자는… 훨씬 젊었었는데?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관식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군요.]

[전부 당신의 예언대로 되었소. 캐슬린.]

…캐슬린. 또 그 이름이다.

발스턴은 지난번보다 약간 더 나이를 먹었고, 초로의 여인은 주름이 쪼글쪼글한 손을 바지런히 모은 채로 어설프게 발스턴의 얼굴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시선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으려나. 두 눈이 감겨 있어서야.

[폐하께선 결국 왕위에 오르셨지요. 세 명의 형제를 제물로 바쳐서 말이에요.]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었소. 왕관을 쓰기 위해서는 세 형제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할 것이노라고. 그리고 폐하께서 결국 그 길을 선택하실 거란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오?]

눈을 감은 채 캐슬린이 살짝, 면사포 아래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네에, 그렇고말고요. 폐하께서 왕좌에 앉으신 다음… 가장 먼저 어떤 명령을 내리실지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으면서 폐하를 도왔다? 어째서?]

발스턴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조용히 가라앉은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캐슬린의 목소리에는 오래 묵은 체념이 송진처럼 묻어났다.

[예지의 능력이라는 건 사실 저주와도 같은 거에요. 발스턴 경.]

발스턴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늙은 여인, 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벽에 걸린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먼 여인이 보는 것이 그림인지, 아니면 과거, 혹은 미래인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미래에 항거하든, 순응하든 결국 변하지 않는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도 될 말, 해서는 안 될 말, 해야만 하는 말이 전부 정해져 있다는 것도 말이죠. 심지어, 그러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던 것은 발스턴만이 아니었다.

캐슬린 또한, 격정이 휘몰아치는 내면을 갖고서도, 그 들끓는 마음을 겉으로는 내비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보였다.

[저는 당신들에게는 연민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요. 다만 이 운명을 내려준 신을 만나 따져묻고 싶을 따름이죠.]

[나와 폐하를 연민한다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당신이 보기엔 세상 모든 이가 그저 꼭두각시처럼 보일 테니 말이오.]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캐슬린은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농담이 떠오른 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키득거림을 내었다.

스스로는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심지어 제 업은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예지를 이어받는 자가, 제 이름과 이 운명을 이어받겠죠. 많고 많은 걸리버 가운데에서도, 이런 악독한 능력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요? 있어서는 안 되겠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오?]

[이미 수백, 수천 번이나 본 순간이니까요. 알게 된 장난으로는 더 이상 저를 놀래키지 못하죠.]

발스턴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허리의 칼집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는 캐슬린의 등줄기에 칼날이 쑤셔박힌다.

왼쪽 가슴, 심장을 단숨에 뚫고 나온 칼날이 피에 젖어 있었다.

루시탄이 옆에서 한숨을 나지막하게 내쉬었다.

일그러진 표정에 드러난 경멸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발스턴 경. 당신을… 위해서도, 한 마디 남겨드리지요.]

[말하시오. 들어드리겠소.]

죽어가는 자가 더디게 입을 열었다. 일말의 공포감도 없이 풀어놓는 최후의, 그러나 최후가 아니게 될 유언은 발스턴에게 예비된 것이었다.

[당신의 죽음도… 지금의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저주와도 같았다.

쓰러진 예언자의 몸에서 넘쳐나는 피가, 바닥을 적시며 가득하게 퍼져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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