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78화 (78/157)

〈 78화 〉 2 ­ 5 / 늙은 늑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5)

* * *

(5)

한순간 정적이 있었다.

데구르르… 잘린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에 질퍽한 질감이 기분 나쁘게 들러붙어서,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었다.

그들의 눈에 돌로 된 다리 위를 구르던 잘린 머리가 운 나쁘게도 난간 틈바구니에 흘러들어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까지 보인 뒤, 겨우 침묵이 깨어졌다.

“전사장이… 당했다!”

“이 새끼들!”

누군가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외친 한 마디에 겨우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무도 저들이 먼저 살인을 저지를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지만… 어찌 됐든 이런 일이 언제고 일어날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는 분위기였고, 그것이 우연히 오늘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랗게 타올라 번지기 시작했다.

“누가 가서 증원 불러와! 길드에 있는 녀석들 모조리 다 끌고 와 오늘 저 썩을 라오후 새끼들 베어링턴에서 싹 다 조져서 남김없이 쓸어버린다!”

“다리가 아니라 무덤가 근처에서 어정거리게 해 주겠다, 씹어처먹을 자식들아!”

“너네가 다 뒈지든 우리가 다 뒈지든 한판 죽을 때까지 해 보자고 이 개구더기 새끼들!”

소리와 분노가 오고가는 가운데,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건 기회라며 번뜩이는 게 있었다.

자신이 가겠다고 소리를 치고는, 그대로 대열을 이탈해서 뛰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잡음 없이 빠져나올 수 있을지를 고심하던 참이었으니까.

왔던 길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빠져나올 각을 계속 재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표가 될 만한 건물을 하나하나 봐두었다. 눈에 봐둔 가로수와 그 뒤의 마차역을 향해 뛰면서, 숨을 학학 몰아쉬었다.

“씨발, 어딜 가든 왜 이렇게 바쁜 건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정말로 이렇게 사태가 커져서, 길드와 라오후 양측의 전면전으로 비화하거나 한다면… 이미 유혈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보다 몇 배, 몇십 배의 피를 뿌리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대열을 바라보던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가 갔다.

유혈사태만 없었을 뿐 이런 소동이 몇 번이고 있었다면, 그것도 꽤 자주 있었다면, 상관 없는 시민들이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지!

“학, 학, 학…. 씨 바알…”

잠시 뒷길 어귀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폐부가 찢어질 것처럼 삐걱거렸고, 다친 몸으로 무리하게 뛰느라 약효가 옅어진 것인지 시큰시큰한 통증이 다시 주변을 지져대기 시작했던 터였다.

조금만 쉬고…

“…있을 틈이 없을 것, 같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목 뒤가 뻐근하게 지끈거리는 기묘한 감각.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젠 싫어도 몸이 먼저 위험을 알게 되어버렸다.

“끅…!”

날아들었다. 칼날이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칼을 맞았던 그 부위를 그대로 노리고.

운 좋게도 모험가 행세를 하느라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을 칼날이 긁고 지나갔다. 어지간히 억센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쇠만큼이나 튼튼했다.

이 습격으로 두 가지를 알았다.

하나는 길드 안에 라오후가 심어둔 스파이가 있다는 것이고, 그 스파이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가슴 찌르는 거 되게 좋아하네. 변태냐?”

무한의 주머니에서 꺼내든 지팡이 머리의 핵에 마력을 담았다.

가장 기초적인 공격 마법, ‘화살’을 내쏘자 두건 위로 드러난 눈이 크게 뜨였지만 그래도 그 놀라움이 반응을 느리게 하진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직감에 의지해 몸을 위로 솟구친 도적이 돌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고 데롱데롱 매달렸다.

“전사처럼 하고 다니는 녀석이 냅다 마법질을 한다고…? 너 대체 뭐하는 년이냐?”

“아하. 지금은 못 알아볼 얼굴이지.”

잠깐 얼굴과 모습을 바꾼 것을 잊고 있었다.

내 스킬도 한층 개화하여, 이제 굳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정신집중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면 알아보겠어?”

티티티티티틱… 불길이 사그라지듯 티끌이 되어 벗겨지는 커스터마이징 너머로 내 맨얼굴이 드러나자, 마법을 쏘는 것을 본 것 이상의 경악이 크게 뜨인 눈에 오롯이 드러나고 있었다.

“너, 너 어제 그!”

“어제는 참 신세 많이 졌어. 내 가슴팍에 씨발 칼빵을 박아줘서 하룻밤 죽을 고생을 했지 뭐야.”

생긋 웃으면서 지팡이 끄트머리로 땅을 탁 두드렸다.

최근 별로 잘 먹히지도 않는 주특기, 「장미여왕의 포옹」을 시전했다.

“이깟 것쯤!”

바닥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자라나 뻗쳐오는 넝쿨의 무리에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는 양 그 자리에서 재빠르게 몸을 날려 착지한 도적이 재차 칼을 거꾸로 쥐어 내리찍었다.

괜찮아, 어딜 노릴지는 대충 알고 있었어!

지팡이를 크게 휘둘러 화살을 쏘아내면서 견제하고, 뒤로 몸을 구르듯이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이마의 살갗을 살짝 스쳐 피가 튀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다.

녀석과의 거리는 약 다섯 보. 5m 정도.

눈앞에 피가 번져가는 느낌이 거슬렸지만, 피를 닦으려고 주의를 분산하면 바로 덤벼오겠지.

후우, 후우… 느리게 숨을 내쉬면서,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을 늦추지 않고 두 개째의 환약을 깨물었다. 여전히 지독한 맛이지만 그래도 오히려 입 안에 고인 피맛 덕에 먹을 만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 마녀 자식, 왜 뒈지질 않는 거야….”

손에 쥔 대거를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오히려 도적이 초조하게 읊조렸다.

흐응, 하고 오히려 그 말에 여유를 되찾았다. 아마 칼날에 독이라도 발라둔 거겠지. 도적이니까, 독을 쓰는 싸움법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상대가 좀 나빴지.

“아, 난 독 면역이거든. 걸리버니까.”

이렇게 말해두는 게 더 혼란스럽겠지.

물론 뻥이다. 어젯밤 겨우겨우 상처에 박아넣었던 씨앗이 독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을 뿐이다. 도적의 칼에 찔리자마자 일단 독을 억제하자고 생각했는데, 이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아침쯤에는 송장으로 발견되었을지 누가 알겠어.

“이 더러운 걸리버 창녀 계집이…!”

하지만 이 말이 혼란을 넘어서 분개로 비화할 줄은.

그나저나 내가 창녀 노릇 했던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냥 뱉어본 말이겠지만.

“뭐래. 너도 인제 보니 그 걸리버 모인 패거리의 뒷구멍 빨아주는 첩자 노릇 하고 있었잖아, 창놈 새끼야. 왜, 셴 타이펑이라는 놈 이에 낀 콩나물이라도 던져주디? 안됐네, 내가 어제 터뜨려놔서 당분간 고자 신세일 테고, 가서 엉덩이 대신 파리 마냥 손바닥이나 비벼주렴. 예뻐해 줄지 누가 알아? 근데 존나 작아서 잘 모르겠더라.”

“이 빌어먹을 갈보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른 녀석이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막무가내로 달려왔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것이 어지간히도 화가 났나 싶었지만, 덕분에 빈틈투성이다.

빠악, 빠악…

첫 번째 타격음은 다리 사이를 한 번 더 걷어차는 소리였고, 두 번째 타격음은 지팡이를 그대로 머리에 풀스윙으로 휘둘러 갈겨버리는 소리였다. 두개골이 금이 가지 않았을까 싶었을 정도의 상쾌한 소리였다. 머리든 알이든 어디 한 곳은 확실하게 터졌겠다 싶을 정도로.

“헹, 별것도 아닌 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뜨기 도적은 손으로 아랫도리를 붙잡은 그 자세 그대로 쓰러져 혼절했다. 작고 추잡해서 별 것 아닌 승리감을 맛보면서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김에 그대로 로브를 꺼내 몸에 둘렀다. 안대, 그리고 모자도.

“자,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운하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건만 여기까지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상황은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길드에 증원을 부르러 갈까 생각했지만 성질 탓에 위장을 풀어버린 이상 눈썰미가 좋은 자라면 다시 위장한 모습의 미세한 차이를 알아볼지도 모른다.

“너무 생각없이 움직여버렸네… 하아. 이게 다 이 새끼 때문이야.”

발로 콰악, 옆구리를 걷어차고는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마력을 담은 돌을 꺼냈다. 오검 문자가 새겨진 이 표식돌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연결된 다른 돌에서 빛이 나는 물건이다. 연락용으로 만들어둔 표식돌의 나머지 하나를 갖고 있는 건…

“부르셨소?”

짐작했겠지만, 늑대원숭이였다. 부르자마자 허공에서 기척도 없이 착지하는 솜씨는 마치 늙은 산양처럼 노련했다.

아마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위험해지면 끼어들거나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 보고 있었겠지만… 사태가 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요. 혹시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요?”

“보고 있었소. 지금은 난전이 벌어지고 있소. 길드에서도 벌써 증원을 급파했고, 라오후에서도 라오후대로 전력을 투입하고 있소. 양측에서 자존심이 허락할 정도의 피를 보고 나서야, 멈추겠지.”

…가만. 그렇다면 이건 기회가 아닌가?

라오후는 라오후대로, 길드는 길드대로 정신이 없는 지금이라면…

그 수상쩍은 점쟁이를 베어링턴에서 빼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움직였던 게 아닌가.

“그리고, 감시를 명했던 수인 말이오만. 움직임이 있었소.”

“그야, 뭐. 라오후의 끄나풀이든 진짜 길드 소속이든 줄리아 다리로 갔겠죠.”

“아니오.”

늑대원숭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뭘 놓친 거지?

“그 여자는 영주성으로 갔소.”

“…영주성…이라고요?”

분명 그쪽으로 갈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건 아니지만 딴은 맞는다.

현장 지휘관도 아니고, 전투원도 아닌 이상 길드에서 무마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서야 영주에게 알리는 게 도리겠지. 수상하다고도 할 수 없는 대응이지만… 영 개운치가 않은데.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길드도 아니고, 라오후도 아니다. 그렇다면 길드와 라오후 양측의 동향을 면밀하게 살필 만한 세력에는… 짐작가는 게 있었다.

“…한 가지 물어볼게요. 혹시, 이 도시에…”

또 하나의 퍼즐 조각.

그 윤곽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