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2 5 / 늙은 늑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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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전에 약속해둔 신호를 보내자 즉시 늑대원숭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접선 장소는 사전에 정해뒀지만, 모습을 바꾼 날 알아볼지는 반반이었는데 그는 용케도 날 단숨에 알아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냄새는 그대로란다. 향수라도 바꿔야 하나.
늑대원숭이는 한번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슬쩍 물었다.
“낯빛이 어둡소.”
“아… 뭐, 별일 아니에요. 그보다 내가 말했던 건?”
10분.
전사장 돌프가 말했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줄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게 가급적 빠르게 정보를 교환해야 했다. 물론 늑대원숭이가 그렇게 허투루 장소를 고를 리는 없지만.
“길드 주변을 배회하는 이들은 있었으되, 그중에서 누군가와 접촉하려는 자는 없었소.”
“라오후라는 이들이었나요?”
“아니. 그쪽 얼굴을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오만, 적어도 라오후는 아니었소.”
아니라고?
다시 생각이 꼬여들었다. 가장 수상하다고 여겼던 고양이귀 접수원조차도 이번엔 이렇다할 수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었다.
거기에 더해 늑대원숭이도 모르는 이들이라니. 누군가 제 3자의 개입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귀공은 뜻한 바를 이루었소?”
“그게 일이 좀… 꼬여서요.”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아주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오래 설명할 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오래 붙들고 설명할 만큼 자세히 파악하지도 못했거니와. 하지만 늑대원숭이가 행동 지침을 정하는 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줄리아 다리… 아오. 내가 라오후 측에 고용되었을 때도 때때로 그 다리에서 충돌이 벌어지곤 했지. 그래 봐야 병졸들 간의 대련 정도에 불과하여 유혈 사태까지는 가지 않는 정도였소만.”
“하지만 분위기가 좀 심각해 보이던데요?”
흠, 하고 늑대원숭이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기억을 더듬는 것이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저자에 돌고 있는 소문은 나도 들은 바가 있소. 점점 길드와 라오후 간의 분쟁이 격해지고 있다지. 오히려 라오후 쪽에서 더 자주, 그리고 심하게 도발을 하고 있다고.”
왜지?
들은 바로는 베어링턴에서 라오후는 꽤 득세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경쟁 상대인 길드에서 본 바에 따르면, 전사장 돌프를 비롯한 모험가들은 언제라도 라오후를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었다. 단순한 허세인가? 거기에 정체 모를 제3세력.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일단 모험가들을 따라서 줄리아 다리인가 하는 곳으로 가볼 거에요. 기왕지사 신참내기 모험가 흉내를 내고 있으니 조금쯤은 겁먹고 움츠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안전할 테고… 당신은 주변에 수상한 녀석이 없는지, 특히 고양이 수인의 근처에 어정거리지 않는지를 봐 주세요. 누군지 알죠? 그, 길드에서 접수원으로 일하는 고양이 귀.”
“알겠소.”
슬슬 10분쯤 되었겠지. 정신 차리자.
양손을 들어 자기 뺨을 짝, 치고는 눈을 한번 떴다 감았다.
“자, 그럼 그쪽도 잘 부탁…”
그 사이 늑대원숭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딘가의 모 박쥐 분장 히어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소리도 없이.
“…씁. 이런 기분이었어.”
생각보다 더러운 기분을 안고 소집 장소로 돌아가니 이미 꽤 많은 모험가들이 모여있었다. 궁수, 전사, 마법사, 사제… 구성도 무장도 제각각이어서 일단 군대로는 보이지 않았고, 긴장보다는 지겹다는 듯 늘어진 분위기였다.
“어이, 신참.”
“네?”
커다란 양날 도끼를 어깨에 걸친 거한이… 자기 딴에는 친절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흉터투성이에 이목구비가 우악스러운 얼굴이 너무 강렬하게 무서운 인상이어서, 친절한 태도가 전혀 인상을 중화시키지 못한 건 조금 유감이다.
“난 그록이다. 보다시피 전사지. 뭐, 늘상 있는 조금 거친 일이니까 너무 긴장할 거 없다고. 신참에게 나서서 싸우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뒤에 물러나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넉살 좋게 덧붙인 뒤 등을 자라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다. 어제 같은 양아치 3인방이 있으면 나름대로 인격이 성숙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공통점이라면 여기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지휘를 맡은 전사장 돌프조차도 신중할지언정 긴장을 요구하지는 않았었지.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셋은 어떻게 됐으려나?
치유사 협회에 실려 갔나? 그 정도의 대응을 하긴 했었지만.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대열이 느릿하게 출발했다. 대열에 맞춰 걸으면서 조금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초조해하고 있는 건가, 나…?
자기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거스러미 같은 위화감의 정체를 곱씹으면서 대열에 휩쓸려 걸었다. 번화한 상점가를 지나는 사이 주민들의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이 별로 곱지 않았던 탓이다.
누군가는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기도 하고,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어머니도 있었다. 냉소와 조소가 섞인 눈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별로 이미지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구만.
등을 따갑게 찔러대는 시선을 받아가며 얼기설기 이어진 대열을 따라 가도를 걸은 지 약 20여 분, 슬슬 뺨에 땀이 맺힐 즈음, 정오에 가까워진 햇볕이 물길에 부딪혀 푸르게 산란하는 것이 보였다.
운하가 도시를 관통하는 것은 꽤 장관이었지만, 그 운하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저쪽은 조금 낡은 인상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쳇,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구만.”
그록이 투덜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 말 그대로, 대략 4, 50명쯤 되는 인원이 다리 건너편에 운집하고 있었다. 이쪽과 거의 같은 규모인데, 장비도 무기도 제각각인 데다가 두서없이 대열을 짠 모험가들에 비해서… 그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보다 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라오후 새끼들….”
누군가가 되알지게 뇌까렸다.
그들이 하나같이 둘러쓰고 있는, 포식동물의 이빨 모양을 장식한 검은 복면이 돋보였다.
드레스 코드에 엄격한 직장이란 성가신 법인데.
순간 숨을 삼켰다.
저쪽과 이쪽,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다리 위에는 이미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섯 명이 다리 위를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어제 내 가슴팍에 칼빵을 먹인 얼굴을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잊겠어.
더 정확하게는 내가 마법으로 꽁꽁 묶어두었던 그 갑옷 전사.
그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늘어진 것이 보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까지는… 이 거리에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머지 넷은 얼굴에 복면 같은 걸 쓴 거로 봐선 저쪽 일행인 것 같았지만.
“라오후 새끼들. 우리 쪽 한 명을 상대로 여럿이서 몰려들어서 구타해?”
“아직 그렇게 속단할 건…”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신참?”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상대편 말도 들어봐야 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디만 그록이 별로 상대 말을 잘 듣지를 않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통쾌하기도 했고.
긴장감이라곤 없었던 대열에 서서히 분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평소 서로에 대한 연대감이나 소속감이 흐릿하다고 해도, 저런 광경 앞에서는 공통의 분노가 일어나곤 하니까.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그 사이 군중 사이로 전사장 돌프가 앞서 나섰다. 서로에 대한 야유와 된소리가 이어지던 가운데 돌프가 손을 들자 조금, 잦아들었다.
“그쪽도 알고 있듯, 길드의 전사장을 맡고 있는 돌프다. 이 상황에 관해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데. 그쪽에서 나설 자는 있는가?”
돌프의 태도는 딱 이거였다.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는 투.
길드와 라오후, 어느 쪽도 일단 무익한 전력 소모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상정한 후에, 일부러 고압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반응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애시당초 이런 상황에서 만약 맥없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면 돌프의 위치도 불안해질 것이고. 저쪽에서도 반응은 있었다.
저들 사이에서 나서는 자의 분위기는, 주위에 모은 이들과는 매우 달랐다.
맨살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새카맣고 반질반질한 갑주로 빈틈없이 몸을 감싼 자였다. 호사스러운 만듦새에는 장식미와 기능미가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눈조차도 쉬이 드러나지 않는 투구에는, 상대를 어딘지 위압하게 하는 구불구불한 염소뿔 장식이 앞서있었다.
투구 사이로 흘러나온, 음산한 분위기를 한층 가중하는 목소리가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이 자리에 선 전원의 귀에 파고들었다. 괴이하게 뒤틀린 목소리는 마치, 구석구석 금이 가 부러진 검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 같았다.
“나서라.”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의 단 한 마디로 야유도, 분개도, 모멸도, 욕설도, 격노도, 호흡마저도, 한순간 멎어버린 것처럼. 마치 온 세상이 아주 잠시 멈추기라도 한 것 같은, 그런 한 마디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을 밝혀라.”
돌프가 주위의 침묵을 깨듯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겨우 자신도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 선 그록도 마찬가지의 놀란 소리를 내었다.
스르릉.
떠보는 듯한 돌프의 한 마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쥐고 그대로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뽑아내었다.
어깨부터 상완부까지를 촘촘하게 덮고 있는 새카만 망토가 그대로 햇볕을 삼키듯이 펄럭였다.
“대화하러 나온 것이 아닌가?”
이제 흑기사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성의 없는 태도로 칼끝을 돌프에게 겨눴을 뿐. 무기를 들지 않으면 그대로 죽이겠다는 의사를 마치 노련한 사형집행인처럼 무덤덤하게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알기 쉽게 도발해오는데, 그대로 물러나거나 하면 돌프의 위치도 위험할 테지.
돌프도 그의 덩치에 어울리는 양손 전투 망치를 이윽고 들었다.
철로 된 구에 비죽비죽한 가시가 사납게 돋아있는 철퇴는 분명 검이나 창보다 훨씬 갑옷을 입은 자를 상대하기에 적절할 것이다.
그록도 이죽거렸다.
“바보 자식, 어디의 누군지는 몰라도 전사장에게 저런 멍청한 도발을 하다니 말이야. 전사장은 율령교회의 성기사 출신이라고.”
고함을 내지르며, 머리 위로 힘껏 철퇴를 들어 올린 돌프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교각을 거세게 주파하는 그 기세는 멧돼지처럼 사나웠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ㅡ?!”
성난 고함을 내지르는 그 용맹한 표정 그대로,
돌프의 목이 베이고, 날아간 끝에 줄리아 다리를 나뒹굴기 전까지만.
핏덩어리가 넘쳤다.
머리를 잃은 몸도 뒤따라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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