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2 5 / 늙은 늑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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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선택은 셋이다.
라오후에 숨어들어 늑대원숭이의 돈 떼인 원한을 받아낼 겸 셴 타이펑이라는 자와 담판을 짓는가.
아니면 모두의 관심이 쏠린 틈을 타서 길드로 돌아가 소기의 목적이었던 점쟁이 빼돌리기를 지금 당장 실행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에 딱 감이 왔던 대로 조금 더 추이를 관망할 겸 수상한 고양이 귀 접수역을 쫓을 것인가.
대한민국 의무교육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겠지만 찍기란 맨 처음에 고른 답의 적중률이 이상하게 높다는 것이 진리.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영주성 쪽을 한번 파 보죠. 아무래도 그쪽이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감에만 의지한 결정이 아니다.
길드에서 얼핏 들었던 한 마디는 근거로서는 빈약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시가전이 발생하고 있는 와중인데도 아직 영병이 개입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그 말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베어링턴의 영주는 어찌됐든 이 사태를 방조, 묵인, 혹은 라오후 쪽에 실질적으로 동조…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고양이귀 접수원은 어떤 식으로든 선이 닿아있는 것 같고.
“상처는 좀 어떻소?”
“…그 약을 두 개째 먹었어요.”
드물게도 늑대원숭이의 표정 변화가 격렬했다.
저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리면 아무리 나라도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할 정도의 파워는 나오더라. 물론 웃었다간 가슴의 상태가 울려대서 힘들 테니 참았지만.
“고역이었겠군. 약효가 다하기 전에 움직입시다.”
그 뒤로는 늑대원숭이도 웃음을 참는 눈치였고, 그 사실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런 시시한 잡담에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게 아쉬운 일이다. 늑대원숭이는 바로 앞장섰고, 연신 코를 킁킁거리면서 길을 잡았다.
“이쪽으로 냄새가 이어지는군.”
“그걸 알 수 있어요?”
“사향 냄새는 평범한 인간이라도 맡을 수 있지 않소?”
보통 그렇게까지 샅샅이는 못 맡습니다.
늑대원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진짜 개과 짐승이 섞이기라도 한 양 구는 덩치 큰 용병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갈림길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고는 금새 길을 찾는 품은, 마치 잘 훈련된 수색견을 연상케 했다. 실례가 될지는 몰라도.
수색은 베어링턴 북쪽으로 이어졌다. 도시의 중심지인 영주성을 중심으로 각종 행정 시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길드와 가게, 민가 등이 어지러이 혼란스레 얽히고 설킨 남쪽 지역보다는 훨씬 깔끔한 인상을 주는 건물과 도로, 그리고 마치 증권맨처럼 말쑥한 차림새와 피곤에 찌든 이들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지나가곤 했다.
“바쁘지만 않으면 가끔은 그냥 좀 구경하고도 싶은데….”
난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팔자가 이따위로 생겨먹은 건지.
투덜거리면서 일단 아쉬운 대로 주변의 풍경만 눈에 담아두면서 앞서가는 늑대원숭이를 따라 잰걸음을 바짝 붙였다.
“난 반대요. 이런 곳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사방에 쇠 냄새가 가득하지.”
“쇠 냄새라고 하면 센 씨의 대장간 쪽이 더 강하지 않아요?”
늑대원숭이가 돌아보았다.
그렇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한들 이쪽은 어깨를 으쓱이는 정도의 대응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말한 본인도 그다지 창의적인 설명을 떠올릴 수 없었는지 다시 커다란 등을 돌려서 길을 재촉했다.
“…여기로 흔적이 이어지고 있소.”
재무 관리청. 영지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
점점 예감이 현실에 맞닿아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당장 들이쳐서 안에 숨어있을 고양이 귀를 끌어낸다! 같은 게 가능할 턱이 없고. 일단 상황을 조금 관망하기로 했다.
“차라리 영주에게 가서 탄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왜 길드의 사무원이 이런 곳에….”
“저번에 나한테 그랬었죠? 라오후도 길드 소속도 아닌 이들이 길드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
“그랬소만.”
적당해 보이는 주변의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창 해가 뜬 시간에 술 먹는 사람이 없는 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네. 비록 여기가 증권가는 아니지만.
길가 테이블까지 갖춰져 있어 들여다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맥주 두 잔을 시켜 한 잔씩 나눠마시면서 재무 관리청을 연신 힐끔거렸다.
“혹시 그 사람들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어쩐지, 그러니까 혹시 짠물 냄새가 났다던가.”
“…동항로 회사를 의심하는 것이오?”
늑대원숭이도 슬슬 내 짐작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알트슈타인은 바다에 접해있는 나라이지만 베어링턴은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이다. 그런 도시에서 묵은 짠물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외부인이라면 동항로 회사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직 의심 수준이니까 이것만 가지곤 뭐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접수원이 나오고 나면 뭐라도 족쳐봐야지. 살짝 거친 일이 될지도 몰라요. 이런 것도 주워버렸으니까.”
로브 안쪽을 뒤적여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보랏빛 액체에 나와 늑대원숭이의 시선이 쏠렸다. 살짝 들어서 햇볕에 비춰보니 이리저리 색이 바뀌는 이 물약을 잊을 리 없지.
라오후 측에서 길드에 심어놓은 스파이, 도적놈의 품에서 나왔던 물건인데… 지난번 죽은 행상인, 크라수스 아란이 갖고 있던 물건과 비슷해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이려나?
“걸리버의 능력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물약… 이라고 했죠, 이거.”
“그렇소. 실제로 쓰는 건 본 적이 없소만.”
질 나쁜 걸리버들이 모인 폭력 단체, 라오후.
그리고 라오후의 발호로 인해 베어링턴에서 민심을 점점 잃고 있는 모험가 길드.
영주는 양자의 갈등을 방조하고 있고, 여기에 동항로 회사가 개입되어 있다… 동항로 회사만이 아니라, 크라수스 같은 작은 행상인들까지 이 수상한 약을 취급하고 있다.
동항로 회사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될 수 있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거품처럼 함께 떠올랐다.
너도 설마… 이 일에 얽혀있는 건 아니지? 아니라고 해 줘.
아무리 나라도 너마저 의심하고 싶지는 않아.
눈을 한번 꾹 감아 그 얼굴을 잠시 기억 아래로 가라앉히려 애쓰는 사이,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덮고 흔들었다.
“나타났소.”
그 말에 눈이 반짝 뜨였다.
늑대원숭이가 가리킨 방향에는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자그마한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래서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수상하고도 남지.
“저 사람 맞아요?”
“사향 냄새가 강하게 나고 있소.”
“움직이죠.”
그러시다면야.
그럼 슬슬 작전 실행이다. 테이블에 술값을 올려놓고 일어섰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서면 확 덮쳐서 납치한다니, 그야말로 변명할 여지가 없는 범죄이긴 하지만.
“아까랑 똑같이. 부탁해요.”
“알았소.”
늑대원숭이가 그 자리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도약해 지붕 너머로 몸을 날렸다.
저 덩치로 어떻게 소리도 없이 저런 짓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분명 지붕을 밟고 달리고 있을 텐데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점이 더더욱 묘하다. 진짜 닌자이기라도 한 건가?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센 영감님.
아무튼, 이쪽도 이쪽대로 움직여야지.
사방을 바짝 경계하는 고양이를 상대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니. 꽤 난이도가 있는 미션이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거리는 코숏 수염이는 영락없는 개냥이라 괜찮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를 밟았다. 자세히 보면 로브 허리춤, 꼬리뼈 즈음에서 뭔가 긴 물체가 늘어진 그대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봐선 영락없이 수인… 그러니까, 여기 말로는 카트시(Catsi) 종족이라고 했던가.
감각이 아주 민감한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놓치면 늑대원숭이에게 의지하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거지…?”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길드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라오후의 근거지인… 4번가였던가? 그쪽으로 가는 길인지도 사실 알 수가 없었다. 온지 며칠 안 된 도시의 지리를 그렇게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을 리도 없잖아.
“끙. 내가 어쩌다가….”
조금 투덜거리면서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곤란한데.
조금 바쁘게 걸음을 재촉해 골목길로 들어선 순간, 목 뒤에 다시 찝찝한 기분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대놓고… 오히려 날 유인하고 있다고 단박에 깨달았다.
지붕과 지붕이 이어져 위쪽을 완전히 덮은 어둑어둑한 뒷길이 주욱 이어지고 있어서야, 이리 들어오면 무사히 나가진 못한다고, 그래도 따라올 배짱이 있냐고 묻는 도발이나 다름없지 않나.
웬즈데이나 즈왈트가 깨어있었다면 분명 잔소리를 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겠지.
만약 늑대원숭이가 위쪽에서 보고 있는 거라면… 이 골목 안으로 사라진 고양이귀 접수원을 놓칠 수도 있었다.
“모 아니면 도… 려나.”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배에 힘들 가득 불어넣었다.
심호흡하고 각오를 굳힌다.
“좋아, 까짓거 될 대로 되라지. 죽기야 하겠어.”
자포자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꽤 좁아터진 골목이라서 골렘조차 들이기도 힘들어 보였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보면 단단하게 깎인 돌벽이 단단했다.
굳힌 각오를 뱃속에 가득 집어넣고 마침내 골목길에 발을 들였다.
도시 안에서 마치 던전에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착각이 머릿속에 일렁거렸다.
나 윤장미, 여기에선 가시의 마녀 로제이아.
어차피 가진 거라곤 몸뚱이랑 가시 돋친 악다구 뿐인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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