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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300화 (301/344)

Chapter 300 - 300화- 도망가도 결국은 단두대 행이다

"우리 아르웬, 살아는 있니?"

몇 시간 뒤. 굳게 닫혀 있던 실험실 문이 열렸다. 가슴골이 깊게 파인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 굽을 밟는 소리를 내며 남색 머리의 여자는 분만대에 구속되어있는 아르웬을 향해 걸어왔다. 아르웬을 괴롭히던 촉수 더미는 본래 모습인 검은색 덩어리로 돌아간 상태였다.

“정말 수고 많았어. 네가 짜낸 모유랑 네가 잉태한 병사들은 주인님이 알뜰하게 사용하실 거야.” “….”

아르웬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신체 곳곳에는 검은 촉수에게 감긴 흔적이 남아있었다. 양 가슴에는 아직 남아있는 모유가 유두를 통해 뚝뚝 흘러내렸으며, 가랑이 사이에는 정액이 섞인 혼합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아르웬의 눈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언니."

빛을 잃은 자주색 눈동자가 다시 돌아온다. 정신을 차린 아르웬은 친언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리고, 물었다.

"왜 그런 짓을…어째서, 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무얼 말하는 거니?"

카르디안은 진짜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이 언니가 잘못한 거라고 있니? 내가 한 거라곤 노래를 부른 것뿐인데?"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요?"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아르웬의 마음속에 울렸다.

"언니가 저지른 짓이 뭔지 전혀 모른다고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는데도 그걸 모른다고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는데도 모른다고요?"

아르웬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우리 아버지의 기억을 지웠는데, 왜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까!"

그렇다. 지금 아르웬은 누군가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매에게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아버지, 한스의 기억을 언니가 지워버렸다. 아르웬의 머릿속에 있는 아버지 한의 기억을 언니가 잘라내 버렸다. 잘라내 버리는 바람에 아르웬은 이제 기억나질 않는다.

아버지의 이름도, 아버지의 모습도, 아버지와의 추억도 기억나질 않는다. 인간 형태로 이루어진 새하얀 무언가만 떠올라질 뿐이다.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아르웬이었으나, 무의미했다.

“왜 그런 겁니까? 왜, 왜!”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의 소중한 언니인 카르디안이다. 카르디안 언니가 노래를 이용해 아르웬의 머릿속에서 친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말았다. 아르웬이 하지 말라고 애원했음에도 끝내는 전부 지워버리고 말았다.

사실 지운 게 아니라 봉인한 것이지만, 그런 걸 아르웬이 알 리가 없었다.

"어째서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어째서 이럴 수 있는 거냐고요!"

원한으로 가득 담긴 목소리로 아르웬은 언니를 맹비난했다.

"세뇌에서 풀려났다고 들었어요. 더는 악마의 말에 복종하는 처지가 아니라는 걸 들었어요." "그래, 그 말은 사실이지. 너그러우신 주인님의 은혜로 나는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났어. 이제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지." "그렇다면! 왜 따르고 있는 거죠?"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데 왜 벗어나지 않는 거죠? 왜 그 녀석의 말을 듣는 겁니까?"

언니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을 때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아르웬은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지만, 아주 끔찍한 일들을 당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붙잡힌 여성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봤으니까. 놈에게 겁탈당해 절규하다가, 끝내는 무너져 녀석의 노예가 되기로 자처한 여자들을 아르웬은 보았다.

그러니 언니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게 정상이 아닐까? 그렇게 끔찍한 짓을 당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쳤어야 하는 거 아닐까? 도망치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공포에 떨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 저렇게 웃을 수가 있는 거지? 어째서 악마의 하수인을 자처하고 있는 거지? 정신이 멀쩡한 상태인데 어째서 녀석의 편을 드는 거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언니의 태도를 아르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이 날 원하시니까."

카르디안은 대답했다.

"주인님은 이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해. 정복하기 위해선 인재가 아주 많이 필요하지. 주인님에게 있어서 나는 그런 인재 중 하나야." "그래서, 복종하기로 했다?" "응, 대우도 좋은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요?”

고초를 겪었으면 다시는 보기 싫어해야 정상 아닌가? 아르웬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카르디안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단다, 동생아. 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지른 주인님이라도 정당하게 대우해주면 받아들이는 게 도리야.” “무슨 궤변을….”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난 죽어.”

그리드에게 빌 붙여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카르디안은 말했다.

“너도 아시다시피 다른 나라들은 그리드와 함께한 자들을 전부 공범이라 여기고 있어. 강제로 복종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지. 만약 잡히면 난 효수당할 거야.”

그리드가 잔학성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인성이 좀 나아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멸망한 네치아 왕국을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려지자 더욱 그리드를 용서해서는 안 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런 악마에게 협력한 자들은 모조리 다 죽여야 한다는 여론 역시 형성되었다. 아무리 억울하게 악마의 편이 되었다고는 하나,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게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 이유로 만약 카르디안이 도망쳐도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오직 단두대뿐이다.

“아르웬, 너도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봐.” “그, 그런 건 제가 설득하면 아무도 언니를….” “그건 네가 이겼을 때 얘기지.”

동생의 턱을 어루만지며 카르디안은 반박했다.

“하지만 너는 졌고, 주인님의 것이 되었지. 주인님의 것이 된 너의 말을 누가 들어줄까?” “아,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배척하지는….” “과연 그럴까?”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카르디안은 물었다.

“주인님과 엮인 자는 누구든 다 대역죄인으로 취급하는데 과연 너의 말을 믿어주기나 할까?” “그, 그건….” “믿어주지 않으면 주인님에게 빌 붙여 사는 게 답이야.”

어차피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 찍은 인재를 주인님이 놓칠 리 없으니까.

그리고 기적적으로 도망가도 남은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자발적으로 주인님에게 협력했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쪽에 도박을 하는 게 가장 이득이 아닐까? 자신을 진심으로 원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거는 게 가장 현명한 답이 아닐까? 그러는 게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는 유일한 답이 아닐까?

그래서 카르디안은 선택했다.

"그래야 어머니를 지킬 수 있어."

악마의 편에 서기로. 악마의 편에 서서 세상을 정복하기로. 만약 세상이 자신들의 죽음을 바란다면 역으로 굴복시켜 버리자고. 그게 유일무이한 방법이라면 따르겠다고 카르디안은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했기에 카르디안은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

하수인이 되어 강림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동생 아르웬도 그리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아르웬, 너도 이제 떼쓰는 거 그만하고 주인님을 받아들여. 주인님은 널 포기하시지 않을 거니까.” “웃기지 마세요!”

그런 언니의 말에 동생은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 악마 새끼의 따까리가 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짓을 당해도 저는 녀석의 노예가 되지 않을 거라고요!” “내 말이 맞아도?” “네!”

그래, 언니의 말은 이해한다.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악마와 거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 언니의 말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그리드와 엮인 자들은 누구든 간에 죽여야 한다고 여기니까. 마치 전염병에 걸렸으니 생매장한다고 말한다. 왜 그래야 하나 의문이 들지만, 그리드가 저지른 짓거리들만 생각하면 괜한 걱정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사람들의 증오심이 상상을 초월하니 악마의 편에 서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걸까?

끊임없이 악마에게 강간당하고, 끊임없이 악마의 자식들을 잉태하고, 끊임없이 촉수에 농락당한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영혼이 가루가 될 때까지 농락당한다.

그런 짓을 매일 당하는 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오직 그런 걸 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건가? 아무리 악마와 거래한 대가라고는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런 악마 새끼랑 손을 잡는 게 진심으로 옳은 일인가? 언니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도 아르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정하기 어려울 거야. 나도 인정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라고 카르디안은 운을 뗐다.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해도 살아갈 수 있어. 주인님을 우리 가족을 버리지 않으니까. 왕족으로 취급해주는데 어찌 그분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니?” “잠깐만요.”

문득,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아르웬은 물었다.

“우리가 왕족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주인님이 우릴 로열 피그 0호로 지정하셨거든.” “로열…피그요?” “그래.”

카르디안은 설명했다.

"내가 주인님에게 부탁했거든. 평생 따를 테니 우리 가족들의 신변을 보장해달라고. 그러니까 주인님이 우릴 로열 피그 0호로 삼겠다고 하셨지. 왕족으로 대우해주겠다고 하셨어." “왕족이라니, 전혀 왕족 대우가 아닌데요?”

지금 촉수에 겁탈당한 자신을 보라. 이게 무슨 왕족 대우인가? 아르웬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게 로열 피그가 해야 할 일이란다.”

카르디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로열 피그가 된 왕족들은 평생 주인님을 위한 병사를 잉태한다. 제국을 먹여 살릴 우유를 매일 짜낸다. 그것도 주인님의 돌봄을 받으면서. 그게 로열 피그란다.” “…그게 무슨 왕족 취급이에요.”

그런 언니의 태연한 대답에 아르웬은 격분했다.

“그냥 암퇘지 취급이잖아요!”

로열 피그라니. 왕족이라니. 겉만 거창할 뿐, 결국은 자신을 씨받이로 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게 무슨 왕족 대우라는 말인가?

'망할 악마 자식.'

다 그 악마 새끼 때문이다.

그 악마 새끼가 언니를 광인(狂人)으로 만들었다.

그 악마 새끼 때문에 어머니마저 광기에 빠지고 말았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복수할 거다. 반드시, 언니와 어머니를 망가뜨린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반드시, 반드시….

"라아아아…." "흐꺄아아악?"

카르디안이 갑자기 노래를 부른 건 그때였다. 노래를 들은 아르웬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축 늘어졌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네. 어서 나가자. 주인님이 덮밥을 먹고 싶어 하시니까."

동생의 사지를 묶고 있던 가죽끈을 푼 뒤, 카르디안은 양팔로 아르웬을 안았다. 안은 상태로 밖으로 향해 걸어갔다.

"아, 안 돼. 언니, 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이야아아아…."

당연하게도 아르웬의 애원이 통할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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