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 - 52화- 호랑이 사냥에 나선 강림
"제, 제기랄…."
실패했다. 괴물을 마을로 끌어들인 뒤,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타이를 쓰러뜨리려 했다. 상륙을 저지할 함선들은 전부 잃어버렸고, 섬에 주둔 중인 병력이 적으니 차라리 방해물이 많은 마을을 결전 장소를 쓰는 게 낫다고 아트리아는 그리 판단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거대한 호랑이를 막기 위해 나선 창병들은 사이좋게 핏물을 머금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고, 놈을 막기 위해 화력을 쏟아부었던 마법사들은 예외 없이 타이에게 씹어 먹혔다. 호랑이, 타이의 무지막지한 전투력 앞에 전부 도살당했다.
'하다못해 함대라도 살아있었다면….'
쓰러뜨리지 못해도 견제는 할 수 있었을 거다.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그 귀중한 함선들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뼈아픈 실책에 아트리아는 한심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분명 다 숨겨놨었는데….'
다섯 척의 호위함 중 세 척을 잃어버린 아트리아는 불안에 휩싸였다.
이대로 남은 배들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이 철선들은 <더 퀸즈>의 날개. 날개를 잃어버린 <더 퀸즈>는 큰 위협에 직면할 거다. 지금까지 적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철선 덕분이었는데, 그 철선들을 잃어버리면 어찌 되겠는가? 주인에게 원망을 품은 자들이 이를 기회라 여기고 공격해오고도 남을 거다.
물론 함선 제작은 가능하다. 주인님이 쑥대밭으로 만든 자신의 고향 땅에 생산 시설을 만들어놨으니까.
다만, 현재는 가동을 중단시킨 상태다.
대규모 함대를 운영하기에는 너무 미숙하니까. 마음만 먹으면 함선들을 팍팍 찍어낼 수 있지만, 이를 다룰 유능한 인재들이 부족했다. 주인님이 자신의 노예로 써먹기 위해 세뇌한 카르디안과 장교 후보생들로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주인님이라면 인재가 부족해도 어떻게든 대규모 함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이라 불렸던 여자에게 해전에 대한 지식도 전수하였으니까. 전수한 지식을 토대로 그리드는 자신을 향해 복수하려는 자들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하지만,
현재 주인님 상태를 고려하면 함대 총지휘권을 맡기기에는 불안했다. 왜냐하면….
'미안한데, 나 함대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몰라.'
그리 말했으니까.
자신은 해군에 복무한 적이 없다고. 육군에 복무했지만, 너희들처럼 간부를 목표로 입대한 게 아니라고. 썩을 나라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강제 입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러한 이유로 해전에 대한 지식은 그리드와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하나도 없다고. 이런 자신이 함대를 운영을 맡기는 건 도둑놈에게 보물 창고를 맡기는 거나 다름없다고. 물론 공부는 하겠지만, 당장 너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얘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함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현 주인님이 지금보다 유능한 인간이 될 때까지. 지금보다 인재를 더 많이 확보할 때까지는 임시 보류다. 그때까지 지금 함대만큼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남은 함선들을 숨겼거늘, 아트리아는 귀중한 함선들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함선들을 숨긴 곳을 나 말곤 모르는데, 어찌 알아낸 거지?'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다 함선들을 숨겨두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곳에 놔두지 않고 여러 장소에 분산시켜놨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숨겼던 함선들이 전부 격침당했다. 마치 사냥하듯이 매일 한 척씩 수장당했다. 눈앞에 있는 이 타이라는 호랑이 괴물에 의해서.
수인 연합이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아트리아는 그리 짐작하고 있었지만, 타이가 직접 나설 줄은 아트리아는 진짜 몰랐다.
그것도 금단의 기술까지 쓸 거라곤 아트리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려도 안 쓸 거라 여겼는데….'
수인 연합을 정복하기로 그리드가 계획을 세웠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호랑이족과 구미호족을 찍었다.
이들은 선조들의 원래 모습인 괴수로 변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다른 수인들은 신경 쓸 것 없지만, 이 두 종족만큼은 철저하게 제압해야만 한다. 그리드는 그리 주장했다.
현재 경계 대상 중 하나였던 구미호족은 주인님의 노예가 되었으며, 그 기술을 사용하는 귀물 역시 주인님이 품게 되었다. 더는 해적 함대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남은 건 호랑이족이지만, 아트리아는 쉽게 쓰질 못할 거라고 봤다. 쓰는 대가가 이성을 잃고 짐승으로 돌아가는 건데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쓸 수 있을까? 아무리 저돌적인 호랑이족 수장이라도 자신의 이성을 담보로 금기를 범하지 않을 거라고 봤다.
그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으으으…."
놈이 이런 녀석인 줄 알았다면 완전히 세뇌해야 한다고 조언해야 하거늘. 왜 그러질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런 처참한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아트리아는 몹시 후회했다.
"으아아, 아아아…."
흉갑이 우그러진다. 우그러지면서 근육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내지른다. 뼈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경고음을 울린다. 숨을 쉴 수 없는 지경까지 압박당하니 아트리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주, 주인님…죄, 죄송합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다고 생각한 아트리아가 눈을 감은 순간,
-콰아아아앙!
무언가가 호랑이의 머리를 강타했다. 호랑이는 순간 휘청거렸고, 아트리아를 짓누르던 앞발도 살짝 떠올랐다.
"아트리아, 너, 괜찮냐?"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아트리아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본 아트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 주인님…."
낡은 군복을 입은 흑발의 사내. 아트리아가 진심으로 모시는 주군, 그리드였다.
●●●
"아트리아를 실험실로 데려가. 거기라면 안전할 거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병사는 기절한 아트리아를 데리고 떠났다.
'지금은 그쪽이 더 안전할 거야.'
거북이족 전사한테 들었다.
현재 여우섬에 남아 있는 함선은 없다고. 그래서 외부로 도망칠 수단이 없다고.
그 말을 들은 강림은 여우섬에 도착하자마자 탈리아의 실험실로 향했다.
'그, 그리드? 다행이다. 살아있었구나.'
예상대로 실험실에는 탈리아를 포함해 구미호족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 괴수가 날뛰고 있고, 도망칠 배도 없는 마당에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지하 대피소가 있는 실험실뿐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었는데, 만약 짓질 않았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탈리아는 물론이요, 귀중한 자원들도 무사하다는 것에 강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여기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어. 나는 타이 새끼를 잡으러 갈 테니까.'
불안에 떠는 탈리아를 진정시킨 뒤, 강림은 바로 전장으로 향했다. 가서 아트리아를 구해낸 강림은 자신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호랑이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미 들었지만….’
강림을 침을 꿀꺽 삼켰다.
‘장난 아니네.’
그냥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오금이 저려온다. 놈의 검은색 털을 보는 것만으로도, 검게 물든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을 보는 것만으로도 졸도해버릴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무시무시해졌다.
타이가 왜 검정 호랑이가 되었는지 강림은 알 수 있었다.
‘<흑광>을 먹다니. 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흑광>.
검을 흑(黑)자와 미칠 광(狂)자를 합성한 이 단어는 <여우의 은총>에서 나오는 희귀 약물의 이름이다.
이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간단하다.
먹으면 흑화하니까. 캐릭터가 해당 약물을 복용하면 잠시간 능력치가 스무 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를 받게 된다. 이와 더불어 캐릭터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고대 문명을 일구어냈던 조상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 모습은 바로….
-쿠워어어어엉!
타이가 아가리를 벌린 채 돌진한다. 강림은 옆으로 한 바퀴 구른 뒤, 잽싸게 앞으로 도약했다. 타이의 목덜미를 향해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카앙!
마치 단단한 금속 물질에 맞부딪친 것처럼 강림이 휘두른 망치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이, 이런!”
강림은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바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다, 쏴라!”
그 말과 동시에 숨어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긴다. 목표인 호랑이 괴수를 향해 발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불화살이 타이의 몸에 꽂힌다.
-쿠워어어어엉!
타이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를 본 강림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트리아가 말한 대로야.’
이송되기 전, 아트리아는 몇 가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알려줬다.
‘녀석은 불에 취약한 것 같습니다. 벼락에 맞아도 끄떡도 안 했지만, 불은 아니었어요.’
불에는 약하다. <흑광>으로 강화되어 모든 통상 공격이 먹히지 않지만, 불 속성 공격은 통한다. 그 말을 들은 강림은 미리 궁병들에게 불화살을 준비하라 지시했고, 그 준비가 헛된 것이 아님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강림은 다음 지시를 내렸다.
“마법사 부대! 파이어 볼을 날려라!”
마찬가지로 숨어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읊조렸다. 하늘 위에서 수많은 불꽃 덩어리가 일제히 괴수를 향해 낙하한다.
-쿠워어어어엉!
괴수가 있던 자리가 화마로 뒤덮인다. 화마에 뒤집어쓴 괴수는 더욱 고통에 몸부림친다. 산채로 태워지는 모습에 강림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이,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게임에서 나름 애정을 준 캐릭터였고, 죽이기보다는 모체로 사용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흑광>을 써서 괴수가 된 자는 다신 돌아올 수 없으니까.
게임상에서는 능력치 향상과 더불어 약물을 복용한 캐릭터를 괴수로 만든다. 잠시간 효과에 불과하기에 괴수가 된 캐릭터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게임에 나오는 이야기에선 한 번 <흑광>을 복용해서 괴수가 된 자는 다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흑광>을 먹은 타이를 구할 방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소리다.
‘짜증 나는 놈이긴 했지만….’
강림은 근처에 있는 마법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목받은 마법사는 강림의 망치에다 속성을 부여했다. 쇠망치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편히 보내주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강림은 있는 힘껏 달려 나갔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타이의 머리통을 향해 망치를 내리꽂아….
-쿠어어어어어어엉!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가 마을 전체에 퍼져나갔다.
“우아아아악!”
사나운 돌풍과 함께 강림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궁병들도 마법사들도 타이가 내지른 하울링에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크으으으윽….”
망치를 땅에 꽂는 것으로 강림은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데리고 온 병사들은 전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싸울 수 있는 자는 강림 혼자뿐이었다.
“제, 젠장 좀 얌전히 당해주면 덧나…윽?”
묵직한 충격이 옆구리를 강타한다.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강림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가구 몇 채를 부수고, 나무들을 쓰러뜨린 끝에서야 강림은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으윽, 타, 타이 이 개, 개새끼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강림. 꼬리에 얻어맞은 오른쪽 옆구리는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오른팔도 문제가 생겼는지 감각이 없었다.
당장 후방으로 이송되어야 할 상황이나, 강림은 갈 수가 없었다. 아직 살아있는 왼손으로 망치를 들어 전방에 있는 괴수를 노려봤다.
-크르르르릉
괴수도 마찬가지로 강림을 노려봤다. 마치 원수라도 본 것처럼 눈빛에는 살기가 기세등등했다. 어쩌면 이성을 잃었음에도 그리드에 대한 복수심은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 어서 와라. 타이야.’
네 마지막 곱게 보내줄게. 결전에 임하는 용사처럼 각오를 다진 강림은 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타이의 등 뒤에 커다란 불꽃 덩어리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쿠워어어어어!
하울링을 써서 몸에 박힌 화살과 붙은 불을 전부 떨쳐낸 타이는 난데없는 공격에 또다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게 무슨…."
정작 이를 본 강림은 당혹스러웠다. 대체 누가 쏜 걸까? 쓰러진 마법사 중 누가 날린 건가? 하지만 날린 것 치고는 날린 화염 덩어리가 상상 이상으로 큰데.
그렇게 의문을 표하던 순간, 강림 옆에 누군가가 착지했다.
"혼자서 가도 된다더니, 거하게 당하셨네요, 주인님."
한 사람은 이리스. 그리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냥 나를 데려가지. 왜 고집을 부려서…."
수아가 이리스에게 안겨 있었다.
“아, 아니. 왜 너희들이 여기에….”
기함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나타난 것에 강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