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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형님 요새 뵙기가 힘들어요."
"바쁘다. 알바한다."
"뭘로요? 공사판? 공장? 도배장판?"
"……씨발 카페 영화관 식당 이런 걸 물어라."
태진이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학생회관이다. 유경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처리되어 휴학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태진은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듣는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밤마다 지옥으로 소환되어 바알과 함께 새로운 지옥 바른 지옥을 위해 투쟁하게 된 것이다. 트리플 드래곤의 이름은 이제 지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낮에는 평범한 학생이나, 밤에는 진정한 지옥의 혁명을 위해 싸우는 투사이다. 밤에는 악당과 싸우고, 낮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히어로물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에 태진은 요새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그런가 형님 요새 옷도 잘 입으시고. 시계 그거 비싼 거 아니에요?"
"흠 뭐 돈 좀 썼다."
"아, 저도 알바 말고 취직하고 싶다. 요새 취직하기 힘들다는데. 대기업 가야지."
"적당히 자리 잡아서 일하면 되지 꼭 대기업 가야 되냐?"
"그래도 그렇잖아요."
"저녁에 고기나 사줄게 임마."
"오오. 형님 좋지요."
"소고기로."
"아니 뭐 로또 되셨어요? 학식 먹으실 분이 아닌데?"
태진은 여유가 넘쳤다. 곳간에서 인심난다. 바알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현세의 자금은 그에게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바알은 그의 통장에 상상하기 힘든 금액을 쏘아주었다. 곧 차도 한 대 살 생각이다. 트리플 드래곤의 또 한 명이자 그의 전우인 허용호는 오랜 소원이던 호화 홈시어터를 세팅했다. 여자친구도 생겼다고 한다. 태진도 값비싼 외제차 한 대 뽑고 여자친구 꼬시는 생각을 했었으나 돈 때문에 사람이 변하기는 싫어 소소하게 일상을 즐기는 중이다.
"뭐, 일이 좀 잘 됐다."
태진이 말하다가 문득 익숙한 얼굴을 저 멀리에서 발견했다.
소희였다.
학교 축제에서의 사건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여전히 조용하기는 한데, 활력이 생겼다. 가끔 그 남자친구놈과 캠퍼스 거니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예전에는 그게 부럽기만 한 먼 일 같았으나, 이제 바른 지옥을 위해 싸우는 자신 또한 특별한 존재이다. 태진이 손을 흔들자 소희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 소희랑도 인사하고 다니시고 잘나가시네요."
"뭐 그냥 아는 사이지."
불쑥, 뒤에서 소희의 눈을 가리는 손이 있었다. 소희가 깔깔거린다.
후배놈이 인상을 썼다.
"아 부럽다. 개좋겠다."
"너 여자친구 있잖아."
"소희만큼 안 예쁘잖아요. 소희랑 사귀면 어떤 기분일까."
"이 새끼야. 사랑하는 사람 있는데 그러지 마라. 트루 러브를 해야지."
후배가 흐흣 웃었다. 형님 요새 변하셨어요. 라고 했다. 변하셨어요. 아니 변한 건 없었다. 바른 걸 바르다고 하게 된 것뿐이다. 위악을 관두었다. 아는대로 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힘이다. 힘이 생겨야 믿는 대로 옳은 바를 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상이 슬픈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그러게, 소희는 밤에 어떤 모습으로 섹스할까, 이딴 뒤에서 까는 헛소리들로 위안하고 서로 낄낄대었을 것이나, 그런 미성숙한 유년은 지났다. 씹선비 새끼…… 하고, 사람된 도리를 말하는 이를 비웃을 만큼 뻔뻔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맹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알을 보았으므로, 무엇이 정녕 작고 비굴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태진은 다시 스스로 뇌까렸다. 너는 변하였는가?
"어머, 죄송합니다!"
북적한 학생회관 학생들 틈에서 종종걸음으로 식판을 옮기던 여학생이 거짓말처럼 다리가 꼬이며 태진의 바지에 국물을 쏟아버렸다. 마치 태진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누가 억지로 연출한 듯한 장면이다. 허벅지로 쏟아진 된장국에 살갗이 화끈거렸으나 태진은 이제 맹호, 이정도에 동요하지 않았다. 흘끗, 시선을 후배에게로부터 그 여학생으로 움직였다.
당황한 얼굴, 미안함, 두려움 따위가 뒤섞인 표정이다.
그리고 예쁘다.
예전이었다면 오히려 황송해서 자신이 어쩔 줄 몰라 괜찮다고 하며 공손했을 것이나…… 태진의 안에는 이제 진정한 여유가, 진정한 강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를 이끄는 것은 일상의 작은 탐욕이나 번식욕이 아니라 진정한 투쟁이다.
"괜찮으니까 휴지 없어요?"
"아, 그, 여기요. 여기요."
여학생이 식판을 엉거주춤 태진의 식탁에 놓고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냈다. 태진이 받으려고 했으나 여학생이 한사코 자신이 태진의 허벅지를 닦아주었다. 바지가 다 흡수해서 제대로 닦이지도 않았다. 바지에서 된장내 훅 끼쳐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많이 놀라셨죠. 괜찮습니다."
"어우……."
여학생이 손 가득 젖은 휴지를 든 채 생각했다. 이 남자 당황 않고 여유 있는 모습이 제법 괜찮은데?
"세탁비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태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세탁비는 됐구요. 그냥 다음에……."
"네……?"
설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후배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변한 줄 알았던 이 사람이……?
그 여학생 또한 들고 있던 휴지를 떨어뜨렸다.
이 남자 설마했더니 이 상황에서……?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 또한 긴장했다.
케이블 채널 재연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를 칠려고……?
그리고 태진이 말했다.
"또 이런 일 없게 편한 신발 신고 다니세요. 높은 힐 불편하잖아요."
후배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위 사람들은 태진이란 남자의 수준에 안도했다. 그리고 여자는.
거짓말처럼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네.
태진이 여자의 식판을 들어서 여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면서, 이대로 멀어지기보다 태진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태진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
수현은 학생회관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를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둘은 학식을 함께 먹고 일어나는 참이었다.
저 남자에게서 정글의 냄새가 난다. 꽤 세다. 이런 학교에도 저런 사람이 숨겨져 있다니 세상은 요지경 같다. 어쨌거나 수현은 소희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서 막 껴안고 싶어졌으나 그녀가 앙탈을 부려대서 그냥 손만 잡고 있었다.
"야. 정태 얼굴도 봐야지."
소희가 뾰루퉁한 얼굴로 수현에게 말했다.
수현이 사라졌다가 돌아온 후, 다시 만난 건 소희뿐이다. 수현에게는 더 질기게 얽힌 정하와 예브게냐, 이브린과 올가가 있으므로 기존의 관계들이 크게 다가오질 않았다. 하지만 소희를 통해 예전의 인연을 돌이키자 사람된 도리라는 것이 다시 마음에 걸렸다.
"나 때릴 것 같은데……."
"흥. 나도 때리려다 말았으니까."
"너 나 때렸잖아."
"안 그랬는데?"
"너 입술로 내 입술 때렸잖아."
"꺄, 뭐야. 바보가."
소희가 수현의 가슴을 쳤다.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태가 너 때리면 막 청춘 드라마 같겠네. 왜 이제야 돌아왔어 이러면서 주먹으로 때리는 거야? 그리고 둘이 서로 주먹질하다 누워서 하하 웃고?"
"아니 그냥 내가 한 대 맞고 쓰러질래……."
"보고 싶다 그 광경. 맞다. 진하랑 정태랑 사귀는 거 알아?"
"그래? 잘 어울린다."
"송진하 여우라니깐. 정태가 몰라서 그렇지 정태 꼬실려고 뒤에서 얼마나……."
소희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토록 밝은 여자애였으나 그런 모습 전에는 알지 못했던 학우들이 묘한 눈으로 소희를 보았다. 사랑이 사람을 바꾸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둘은 회관을 나와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한창 겨울이라 바람이 옷깃 틈으로 새어들었다. 소희가 옷깃을 새우자, 수현이 팔로 소희의 목을 감아 바람을 막았다. 소희는 앙탈을 부렸으나 싫지 않은 듯 수현에게 몸을 기댔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둘이 돌아보자,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옷을 굉장히 센스 있게 입었다. 생글생글 웃는 눈이 수현을 향하자 소희의 인상이 살짝 굳었다.
"저기 딴 게 아니라 저 의류학과 학생인데 두 분 보기 좋으셔서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옷도 잘 입으신 거 같은데 레포트로 스트릿 패션 모아서 피피티 발표하는 과제가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제 블로그에도 올리고 싶은데 안 내키시면 피피티에만 내도 되구요. 사진 잘 찍어요. 예쁘게 찍어드릴게요. 사진도 메일로 보내드릴거구요."
괜찮을까요……? 하고 여학생이 혀를 내밀며 웃었다.
"네."
소희가 수현의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난 별로 안내키는데……."
"왜?"
소희가 뾰족하게 물었다.
"그냥 찍히는 거 별로……."
"왜 싫은데?"
수현이 소희를 쳐다보았다.
"아니, 너랑 같이라서 싫다는 게 아니고."
"당연히 아니어야지.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 찔리니?"
"아니야. 찍자. 찍어주세요."
"말 돌리는 거 같은데."
"자꾸 그러면 입 막아버린다."
"와. 힘으로 막게? 이것봐. 남자들 이렇다니까. 자기 불리하면……."
수현이 소희에게 입 맞췄다.
소희의 눈이 커졌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꼴을 보고 있던 여학생도 깜짝 놀라, 사진기를 잠깐 들다가 내려놓았다. 수현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막는다고 그랬지?"
소희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수현의 옷자락을 쥐었다.
"야. 그……."
"찍어주세요."
"아니, 시, 싫…… 안찍을래요."
"아뇨. 찍어주세요. 찍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