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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운무시에 자리한 수현의 둥지, 정하와 예브게냐, 올가, 이브린이 있다.
수현은 소희 만나러 서울 갔다. 넷은 각자 취미생활을 즐기는 중이다. 정하는 요새 게임도 접고 요리를 베우는 중이다. 수현에게 음식 먹일 거라며 시작했는데, 그 광경이 조금 기괴했다.
주방 가운데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손에 물 하나 안 묻힐 도도한 자세.
재료들은 허공에서 슥삭슥삭 잘려나가고 허공을 날아 냄비에 빠진다. 고기들은 알아서 손질되기 시작했다.
마력을 통한 염동력으로 모든 과정을 처리한다.
"언니……."
"왜. 맛 없어?"
식탁에서 시제품을 우물거리던 올가가 말했다.
"아니요. 맛은 괜찮아요."
"그치?"
"근데 좀……."
"좀?"
"직접 칼로 썰고 손질도 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왜?"
"원래 그러는 쪽이 주인님께 어필할 거에요. 에이프런이라도 두르고 가정적인 모습 보이고 그러는 게 언니의 반전 매력이 될 텐데 지금 이 광경은 조금……."
폴터 가이스트 마냥 허공에서 재료들이 움직이고, 이따금 붉은 칼날이 재료들을 스치고 지나가 산산히 조각내는 모습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에 가깝다. 정하는 턱을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싫어. 난 손에 물 안 묻혀."
"……네."
뭐 주인님은 이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또 달려들겠지만.
"내 목표는 주인님 살을 찌우는 거야. 살을 찌우면 뱃살 볼살이 생기곘지? 피둥피둥? 그럼 난 그 살을 꼬집으면서 놀 거야. 귀엽겠다. 그치?"
정하의 말에 올가가 그 모습을 상상해봤다. 주인님 몸에 살이 오르고, 피둥피둥, 그리고 그 살을 깨물고 만지작거리면…….
엄청 귀엽겠다. 올가를 향해 정하가 씩 윙크하고는 냄비 가득 고기 조림을 익히기 시작했다. 올가는 정하의 발상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저 광경은 조금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무엇인가 느껴졌다. 올가와 정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하지만 벨소리보다도 둘을 자극하는 것은 대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이었다.
정글의 방문자가 있는 것이다. 정하와 예브게냐에, 이브린마저 있으므로 거리낄 것은 없었으나, 정글과 연관될 일은 근래에 없을 터였다.
예브게냐 또한 이층에서 내려왔다. 짧은 팬츠 아래로 늘씬한 각선미가 하얗게 빛났다.
"뭐야? 누구야?"
"글세요? 딱히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몰라. 물어보면 되겠지."
예브게냐가 성큼성큼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거실의 이브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텔리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올가가 예브게냐 곁을 종종 따랐다.
예브게냐가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한 여자의 얼굴이 표시됐다.
"……."
"……."
그 여자의 고혹적인 미모를 본 순간 예브게냐와 올가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거 또 분명 주인님이랑 얽힌 일 같다.
*
키시노는 감탄했다.
이 저택을 온갖 마법과 결계가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진식을 유지하는 엄청난 마력은 이곳 저택의 구성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기,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인형같은 소녀는 드래곤이다.
그리고 자신과 마주 앉아 노려보고 있는 작은 소녀 또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음……."
이브린을 말할지, 그 소년을 말할지 애매해졌다. 하지만 그 소년이 없는 것 같으므로 이브린을 언급했다.
"이브린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이브린이라는 말에 소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소녀가 슬그머니 팔짱을 푼다.
"무슨 용무로요? 이브린님. 여기 이브린님 보러 왔다는데요?"
"나 말이냐?"
이브린이 소파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두둥실 떠오르더니 둘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소녀의 인형 같은 자홍색 눈이 둘을 향했다. 키시노는 이브린을 향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브린은 천천히 둘을 향해 날아오더니, 올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브린이 벗어난 자리에 예브게냐가 털썩 드러눕더니 채널을 돌렸다. 이브린이 거슬린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빨리 말하거라. 바쁘니."
"그 전에, 그 소년은 어디에 있죠?"
"소년……?"
"이브린님의 애인. 말이에요."
그 말에 올가가 다시 팔짱을 끼며 표정을 굳혔고, 이브린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냐?"
"언제 오나요? 그 사람이랑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데."
"……."
올가의 표정이 뾰루퉁해졌다.
저 뒤에서 와사삭, 하고 무엇인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정하가 무우 하나를 조각조각 자르고 자르고 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부터 붉은 요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정하가 흘끗 고개를 돌려 키시노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내가 누군지 아나보네. 동생아."
"대충은 들은 적 있고. 다시 언니 운운하면 죽여버린다."
둘 사이에 전류가 흘렀다. 예브게냐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 둘을 구경하고 있다.
"흡혈귀 투네 투. 웃긴다. 똑같은 애들끼리 싸우고 있어."
외모는 조금 다르나 둘의 분위기나 기세는 같은 엘리제의 직계임을 숨길 수 없이 닮았다. 예브게냐가 옆에서 킬킬거리자 정하와 키시노가 동시에 그녀를 노려봤다. 예브게냐가 어깨를 으쓱했다.
"성깔도 비슷하네 뭐."
올가가 분위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주인님은 지금 데…… 데이…… 트…… 으득…… 하고 있어요. 나중에 올 거에요."
"데이트? 누구랑? 애인 또 있어?"
"뭐…… 많아요."
키시노가 정하와 예브게냐를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흐음. 다들 재주가 없나보네. 넷이서 남자 하나 못 붙잡아서 외도하게 만들어?"
스팟.
순간 허공이 핏, 비틀리며 키시노의 목줄기에 가느다란 상흔이 떠올랐다. 혈향에 민감한 정하와 키시노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녀의 흰 목에서부터 핏줄기가 희미하게 배어나왔다.
"……."
"입조심하거라."
이브린이 평온하게 키시노를 쳐다보았으나 이미 무시무시한 기운이 저택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창백해진 올가가 이브린의 어깨를 잡고 흔든 후에서야 기운은 사그라졌다. 예브게냐가 현기증난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놀랬잖아."
정하가 주방에서 걸어와서는 이브린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미안하구나."
"저런 애 신경쓰지 말고."
정하가 고개를 숙여서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의 입술에 쪽, 입맞추었다. 이브린이 미세하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자연스러운 스킨쉽에 키시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옆에 앉았던 올가가 마치, 언니 저두요, 하는 눈빛으로 정하를 쳐다보자, 정하가 웃으며 올가에게도 가볍게 키스해주었다.
이들의 밤이 어떨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아브락사스."
"……?"
"그 명확한 원리에 대해 알려줄 수 있나요?"
"아브락사스……."
한때 만들었던 적이 있다. 수현과 싸우기 위해 탐욕스러운 남자에게 그것을 주었었다. 지금이야 수현을 만나기 위했던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 미화하고 있지만, 그 남자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불쾌하다. 이브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주된 용도는 진화이지."
"그래요. 그리고 어떻게 진화하게 되는 거죠?"
"……."
이브린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당신이 만든 문제죠."
"……?"
키시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 삼 년 전, 한 미치광이 살인마가 일본에 상륙했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능력자들을 도륙했고 자신의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랜 시간 타치바나구미의 영역이었고 몇 세기간 도전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학살과 공포는 타치바나구미의 성채를 쉬이 무너뜨렸다. 열도는 피로 물들었고, 그 중심에는 피에 미친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핏물이 물에 번지듯, 그 광기 또한 전염되어 그녀 휘하의 능력자들은 하나같이 미친개처럼 피를 탐하고 투쟁하는 투견들이다.
난데 없이 나타난 재앙같은 존재에 키시노는 상대의 이력을 조사했고, 한국에서 건너온 자라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성향과 행동양식, 곁에 함께하는 초산이란 오른팔을 보고서 상대의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김상호. 한국에서도 악명 높던 욕망에 취한 사나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정한 짓도 더러운 짓도 서슴치 않던 자가 이젠 소녀의 몸으로 어마어마한 힘까지 가지고 나타났다. 라이칸스로프로서의 힘도 있었으나, 본신의 힘보다도 더러운 처세와 술수로 유명하던 자였는데 이젠 미증유의 힘까지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브린의 아브락사스를 통한 것이란 것도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은 대위기였다. 타치바나구미의 세력도 부서졌지만, 그 휘하의 중소 클랜들은 전멸되거나 귀속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자가 되어서도 그 더러운 취향은 변치 않는지 반반한 여성 능력자들은 죄다 능욕했다.
이젠 일본 전체가 하나로 연합해 그녀에게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본이라는 이름 하에 연합하기에는 애초에 능력자들에게 애국심의 개념이 희박하고, 차라리 그녀에게 붙으면 최소한 욕망에 충실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돈과 여자, 욕망을 그녀는 무제한으로 허용했다. 그래서 타치바나구미에서 떨어져나가 그녀의 세력, 슬래터 클랜에 합류하기도 했다. 생각 없이 다 죽이는 학살자 같으면서도 교묘한 술책으로 타치바나구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균형의 수호자들에게도 제소했지만, 정글이 드러날 짓은 하지 않았기에 정당한 정글의 룰, 약육강식의 일부라는 대답을 받았을 뿐이다.
사실 그녀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패하지는 않겠지만, 변수가 많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으며, 그것은 운과 전술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그러한 위험부담을 굳이 감수하느니 키시노는 나은 길을 찾아온 것이다.
"당신이 만든 아브락사스."
"……?"
"성공했어요. 그 김상호란 자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서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죠."
정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묵은 원한이 타는지 그녀에게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진심이야?"
"죽은 게 아니었더냐."
이브린조차도 아브락사스가 성공한 사례를 본 적 없었다. 그 시체는 김상호의 것이었다.
"설마……."
이브린이 무엇인가 짐작 간다는 듯이 말을 하려는 순간, 현관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수현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키시노가 입술을 핥았다. 그 소년은 이제 자라서, 풋풋함을 넘어 숨막히게 퇴폐적인 관능을 내뿜고 있었다.
"누구에요?"
올가에게 이끌려 수현이 키시노와 마주 앉았다. 양옆에서 이브린과 올가가 수현의 팔을 차지해서 안겼고, 뒤에서 정하가 수현의 목을 감았다. 어둠, 어둠, 전기로 밝힌 인류의 불빛으로는 가둘 수 없는 암흑이 소년에게서 배어나오고, 마치 거미줄에 사로잡힌 듯 그에게 귀속된 세 여인의 얽힌 모양새가 보였다. 그 보이지 않는 사슬을 키시노는 볼 수가 있었다. 소년에게서 배어나오는 칠흑은…… 밤보다도 어둡고, 빛보다도 진하다.
이제야 알겠다. 소년은 허약하지만 예쁘장한 이브린의 애인, 따위가 아니었다. 이들보다 강한 주인이다.
대체 어떻게, 라고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사실관계는 인식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저 알아요?"
"두 번 봤죠."
키시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간략하게 사건을 설명했다.
"김상호를 처리해줘요. 이브린 당신이 뿌린 씨니, 당신이 거두어야죠."
키시노는 그가 저지르는 흉악을 이야기했다.
수현은 웃을 뿐이었다.
"그래야 하나요?"
인간미, 도덕에 빗댄 설득은 통하지가 않았다.
"묵은 원한이 있지만 꼭 지금 죽일 필요는 없는데. 차라리 당신 클랜이 몰살당하고 일본을 다 먹어 가장 정상에서 기뻐할 때 죽여버리면 큰 복수가 되지 않을까?"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외모는 소년이나, 누구보다도 정글에 가까운 사고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년은 예전보다도 아름다웠다.
"대가를 주죠."
"어떤 대가?"
소년이 갸웃했다. 소년을 움직일만한 대가는 많지가 않다. 하지만 키시노는 자신이 있었다.
키시노가 싱긋 웃으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를 처리하면…… 자줄게요. 날 가져도 좋아."
세 여인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