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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적과 흑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들러붙는 가죽 재질의 바지에는 체인을 늘어뜨렸다. 목이 파여 쇄골이 드러나는 흰 티셔츠에 청재킷, 등에는 기타 가방을 맸다. 날카로운 눈매에 입매에만은 헤픈 듯한 미소를 머금은 여자다.
하늘에는 달이 걸렸다.
"한국 남자들은 너무 들이대는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골목이 살짝 울리고, 그 잔향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남자들이 걸어나왔다. 그들 무리가 눈짓을 교환했다.
그녀의 뒤를 점한 남자들에게서 무기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관심 없다는데 자꾸 치근대."
소리는 없다.
그들이 일제히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기타 가방이 미끄러져내리고, 여인이 그 안에서 가파르게 빛을 흐트리는 한 자루 일본도를 뽑아들었다. 그녀에겐 조금 긴 듯하나 그 곡선은 우아하고, 달을 되비치는 잔영은 벚꽃이 만개하듯 흐드러진다. 뒷골목의 불안한 전등 아래를 가로지르는 깨끗한 몇 줄의 광채, 그리고 핏물이 바닥에 흩뿌려지고, 그 위로 몸뚱이들이 허물어졌다.
남자들은 바닥에서 경련하고 있다. 어둠 속에 떠오르는 스캐빈저들의 속삭임이 새어들었다.
그 난도질의 현장 위에서 그녀는 홀로 깨끗하다.
그녀가 철컥, 하고 일본도를 기타 가방에 들이자 거짓말처럼 그것이 도신을 삼켰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것을 어깨에 매었다.
"커컥…… 컥……."
"그 여자도 많이 급한가봐. 이런 조무래기들이라도 보내고."
밤과 피가 어울리는 여인, 키시노가 가느다랗게 웃었다. 스캐빈저의 이가 그들을 씹어삼키며 소리를 냈다. 그녀가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 낡은 함석대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손끝을 올려 천천히 밀었다.
철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내부는, 널찍한 펍이었다.
케인의 영역이다.
한국 정글의 주민들이 이미 다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펍 구석에서 눈이 바래버린 듯한 은색 눈동자의 사나이 케인이 담배를 입에 물고 앉아 있었다. 키시노는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내부를 살폈다.
다른 사나이다. 그는 키시노가 들어선 때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키시노가 그에게 걸어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수고했어."
"과연 도와줄까요?"
"하게 해야지."
"드래곤입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뒤따를 반대급부를 감당할 수가……."
"드래곤이지만 여자잖아."
"……네?"
키시노가 손을 내밀었고, 남자가 서류를 건냈다.
서류에 인쇄된 사진에는 인형처럼 아름답고, 그처럼 감정 없는 서늘한 눈의 소녀가 서 있었다. 빛을 녹인 듯한 은발에 눈동자는 선명한 홍색이다. 어려보이나 실제 나이는 까마득할 드래곤이다. 이브린. 잔혹한 드래곤.
그녀에 대한 근래의 정보들은 모든 게 불분명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한국에 머무르고 있고 그곳이 운무시라는 것뿐. 그리고 몇몇의 인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녀의 시종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녀의 성향상 친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코멘트가 덧붙었다.
친구라, 그럴까. 키시노는 굳이 입밖에 내지 않은 것들을 속에서 계산했다. 그녀는 소년을 보았다. 그 날에, 그녀는 소년을 보았고 또한 그녀의 핏줄, 정하를 보았다. 그 곁에 선 여인들을 보았다.
어차피 정글이다. 상식을 믿지 말아라, 라는 격언이 상식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
"예."
언제나 그랬듯. 키시노는 그녀가 알아서 한다.
모든 것들은 그녀가 계획하고, 그녀의 병졸들은 일사분란하게 결말을 수행한다. 그 결말이 비참했던 적은 없다.
"그 여자는 지금 뭐해?"
"동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속도가 빠릅니다. 전담반이 마크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멋대로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괜히 미친 개를 건드리면 상처만 늘거든. 죽이기 전엔 그냥 내버려둬."
"계속 내버려두면 상처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키시노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문신은 뺨에서부터 목을 타고 몸에 이른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키시노를 향하고 있었다. 키시노는 싱긋 웃었다.
"날 가르치려 드는 건 아니지?"
"……예."
"시도는 좋았어. 근데 난 기분이 안 좋네."
"죄송합니다."
"그럼 꺼져."
남자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키시노는 그가 떠난 자리에서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그녀가 한국에 온 것이 어떻게 풀릴지는 모른다. 실은 그녀에게도 불확실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도박을 피해온 이들은 모두 그녀 발 아래 죽었고 불확실성을 헤매던 그녀는 이곳에 살아 서 있다. 그녀는 감을 따랐다. 엘리제에게서 내려온 뱀파이어의 혈맥, 그를 따라 심장이 밀어올리는 그 혈액, 그 맥박 속에서 그녀는 항상 어떤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예감이 그녀를 이끈다.
이브린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아니, 그 소년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년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
새하얀 소녀가 잠들어 있다.
소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열리고 노란 광채가 피어올랐다. 눈가에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어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하얀 알몸, 야트막한 가슴 위에 분홍색 꼭지가 비친다.
호화스러운 호텔 침대 위였다. 시트에서 날씬한 종아리가 빠져나와서는 바닥을 딛었다. 가느다랗지만 단련된 근육이 응축된 신체였다. 몸짓이 경쾌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아, 하얀 신체 위에 분홍색 반점과 다리 사이의 붉은 터럭이 도드라졌다.
"일어나라."
소녀가 손을 휘젓자, 시트가 스르르 젖혀지고, 안에는 여인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큰 키, 몸매가 모델처럼 늘씬했다.
여인이 잠결에 칭얼거리다가, 이내 눈을 떴다. 일어선 소녀를 확인하고서는 화들짝 일어났다.
"마스터."
여인은 소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소녀는 그린 듯이 입술을 휘며 씨익 웃더니, 여인의 턱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약탈하듯 키스한다. 여인의 입이 열리고, 두 여인의 겹쳐진 입술 틈으로 혀가 얽히고 타액이 오갔다. 소녀의 손이 여인의 가슴을 주무르자 여인에게서 가느다란 비음이 새어나왔다.
"아흣……."
소녀가 여인의 아랫입술을 물고 눈을 응시했다. 여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소녀의 입술이 떼어지고, 여인의 목을 감싼 손아귀가 그녀를 더 아래로 이끌었다. 여인이 무릎을 꿇는다. 소녀가 다리를 벌렸고, 여인이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흐음……."
여인의 혀가 소녀의 꽃잎을 핥았다. 소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감각을 음미했다. 여인의 혓놀림이 깊어질 때마다 소녀의 엉덩이가 움찔거리고, 허벅지가 비틀렸다. 소녀의 아래에서 음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여인이 팔을 들어 소녀의 유두를 건드렸다. 소녀의 목소리가 녹아내렸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신음 사이로, 벨소리가 울렸다. 문쪽이었다.
소녀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이 열렸다.
수트를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다. 단정한 얼굴에 비해 육체가 우락부락해서 그 안에 자리한 근육들을 짐작할 수 있다. 삭막한 표정, 익숙한 얼굴이다.
삭풍 클랜의 마스터 김상호를 보좌하던 남자 초산이었다.
소녀와 여인이 음행하는 광경에도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소녀는 작은 악마와도 같이 색기를 뿌리면서 나른하게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고운 표정을 지으면 천사와 같고, 색욕을 더하면 요부와 같으나, 눈빛은 투쟁과 약탈로 번들거리는 투사의 것이다. 지금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한국의 뒷세계를 지배했었다.
김상호. 지금은 그저 비스트라 불리는 자다.
"한국입니다. 그년은 이브린을 찾고 있습니다."
"효율적이군."
그녀는 이브린에게서 왔다.
이브린이 만든 아브락사스로 지금의 육체와 힘을 얻었다. 때때로 그녀, 비스트의 피가 서쪽 현해탄 너머를 향해 들끓듯, 그녀의 마력과 힘들은 이브린에게 반응한다. 이브린의 용언이라도 깃들여 온다면 비스트의 힘을 죽일 수 있다. 키시노는 쉬운 길을 알았다.
하지만 그 드래곤이 쉬이 움직일 것인가. 삼 년이 지났다. 드래곤이 그 꼬마에게 짓밟히던 비현실적인 광경을 기억한다. 때로 한국의 소식을 들었으나 이브린에 대한 것은 없었다. 소년은 어떻게 되었나. 키시노는 그 꼬마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인가. 이브린은 지금 그 소년에게 속해 있는 것인가. 비스트는 자신의 하반신을 여인의 입술에 밀어붙였다.
"우욱……."
비스트가 오줌을 싸갈겼다. 여인이 입술로 요도구를 밀고 꼴깍거렸으나 얼굴로, 입술로 튀어 흘러내렸다.
"한국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비스트가 뒤켠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음란한 기구를 꺼내들었다.
거대한 딜도 하나, 쌍두 딜도 하나를 양손에 들고 씽긋 웃으며 초산을 쳐다보았다.
"같이 할래?"
"……아닙니다."
"전엔 같이 한 년 붙잡고 쑤시고 그랬잖아. 이렇게 됐다고 이제 부끄럽기라도 한 거냐?"
초산이 픽 웃었다.
"아닙니다."
"나한테 박겠다고 덤빌 것도 아닌데. 설마 이 몸에 꼴리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너라도 죽일 거다. 남자한테 당한다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그것만 빼면 이 몸도 나쁘지 않아. 계집들이 구멍 좀 쑤셔주면 환장하는 이유가 있더군. 궁금하면 니 뒷구멍이라도 써 봐, 도와주지."
"사양하겠습니다."
"크큭. 비행기 잡아놔라. 바로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한 년 더 넣어."
"예."
초산이 방을 나서고, 곧이어 또 한 명의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비스트가 가느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힘으로 두 여인을 침대로 내동댕이치고 엎드리게 한다. 한 여인에게 거대한 딜도를 밀어붙이고, 자신의 꽃잎에 쌍두딜도를 천천히 삽입해 넣었다.
"흐응……."
그 이물감에 비스트가 허리를 떨었다.
그리고 엎드린 채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을 단숨에 꿰뚫었다. 쾌락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