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생. 이를 어쩌죠? 갑작스럽게 귀한 분이 방문하셔서, 오늘은 차를 마시기 어려울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부인. 제안만으로도 감사했어요.”
“대신 먹기로 한 건 선물로 챙겨 줄게요. 괜찮다면 받아 줘요.”
남작 부인이 재빨리 하녀에게 손짓했다. 지시를 받은 하녀가 부엌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남작 부인이 리브를 돌아보았다.
“미안한데 난 먼저 가 볼게요. 차림을 정돈하고 와야 할 듯해서. 조금만 기다리면 하녀가 금방 돌아올 거예요. 마리, 로이데스 선생이 가실 때 배웅해 드려.”
남작 부인에게 귓속말로 소식을 전했던 중년 여성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부인은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뒤 바쁘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도대체 누가 방문했기에 저렇게 다급할까?
마리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 소파에 앉은 리브가 슬쩍 창문을 힐끔거렸다. 응접실 창문 너머로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부인이 저렇게까지 허둥지둥하는 걸 보면 아마도 높은 계급의 귀족일 것이다. 펜던스 남작 부인을 놀라게 할 만한 인사라….
속으로 이런저런 이름들을 떠올리던 리브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하녀가 부엌으로 향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그리 조급한지 시계를 연방 힐끔거리는 마리가 보였다. 그녀는 끝내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리브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너무 늦어져서 제가 부엌에 다녀올까 하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전 여기에 있겠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이 저택 내의 모든 사람이 안절부절못할 손님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후다닥 나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리브가 무릎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선물로 챙겨 준다는 건 역시 간식거리겠지?
모처럼 코리다에게 맛있는 과자를 챙겨 줄 수 있겠다. 수업 중에 제공되는 다과를 먹으면서도 집에 있는 코리다가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기뻐할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응접실 바깥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가 돌아왔나 보다. 리브가 잠깐 내려놓았던 보닛을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응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으로 들어오려다 멈춰 선 사람은 마리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타인의 등장에 리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백금발에 창백한 피부, 서늘한 벽안을 가진 그는 리브를 발견하곤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응접실 안을 느리게 훑었다. 그런 뒤에 눈동자가 다시 리브에게로 닿았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은 먼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살짝 치켜든 턱은 상대의 인사를 기다리는 게 익숙한 듯했다.
“그….”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선생… 어머나! 후작님!”
뒤늦게 나타난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그 외침에 리브도 마법에서 깨어난 듯 번뜩 정신 차렸다.
후작?
“디트리언 후작?”
무심코 뱉은 말이 생각보다 크게 튀어 나갔다. 그에 따라 남자의 미간에 팬 골이 조금 더 깊어졌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은 리브가 재빨리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후작님. 안내인이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다시 모시겠습니다.”
마리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후작은 그런 마리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리브를 물끄러미 보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귀하는?”
“…저는 펜던스 남작가에서 근무하는 가정 교사 리브 로이데스라고 합니다. 수업이 끝나서 이만 돌아가려던 참인데….”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리브는 후작의 손짓에 말을 멈추었다. 그는 더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마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행여 그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았을까 놀라 눈치를 살피던 마리가 그것을 알아채곤 재빨리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마리의 안내에 따라 후작이 걸음을 옮겼다. 규칙적이고 각 잡힌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리브는 가까스로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부여잡은 그녀가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세상에, 디트리언 후작이라니. 남작 부인이 기겁하며 부산스럽게 굴었던 게 이해가 되었다.
디무스 디트리언은 이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였다. 일단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쏟아 내리라. 리브 역시 종종 풍문으로나마 디트리언 후작의 충격적인 미모를 접하긴 했었다.
하지만 사람의 입을 탄 묘사이니 응당 과장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과장은커녕 되레 부족했다. 특히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고 칭해지는 푸른 눈동자는 정말이지, 마력이 깃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그렇게나 아름답게 생긴 미남이 심지어 미혼의 후작이기까지 하니, 어찌 주목받지 않을 수 있을까. 도시의 모든 레이디들이 선망하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 자신은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남자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얼떨떨한 정신을 가다듬던 리브가 문득 희게 질린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까 후작의 면전에 대고 저지른 무례가 떠오른 탓이었다.
디무스 디트리언이 유명한 건 단지 뛰어난 외모나 그의 신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도시에 자리 잡은 그는 무척 오만하고, 냉담하기로도 이름 높은 남자였다. 평소 클럽이든 파티장이든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 정도로 비사교적이고 예민한 데다, 상대가 레이디라고 해도 예외 없이 불친절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남자. 알려지지 않은 그의 과거는 이와 맞물려 상당히 부풀려졌고, 급기야 그놈의 성격 때문에 외국에서 추방당했다더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런 사람이 리브의 이름을 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겠나!
“…설마 잘리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모델료로 추가 수입을 올리고는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발성으로, 정말 돈이 급해서 하는 일이었다. 가정 교사직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녀는 채 3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당장 생활비도 문제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코리다의 약값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리브가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성격 나쁘기로 소문이 자자한 후작이 제 이름을 알아 간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를 다시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저지른 실수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드는 것일 테지.
“로이데스 선생님.”
후작을 안내해 주러 갔던 마리가 돌아왔다. 리브만큼이나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지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인이 실수해서, 선생님까지 난처하게 만들어 드렸네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 그… 후작님께서 혹시 노하진 않으셨나요?”
“제가 보기에 별다른 기색은 없으셨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 설령 그분이 화가 나셨더라도 저희에게 내실 거예요.”
처음부터 응접실 안내를 잘못한 고용인의 잘못이라며, 마리가 리브를 달랬다. 리브는 애써 미소 지으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혼을 쏙 빼놓는 만남을 가진 마리와 리브는 서로의 안색을 걱정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돌아서서 저택을 나온 리브는 한참 뒤에야 받기로 한 선물을 챙겨 오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마리도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은 게 틀림없었다.
“어쩔 수 없지.”
리브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털레털레 걸었다.
지금 과자가 문제인가. 그 무섭다는 후작에게 실수하고 왔는데.
***
리브 로이데스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수공예 장인으로, 한때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의뢰서를 산처럼 쌓아 놓고 작업을 했던 유명 인사였다. 그들은 장녀인 리브에게는 본인들의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교육에 힘써서 그녀가 더 높은 신분으로 올라서길 기대했다.
덕분에 리브는 다른 중산층 가정 아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기숙 학교에 들어가서 비교적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리브는 제 부모님의 바람대로, 그녀가 적어도 나쁘지 않은 지식층으로 자리 잡거나 적당한 가문과 연을 맺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실제로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인기가 좋았다. 상류층 사내애들이 넌지시 추파를 던져 왔고, 몇몇 괜찮은 가문의 동성 친구들도 사귀었다. 졸업할 때 그들은 꼭 사회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조했다.
졸업 후 돌아왔을 때, 리브는 자신의 어린 여동생과 처음 마주했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아이였다.
그즈음 부모님의 일감은 줄어들었고, 아픈 동생의 약값만 천정부지로 늘어 갔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일이 많이 줄기는 했어도 부모님은 여전히 실력이 뛰어난 수공예 장인이었으니까. 버틸 수 있었다.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부지불식간에 자매를 두고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서 오세요, 리브 양.”
예배당 앞에서 비질하고 있던 사내애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봉사 활동을 하며 성직 과정을 공부 중이라는 베트릴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예배당을 방문하는 리브에게 꽤 친근감을 가지는 눈치였다.
도시 내에 예배당이 꽤 많고, 개중 이곳은 가장 작고 한적한 곳이라 더욱 귀한 신도로 여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요즘은 예배당 어디든 방문객 자체가 줄어들었으니까.
“코리다는 좀 어떤가요?”
“걱정해 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베트릴.”
“리브 양이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 생활을 하시는 덕분이죠. 분명 코리다의 건강은 금방 좋아질 거예요.”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넨 리브가 예배당 문을 힘껏 열었다. 미세한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텅 빈 내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