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화 (2/138)

머리카락 사이에 파묻혀 있던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모습만 그리기로 했잖아요.”

“알지, 아는데…. 못 알아보게 그릴게. 아니면 옆선만 살짝 그리는 건 어때?”

“안 돼요.”

뒷모습은 발뺌할 여지라도 있지만, 얼굴이 드러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 아깝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브레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더 설득하려 하지는 않았다. 자꾸 억지를 부리다가는 뒷모습마저 못 그리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애써 초연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옷을 벗는 일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힘들었으나 그보다는 이 시간 동안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상상력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힘겨웠다. 그 상상력이란 가령 이런 것이었다.

이 꼴을 그녀 주변의 누군가 알게 되면 어쩌지, 그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되면 어쩌지, 지금보다 돈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그 걱정의 매듭을 더듬어 도달한 끝에는, 브레드가 내줄 적당히 묵직한 주머니가 있었다. 단 몇 달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묵직한 주머니가.

오늘도 그녀는 그것을 떠올렸다. 당장 옷을 주워 입고 싶을 정도로 낯선 작업실 공기를 견딜 유일한 방법이었다.

“음, 리브. 허리.”

저도 모르게 올곧은 자세로 틀었던 허리에 얼른 힘을 뺐다. 평소 살아 있는 교본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자랑하는 그녀였다. 바른 자세가 습관이 된 터라, 의식하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려 했다. 하지만 브레드가 바라는 건 모범적인 레이디의 자태가 아니었다.

브레드가 그리려는 것은 그녀의 흐트러진 나신이다. 곧은 등이나 딱 떨어지는 균형의 어깨가 아니라, 흘러내리기 직전의 머리카락이나 유연하게 틀어진 허리선 따위.

기실 그러한 몸짓이라면 코르티잔들을 데려오는 것이 더 적합했다. 그녀들이야말로 아름다운 여체를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대체로 누드화의 모델로 코르티잔들이 불려 오는 연유 또한 그러할 터였다. 그녀들에 비하면 자신의 뻣뻣한 어깨선은 되레 재미없고 밋밋하기나 할 텐데.

그리 생각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누드화. 그 짧은 단어가 그녀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는 듯했다.

그녀가 무심결에 고개를 조금 틀어 자신의 맨팔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많이 돌릴 필요도 없이, 약간의 움직임으로도 무방비하게 드러난 여린 팔뚝 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비교적 매끈하고 흰 편이었다. 강박적으로 맨살을 가려 댄 덕분에 만들어진 빛깔이었다.

우스운 일이다. 겉으로 애써 정숙한 척해 봐야 그녀는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이리도 쉬이 껍데기를 벗어 던질 수 있거늘.

“리브.”

불현듯 들리는 부름에 그녀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멈춘 상태였다. 브레드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는 전혀 할 말이 없음에도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브레드?”

“어, 응. 음. 그러니까….”

“할 말 있어요?”

브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이 있다면서도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생각나면 이야기하겠지. 그녀는 무너졌던 자세를 다시 바르게 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브레드가 다급하게 다시 그녀를 불렀다.

“리브!”

“말하세요.”

“아니, 잠깐 나 좀 봐.”

그녀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제 어깨에 턱을 묻으며 브레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을 그리려는 건 아니죠?”

“안 그려. 약속했잖아.”

브레드가 비록 미덥지 못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지만, 적어도 내뱉은 말은 잘 지켜 왔다. 여태 그는 모델료를 꼬박꼬박 당일 지급해 주었고, 액수로 장난질을 치지도 않았으며, 제 누드화의 모델이 그녀라는 사실 또한 어디에서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녀도 브레드의 모델이 되어 주기로 한 것이고.

아니, 되어 준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그보단 그녀의 사정을 불쌍히 여겨 브레드가 먼저 넌지시 제안해 왔고, 그녀는 그를 돕는 시늉을 하며 곤궁함을 겨우 구제받았다고 해야 적절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은 퍽 이상했다. 어쩌면 브레드가 그답지 않게 너무 멀끔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브레드의 안색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인가? 브레드의 안색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덥지도 않은 작업실 내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마침내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대뜸 화색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 오늘은 좀 더 넣었어!”

“…모델료를요?”

브레드가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는 것은 맞으나, 그러한 연민이 주머니를 무겁게 만들진 않았다. 그녀는 통상적으로 다른 모델들이 받는 수준의 비용을 받아 왔다. 딱히 그것에 불만이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았는지, 브레드가 재빨리 설명했다.

“코리다가 곧 생일이라며? 선물보다는 돈이 나을 것 같아서.”

그의 말대로 선물보다는 돈이 나았다. 그가 정말 코리다의 생일을 챙겨 줄 의도라면.

그녀는 못내 꺼림칙함을 버리지 못했으나 그뿐이었다. 돈을 더 준다는 말에 빈말로라도 사양하지 못하는 건, 그의 말대로 코리다의 생일이 곧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도 조그마한 생일 선물 하나쯤은 사 주고 싶었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코리다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니 내내 속을 거북하게 만들던 찜찜함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끝내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감사의 인사를 뱉었다. 브레드는 코리다의 건강이나, 요즘 날씨 따위를 두서없이 늘어놓으며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녀가 긴장한 것 같으니 잠깐 근황이나 이야기하자는 그럴싸한 핑계도 덧붙였다.

그녀는 때때로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대체로 침묵하며 브레드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그를 향해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모델이 누군지 함구해 주겠다는 약속, 잊지 않았죠?”

“응? 물론이지!”

브레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너무 오래 쉬었다며, 얼른 그려야 하니 다시 자세를 잡으라고 재촉했다.

그녀는 묵묵히 두 팔을 끌어 올렸다. 벗은 몸은 차게 식은 지 오래였으나 떠도는 공기에선 여전히 냉기가 느껴졌다. 피부에 닿는 날카로운 시선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

“로이데스 선생.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오히려 제게 밀리언 양을 지도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지요. 밀리언 양이 워낙 총명하다 보니, 저도 만남을 기쁘게 기다린답니다.”

“오늘 수업은 조금 일찍 끝난 것 같은데, 차라도 함께하겠어요?”

리브는 빙긋 웃으며 눈매를 접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녀의 출근을 아쉬워하던 코리다가 뇌리에 떠올랐으나, 겉으로 표를 낼 수는 없었다.

“상냥한 제안 감사합니다.”

무릇 자식을 맡긴 부모들은, 한 번의 수업만으로도 그 자식이 엄청난 성장을 하길 바라는 법이었다. 설사 그것이 말도 안 되고 비현실적인 바람이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도 리브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지켜 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부모를 상대하는 일은 가정 교사의 중요한 업무이니까.

리브는 쓰려던 보닛을 고이 내려 잡았다. 그간 만나 온 학생의 부모들이 얼마나 다양한 무례와 오만함으로 점철되었던지를 떠올려 보면, 눈앞의 부인은 차라리 편안한 상대였다.

그녀가 이곳 펜던스 남작가에 취직하게 된 건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펜던스 남작가의 외동딸인 밀리언 펜던스는 명랑하면서도 심성이 착한 아이였고, 부모인 펜던스 남작 부부는 품위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요구해 놓고는 멋대로 계약을 위반했다며 3개월 치의 지도 비용을 연체해 버린 모 백작가와 비교하면 아주 많이 교양 있고 사리를 아는 부부였다. 하마터면 곤란해질 뻔한 사정도 이곳에 취직한 덕분에 겨우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밀린 비용을 요구할 때마다 뻔뻔하게 일관하는 모 백작가를 떠올리자 리브는 절로 수심에 젖었다. 아무렴 고명한 백작가에서 추잡하게 돈 문제를 일으킬까 싶어 안이하게 군 게 실책이었다.

귀족이라고 이름만 그럴싸했지, 매번 도박과 사치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는데….

“로이데스 선생?”

“아, 네.”

“특별히 못 먹는 게 있나요?”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그렇군요. 마침 아침에 선물로 들어온 게 있어서요. 부디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무엇을 먹든 입에 맞을 거라고 말하려던 리브는 차라리 미소로 입을 다물었다.

펜던스 남작가는 부유했다. 밀리언의 수업을 진행할 때 제공되던 간단한 다과를 떠올려 봐도 그랬다. 밀리언이 공산품 과자라며 투덜거리는 그것은 시내에서 가장 인기 좋은 과자점에서 파는,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상품이었다.

무엇이 나오든 수업 시간에 내주는 다과보다 비쌀 것이고, 리브는 평생 먹을 수나 있을까 싶은 고급 간식일 터였다.

“자, 이쪽으로.”

상냥한 펜던스 남작 부인의 인도를 받아 걸음을 옮기는데, 고용인들 사이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인마님의 티타임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리브가 슬쩍 눈을 굴려 고용인들의 상기된 안색을 살폈다. 아마도 직급이 높을 성싶은 중년 여성 고용인 한 명이 펜던스 남작 부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

남작 부인은 리브와 함께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큰 소리로 탄성을 뱉었다. 뭔가 더 말을 이어 가려던 그녀는 뒤늦게 리브의 존재를 인지하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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