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가 늘 앉는 자리는 가운데였다. 정면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물론이고, 그곳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신상을 지나 바닥으로 길게 드리우는 형상도 볼 수 있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은 리브가 잠시 바닥의 그림자를 응시하다가 두 손을 모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리브에게 남겨진 건 몇 푼 안 되는 유산과 아픈 여동생이었다. 유산은 코리다의 약값으로 순식간에 탕진해 버렸고, 리브는 당장 그들의 생활비와 지속해서 소비될 약값을 벌기 위해 생활 전선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리브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뛰어난 수공예 기술을 가업으로 이어받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당장 급여를 받을 수 있을 만한 일 중 리브가 잘 해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바느질 실력으로 몇 번의 퇴짜를 맞고, 시원찮은 청소 실력으로 거듭 쫓겨나고서야 리브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기숙 학교에서 만났던 동기의 동생을 가르치는 단기 교사 업무였다.
다행히 그것은 리브의 적성에 아주 잘 맞았다. 그녀는 드디어 거액의 기숙 학교에 다닌 보람을 느꼈다.
첫 직장은 순탄했다. 채 1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걸 계기로 다른 단기 교사 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몇 번의 단기 교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브는 처음으로 입주 가정 교사를 제안받게 되었다. 코리다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도 상대는 선뜻 받아 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번번이 거주지를 옮기느라 고생했던 리브와 코리다는 기쁜 마음으로 입주했다.
첫 직장이 좋았던 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았던 것임을, 리브는 그곳에서 깨달았다.
뚜벅뚜벅.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리브가 퍼뜩 눈을 떴다. 예배당의 적막을 가르는 구둣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보통 누군가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으면 눈치껏 발소리를 죽이기 마련인데, 새롭게 나타난 방문자는 오히려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듯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뒤쪽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려오자, 저절로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가 온갖 소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빈자리도 많은데 하필 바로 뒤에 앉아서 생각 없이 소음을 내는 꼴이라니.
한번 신경을 빼앗기자 속수무책으로 주의력이 무너졌다. 조금 더 버텨 보던 리브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 예배당을 찾는 이유는 방문자가 적고 그 적은 방문자들이 모두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상황을 겪기 싫어서 굳이 먼 거리를 감수하고 온 것인데.
언짢은 마음이 들자, 누군지 얼굴이라도 봐 둘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리브가 다소 못마땅하게 시선을 들었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손으로 틀어막아 겨우 참았다.
조금 전까지 속으로 투덜거리던 것도 잊고, 리브가 희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발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숨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건만, 야속하게도 낡은 장의자에서 삐걱거리는 미세한 소음이 났다. 동시에 가지런하게 내려앉아 있던 눈꺼풀이 들썩였다.
디무스 디트리언.
다행히도 이번에는 무례하게 이름을 내뱉지 않았다. 다만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저절로 몸이 굳었다. 옆집 사는 리타가 ‘디트리언 후작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무시무시한 미모를 얻었다더라’ 하는 소문을 전해 줄 때 내심 비웃었던 게 이제 와서 미안해졌다.
악마가 뭐야, 이 남자는 신의 은총을 독차지한 게 틀림없어.
얼어붙은 리브 대신 먼저 말문을 연 건 디트리언 후작이었다.
“…펜던스 남작가의 가정 교사였던가.”
서늘한 음성은 크지 않음에도 천둥처럼 들렸다.
그가 알아봤어. 리브는 당장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듯한 착각을 느꼈다. 내리지도 않은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은 듯 전신에 열이 올랐다.
“시, 실례했습니다. 후작님이신 줄 모르고….”
가까스로 시선을 내린 리브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곤 허둥지둥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 그럼 방해되시지 않도록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리브가 후다닥 걸음을 내디뎠다. 좁은 예배당이라 출구까진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을 열고 나오는데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연달아 심기를 거슬렀다고 기억해 두려는 건 아니겠지?
***
예기치 못하게 두 번이나 후작을 마주치자 괜히 집 밖을 나설 때면 심장이 떨렸다. 그러나 그를 마주쳤던 게 모두 꿈인 양, 리브의 일상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펜던스 남작가에서의 해고 통지서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펜던스 남작 부인은 주기로 한 선물을 제대로 못 챙겨 주어 미안하다며 심부름꾼을 통해 고급 수제 과자 상자를 보내 주었다.
“언니, 진짜 맛있어!”
손뼉 치며 좋아하는 코리다를 보니 그나마 보람이 느껴졌다.
이번 직장은 부디 오랫동안 다닐 수 있기를. 내심 그러한 바람을 안고 코리다를 응시하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준비했던 선물을 꺼내 들었다.
“코리다, 생일 선물이야.”
넉넉잖은 형편을 알고 있는 코리다는 선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포장된 선물을 응시하던 코리다가 이내 리브의 눈치를 보았다.
선물을 받는데 기뻐하기에 앞서 눈치부터 보는 여동생의 모습은 리브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의 여동생은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 버렸다.
리브는 일부러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코리다의 손에 선물을 쥐여 주었다.
“이번 달에는 생활비가 넉넉하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언니….”
“괜찮대도? 뭔지 궁금하지 않아?”
리브의 채근에 코리다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포장지를 뜯었다.
조심스럽던 손길은 점점 내용물이 드러날수록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포장지를 전부 벗겨 낸 자리에 작은 도자기 오르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흰 백마가 귀엽게 새겨진 오르골이었다.
“와!”
“태엽을 돌려 봐.”
상기된 얼굴의 코리다가 오르골 옆쪽에 있는 작은 손잡이를 힘주어 돌렸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태엽이 감기고, 이내 단조롭지만 귀엽고 통통 튀는 음률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평소 코리다가 좋아하던 자장가였다.
코리다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리브가 작게 웃음 지었다.
몇 달 전, 가게에서 이 오르골을 발견했을 때부터 코리다의 생일 선물로 점찍어 두길 잘했다. 돈이 모자랄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브레드가 돈을 좀 더 얹어 준 덕분에 오르골을 사고도 약간의 여윳돈이 남았다. 남은 돈으로 산 식재료를 이용해 저녁은 모처럼 푸짐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쾅쾅쾅!
“리브! 리브! 집에 있어?”
“잠깐만, 코리다.”
코리다의 어깨를 토닥여 준 리브가 후다닥 현관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작달막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집주인인 포멜이었다.
“아, 있었군. 내가 헛걸음을 몇 번이나 했던지!”
“무슨 일이세요?”
“집세 때문에.”
그는 웬 종이에 몇 가지 체크를 하더니 리브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종이를 받아 확인하니 청구서였다. 리브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달 치 집세라면 냈잖아요.”
“이번 달부터 올랐어.”
“네? 그런 소리 못 들었어요!”
“그야 네가 늘 집을 비웠으니까 그렇지. 난 분명 코리다에게 전했다고!”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코리다가 전해 주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포멜은 집주인의 권한이랍시고 제멋대로 없던 규칙을 만들고, 있던 규칙을 없애던 사람이었다. 집세 역시 갑작스럽게 결정된 게 틀림없었다.
리브가 허리에 손을 올리곤 두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요! 이건 일방적인 통보라고요!”
“그건 모르겠고 난 분명 얘기했어! 특별히 이달 말까지 봐줄 테니까 추가금 준비하도록 해.”
“포멜 씨!”
“몇 푼 오르지도 않았어. 그래 봐야 여전히 이 동네에서 제일 싼 집이라고! 싫으면 나가든가!”
막무가내로 통보한 포멜이 휙 돌아섰다. 어차피 리브나 코리다가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황당한 마음에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다시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하다못해 다음 달부터도 아니고, 당장 이번 달 집세를 올리겠다니.
“…언니.”
열린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윈 코리다가 오르골을 양손으로 들고 서 있었다.
말간 눈으로 리브를 올려다보던 코리다가 오르골을 내밀었다.
“이거, 다시 팔자.”
“이건 네 생일 선물이야.”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는데, 코리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집세가 올랐잖아.”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약 때문에 이번 달에 돈을 많이 썼잖아. 나도 우리 집 사정 알아.”
“코리다!”
“언니, 나 어린애 아니야.”
아니야, 넌 어려.
리브는 목 끝까지 치민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수제 쿠키를 먹으며 기뻐하던 애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차분한 얼굴을 한 코리다가 웃었다.
“언니. 집세를 내지 않으면 포멜 아저씨가 매일 찾아올 거고, 언니가 없을 땐 나를 괴롭힐 거야. 그러니까 그냥 빨리 내자.”
포멜의 괴롭힘은 그저 핑계였다. 그냥 리브가 오르골을 되팔 수 있도록 등 떠미는 핑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리브는 아주 잠깐이나마 오르골을 보며 고민했다. 여윳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오르골을 되팔면 갑작스럽게 오른 집세에 대비할 수 있는 시일을 얻을 텐데.
그러나 그건 정말 잠시였다. 리브는 차분하게 심호흡한 뒤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곤 오르골을 받아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