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회
vol.14 Oxygan the True Queen Of Ocean
물의 도시 베네치아, 그곳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는 장소였지만 지금 내가 있는 정령가든[Spiritual Aquarium, 精靈庭園]에 비한다면 평범한 어촌에 불과하리라. 왜냐하면 아무리 베네치아라고 해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폭포수 뱃길같은건 없었기 때문이였다. 거기다 꺼리낌없이 치마속 팬티를 투명한 물 너머로 드러내놓고 다니는 물의 정령들도 없고 말이지.
"곧 있으면 브루고뉴님의 정령궁(精靈宮)에 도착합니다. 오르시나의 주인분께서는 예를 갖출 준비를 하시길. 브루고뉴님은 품위를 더럽히는 짓을 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뉘예뉘예, 알겠쭙니다."
바로 윗쪽 뱃길을 타고 지나가면서 친구들끼리 재잘재잘 떠드는 물의 정령소녀들의 팬티를 훔쳐보고 있던 나는 슈이쿤의 재촉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샨코 공주와의 담판을 마무리 짓고 브루고뉴를 만나러가는 길을 인도해준건 사실상 둘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던 물의 최상급정령 슈이쿤이였다.
마치 대기업 회장님을 보필하는 여비서처럼 깐깐하게 구는 슈이쿤이였지만 나로서는 딱히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브루고뉴와는 처음보는 사이도 아닌데다가 같은 여신칼날단 소속임과 동시에 같은 정령신은... 아니구나 나는 어둠의 정령왕이였지 참.
아무튼 상대가 누구든간에 지레 쫄아서 움츠러들 내가 아니였지만 약간 깍두기 느낌로 따라온 오르시나의 경우 오랜만에 옛주인을 만나는터라 심각할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였다. 무슨 간질환자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뿐만 아니라 동상환자처럼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서 보는 내가 다 불안해질 정도. 그래서 뭔가 격려의 말을 건네려는데 슈이쿤이 선수를 친다.
"오르시나 언니 왜 그렇게 안색이 안좋아? 뭐 안좋은 일 있었어?"
'아, 아니 그게 오랜만에 브루고뉴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웬지 모르게 몸이 떨려서...'
"오르시나 언니가 떨릴게 뭐있어. 물의 상급정령들중에 가장 엘리트였던 언니가 솔선수범해서 파견업무를 수백년동안 갖다가 돌아온거잖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야지. 자 가슴 쫙펴고 내 손 잡아. 심호흡이라면 얼마든지 하게 해줄테니까. 아니면 언니가 좋아하던 폭포 미끄럼틀이라도 한번 타고 갈래?"
'괜찮아. 약속시간에 늦으면 안된다며? 슈이쿤 네덕분에 조금은 나아졌으니까 어서 가자.'
나보고는 잠깐 한눈판거 가지고 뭐라고 하더니 오르시나를 데리고는 동네 한반퀴를 돌 기세인 슈이쿤의 이중성에 질리는 것도 잠시 나는 갑자기 나룻배의 스피드가 모터보트 수준으로 빨라져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모터는 커녕 노조차 없이 떠내려가던 나룻배라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이건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촤화아아아아아악!
"운이 좋네. 마침 조류가 빨라지는 정오때라 금방 정령궁에 도착할 수 있겠어."
"잠깐 빨라지는건 좋긴한데 이러다가 교통사고 나는거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시는겁니까? 정령가든 아쿠아리움의 물길은 모두 일방통행이라고요. 교통사고같은게 날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물의 정령이 나룻배에 부딛혔다고 다칠리도 없겠지만."
유독 내게 틱틱거리는 슈이쿤의 행태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도로 나룻배에 누웠다. 사실 나 또한 교통사고가 걱정됐다기 보다는 윗쪽 뱃길의 물의 정령소녀들이 너무 빠르게 스쳐지나가서 더 이상 팬티 구경을 할 수 없다는게 아쉬울 따름이였다. 그리하여 내가 눈을 감고 머리로만 팬티무늬를 상상하길 십분여 슈이쿤이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정말로 정령궁에 도착했습니다. 오르시나의 주인분께서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제가 알려드린 예법을 그대로 따라..."
"아 됐고 저기가 정령궁이란 말이지 어디 한번 브루고뉴 자식 쌍판데기 한번 보러갈까."
나룻배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곳에는 디자인 자체는 경북궁과 유사한데 재질은 목재가 아닌 투명한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굉장히 충격에 취약해 보이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 무려 물의 정령신이 거주하는 곳이니까 진짜로 취약하진 않겠지만서도.
"이리 오너라. 이 옥사건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어 있느냐."
"잠깐만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간 근위병인 블루메탈 슬라임들이 적으로 인식할 수 가 있다고요!"
슈이쿤이 뭐라하건 귓등으로 듣는게 익숙해진 내가 지체없이 정령궁의 문턱을 넘은 순간 어디선가 푸르딩딩한 슬라임 둘이 나타나 날 가로막아섰다. 어디 행사용 풍선을 연상캐하는 맥아리 없는 율동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내가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상황이 급변했다.
왼쪽 슬라임은 양날도끼 그리고 오른쪽 슬라임은 모닝스타로 변신해서 날 덮쳐온 것이다. 거의 무딜레이에 가까운 기습에 내 정수리가 쪼개지기 직전 앙칼진 외침과 함께 블루메탈 슬라임들이 일시정지라도 한듯 멈춰섰다.
"멈춰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쭉째진 여우눈을 한 정장차림의 소녀였는데 마치 중학생이 어른행세를 하려고 일부러 나이들어보이게 꾸민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거지 실제로는 오르시나처럼 수백살은 우습게 먹은 정령이겠지만.
"이피로스 괜찮아? 아니 이피로스님 괜찮으십니까?"
"이 자는 누구냐?"
"아 그는 브루고뉴님이 현재 케어중이신 수왕성의 리더 샨코 공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브루고뉴님과 면담을 요쳥해서 제가 인도하는 도중 돌발행동을 하는 바람에... 어쨌든 제 불찰이니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런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자를 한낱 필멸자들간의 인연을 앞세워 정령궁에 들이려 했단 말이냐?"
"그, 그것이 일단 브루고뉴님께서 면담을 허락하기도 하셨고 그는 오르시나와 계약한 사람이기도 해서..."
"뭣!? 오르시나?"
'이피로스? 너 이피로스 맞지? 그 잠깐새에 어떻게 이리 변했... 아니 잠깐새는 아니구나. 내가 전생유적에 있을동안 수백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블루메텔 슬라임에 가려져 뒤늦게 이피로스란 이름의 물의 정령소녀를 발견한 오르시나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듯 반가운 얼굴로 뛰쳐나간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건 반가움의 포옹이 아니라 어느샌가 손바닥으로 변신한 블루메탈 슬라임의 물싸대귀였다.
찰싸악!
"꺼져라! 어디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려고 하는 것이냐.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막내정령이 아니다. 정식으로 정령완관을 계승한 물의 정령왕이란 말이닷!!"
'이, 이피로스... 왜 그러는거여? 혹시 그때 내가 말도없이 떠나서 아직도 화가 나있는거야?'
"닥치고 조용히 따라와라. 브루고뉴님이 면담을 허락하셨다면 내가 막아설 권리따윈 없는거겠지. 슈이쿤, 어서 가봐라."
"알았어 아, 아니 알겠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보이는듯한 물의 정령 오르시나, 이피로스 그리고 슈이쿤. 허나 내가 간섭할만한 껀덕지는 없어보였기에 나는 얌전히 슈이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화단의 꽃조차 크리스탈 재질로 이루어진 정령궁 내부를 가로지르니 구면이라면 구면이라고 할 수 있는 브루고뉴와 조우할 수 있었다.
검지 손가락 끝으로 알현전 한가운데에 자리한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는 그의 외모는 단순히 잘생겼다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미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예술조각품 같았다. 허나 그가 남성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그 잘생긴 얼굴이 역겹게 느껴지는걸 보니 내 성적 정체성은 아주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게 분명하리라. 자석의 N극과 S극도 같은극 끼리는 밀어내듯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도 같은 남자라면 밀어내는게 당연한 일이였다.
"브루고뉴님 신 슈이쿤이 손님을 모시고왔습니다."
"아아 그래. 전에 말했던 그 손님인가."
"우린 아마 구면이지?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서..."
"흐으음. 그 기운은 오르시나로군. 몇백년만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이 또한 연어가 물을 거슬러올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리인가. 어쨌든 참으로 반갑구나."
'브, 브루고뉴님 절 기억해주셨군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건 그렇고 수어지교의 권능을 사용한 모양이구나. 물의 기운이 많이 쇠약해져 있어. 지금 다시 불어넣어주마."
나와 오르시나를 편향적으로 대우하는건 비단 슈이쿤뿐만이 아니였는지 브루고뉴가 물레방아를 돌리던걸 멈추고 버선발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자 마치 팬사인회에서 자신의 얼굴을 기억해주는 아이돌을 만난 빠순이처럼 기뻐 주저앉는 오르시나.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브루고뉴가 물레방아를 돌리던 검지 손가락으로 오르시나의 이마를 터치하자 유체화 상태였던 그녀의 몸이 진한 색채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물의 정령신다운 힘이랄까. 아 그런데 이러면 좀 셈나는데. 그렇다고 감동의 재회의 순간을 훼방놓을 수 도 없고. 그렇게 나는 니 물의 정령 보짓물 쩔더라라고 말하고 싶은걸 꾹참고 한동안 추억의 책장을 한페이지씩 넘기는 오글거리는 장면을 울며 겨자먹기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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