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6화 > 지옥의 문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프랑스의 아이리스 길드.
1팀장 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리스 길드는 정보 길드답게 전 세계 고위직들의 정보를 몰래 수집한다.
길드 내부에서 그 정보들을 모아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하게 알리바이가 빈 시간이 많다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이 입급되는 등.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아이리스 길드에서 경계 레벨을 올려서 관리한다.
이상한 일을 하더라도 아이리스 길드에서 먼저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을 고위직들이 알았다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비밀리에 진행한다.
아무튼.
최근 경계 레벨을 올린 고위직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특히 이호연과 만난 사람들이 전부 그랬다.
"경계 레벨이 높은 고위직들이 이호연에게 호의적으로 변했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호연에게 호의적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천재 마법사였고, 앞으로 승승장구할 날만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만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단순히 호의적으로 변한 것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기자회견을 열고 인터뷰를 하며 이호연을 찬양했다.
그런 현상이 너무 이상했다.
"그러게. 잠깐 만남을 가진 것만으로 저렇게 만들다니…. 설마 노인들까지 꼬신 건 아니겠지?"
"… 그건 아니겠지. 일단 움직임을 조사하고는 있는데, 수상한 움직임도 사라진 것 같아."
"나는 사람들마다 목에 마법을 들이대면서 협박한 거 아니야? 앞으로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여버리겠다던가."
"아무리 이호연이라도 그럴 리가 없잖아. 언니."
엘리스는 아이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호연이 나쁜 남자는 맞지만 그런 일을 벌일 만큼 미친놈은 아닐 거다.
"그렇다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줬다는 말을 믿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이리스 길드 내부에서만 궁리할 필요는 없다.
어젯밤, 당연히 이호연에게 먼저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줬다는 모호한 말.
분명 이호연이 무언가 한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협박이라도 한 건가?
엘리스는 더욱 머리가 아팠다.
"엘리스. 그건 잠시 내려놓고 이것 좀 봐"
그때, 아이린이 자신이 살피던 자료들을 엘리스에게 넘겼다.
태평양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한 자료였다.
"… 며칠간 태평양 주변 실종 사고가 말도 안 되게 늘어났네?"
"응. 최근 비행기나 배가 결항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아졌어. 당연히 원인은… 지옥의 괴수들이야. 이호연이 말했던 특징과 일치해."
"항로에 괴수들이 없는 데도 실종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다른 범죄의 꼬리 자르기일 수도 있어."
"그쪽도 조사해 봤는데,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우리한테 정보가 없는 쪽을 의심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아."
"알겠어. 이건 아시아 조사팀에 맡길게."
두 자매는 의견을 나누며 업무에 집중했다.
컴퓨터의 희미한 소음과 터치패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사무실에 가득 찼다.
몇 시간 뒤.
탁-
보고를 검토하면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던 엘리스의 집중을 깨트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책상 구석에 커피잔 하나가 보였다.
아이린이 가져온 커피였다.
"벌써 해가 졌어. 조금 쉬면서 해. 엘리스."
"아, 언니. 고마워."
시계는 벌써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스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일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간 것도 몰랐다.
"엘리스, 오늘은 언제쯤 돌아갈까?"
"언니가 일찍 가고 싶으면 일찍 가자."
"그럼 오랜만에 언니 방에서 와인이라도 한잔할래?"
"… 그건 좀 생각해 볼게."
엘리스는 슬쩍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려는 아이린의 시선을 흘려넘겼다.
몇 번 정도 같이 잤더니 틈날 때마다 이렇게 다가왔다.
마치 헌팅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호연한테 연락은 왔어?"
다행히 아이린은 포기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있었다.
오늘은 안된다는 걸 알자마자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아니. 엄청 바빠 보이던데."
홀짝-
엘리스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한국 지부장에게 듣기론 여전히 고위직들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걔도 참 버릇이 없네. 검은 기둥을 부수는 걸 기껏 도와줬는데 얼굴도 안 비추고. 한 번 찾아가야겠어. 그렇지?"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엘리스는 아이린의 말에 대답하며 별생각 없이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확실히, 다음 답장이 오는 게 언제일지 기다리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스마트워치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 속보입니다. 미국 서부에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
"후우…."
늦은 오후, 집에 돌아온 이호연은 겉옷을 벗어 마법 옷걸이에 걸어놨다.
희미한 주름이 잡힌 와이셔츠를 피고 피곤한 듯 부엌으로 향했다.
정수기로 자연스럽게 컵에 물을 따른 이호연은 침음을 흘렸다.
"헌터 협회 협회장을 만났어야 했는데… 으음."
미국에서 그랬듯이 이호연은 한국에서도 고위직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자리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 않구나."
고위직들이 만남을 피하는 걸 보면, 이호연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추종자가 된다는 헛소문이라도 퍼진 모양이다.
얼굴을 보기만 하면 다들 자신의 진심에 공감해줄텐데.
아쉽네.
꿀꺽.
이호연은 약봉지를 뜯고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입에 퍼지기 전에, 물을 마시며 약을 목 안으로 넘겼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백아영이 챙겨준 약이다.
이걸 먹어야 마음에 안정이 온다.
'이거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이호연은 약을 삼킨 뒤 테이블에 앉았다.
요즘 매일같이 돌아다니다 보니 여간 피로한 게 아니었다.
의자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자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 오늘이 딱 일주일째네."
지옥의 문에서 나오는 어둠은 태평양에서 점점 크기를 키우고 있다.
그 어둠이 대륙에 닿는 순간 괴수의 습격이 시작된다.
그 예상 기간이 일주일이었다.
실제로 지옥의 문이 내뿜는 어둠은 대륙의 눈앞까지 다가왔으니, 언제 괴수의 습격이 올지 모른다.
'괴수들이 습격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피해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아.'
이호연이 고위직들을 꽤 설득했다고 해도, 그들은 전부 미국과 한국에 있었다.
아이리스 길드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바뀌지않았다.
눈에 보이는 피해가 없는 이상 전 세계의 인간들을 설득하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피해자를 줄일 방법이 없을까.'
스윽-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이호연의 볼에 차가운 게 닿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옅은 미소를 지은 남다은이 유리잔을 내밀고 있었다.
"미안. 방해였어…?"
머쓱한 듯 귀엽게 웃는 그녀를 보니 이호연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이호연은 남다은이 내민 음료를 받으며 물었다.
"아니야. 중요한 고민은 아니었어. 이건 뭐야?"
"끌레르 로즈 라떼야. 학생회장님이 호연이도 좋아한다고 티백을 챙겨주셨어."
"… 아. 수린 누나구나."
어쩐지 냄새가 익숙하더라.
이호연은 라떼를 한 입 먹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제 익숙해져서 먹을만하긴 하지만, 오랜만에 먹는 첫입은 여전히 힘들었다.
"루시랑 루미가 준 쿠키도 있는데 같이 먹을래?"
"응. 마침 좀 쉬려고 했어."
남다은은 부엌에서 쿠키들을 잔뜩 가져왔고, 이호연은 귀엽게 포장되어있는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음, 이 정도면 먹을 수 있다.
'애들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네.'
루시가 만든 쿠키.
예전엔 못 먹을 정도였는데, 이젠 눈 딱 감고 먹을 만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쿠키와 끌레르 로즈 라떼를 입에 넣고있는데, 남다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호연아. 많이 바빠보여서 걱정돼.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틀 내내 돌아다녔잖아."
"고마워. 그래도 중요한 사람은 얼추 다 만났으니까 걱정하지마."
"…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게."
스윽.
손등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이호연은 자신의 손등 위에 올라온 남다은의 손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몸에 따뜻한 체온이 닿으니 안정감이 느껴진다.
"고마워. 다은아."
"혹시 정말로 정치에 진출하려는 거야? 스칼렛 씨랑 릴리아나 씨가 그런 얘기를 하던데."
"…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근데 걔들은 내가 없을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하긴, 호연이는 정치로 진출하기엔 약점이 너무 많지."
"음…."
다은이한테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뭔가 더 가슴이 아프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일 테니까.
그때, 부엌으로 히로인들이 들어왔다.
"이거 뭐야? 내가 먹어도 되는 건가?"
"아마 다은 양의 친구가 준 것 같습니다.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으음! 귀엽게 생겼네. 암냠냠. 뭐야…. 맛없는데?"
"스칼렛, 릴리아나. 마침 잘 왔다. 둘 다 여기 와서 앉아봐. 대체 내가 없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봐야겠어."
"그래도 저희 덕분에 힘을 얻지않으셨나요.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는데 다행입니다."
스칼렛은 자리에 앉은 뒤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말대로 미국에 갈 때 걱정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아서 학회장이 [무한의 엔트로피]를 그렇게 원하는 줄 몰랐으니까.
그래도 그 아저씨한테 해준 게 워낙 많다 보니 생각보다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체 자신이 없을 때 무슨 말을 하는 건 지 들어야겠다.
"스칼렛. 그렇게 말 돌리지 말고 앉으라니까. 오늘 날 잡았어."
"쳇."
이호연은 스칼렛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쿠키 하나를 뜯더니, 입에 넣었다.
"…."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스칼렛은 조용히 쿠키를 내려놨다.
이호연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칼렛. 릴리아나는 몰라도 너라도 내 진심을 알아줘야지. 안 그래?"
"무슨 소리십니까.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그러면 더 나쁜 거지."
이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끌레르 로즈 라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내가 말 한다고 들었으면 스칼렛과 릴리아나가 아니지.
"애기 아빠.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스칼렛 양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 레베카 님."
어느새 테이블에 앉은 레베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도 스칼렛을 놀리는 데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
"요즘 얼마나 귀여워졌는지 몰라. 항상 애기 아빠 스케줄을 보면서…."
"레베카 님!"
"쿠키가 왜 이렇게 맛없는 거야. 으엑."
그래도 다들 사이는 좋아 보이네.
요즘 분위기가 흉흉한데 집 안에서라도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게 참 다행이었다.
이호연은 시끌시끌한 테이블 가운데에서 스마트 워치를 바라봤다.
- 소, 속보입니다. 호주, 러시아, 일본, 미국 서부 등. 태평양과 인접한 대륙에 습격이….
"… 하필 기분 좋을 때 이러네."
이호연은 혀를 찬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