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화. 비밀 친구
대련장으로 먼저 올라가서 스트레칭을 했다.
별로 몸을 쓸 것 같진 않지만, 이런 곳에 서면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 기회에 루시랑 루미한테 자존심 좀 세워야겠다.
그래도 남잔데, 약한 취급 받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다.
"꼴에 여자 앞이라고 자존심 세우기는. 지금 사과하면 없던 일로 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어느새 비실이가 내 앞에 서서는 실실 쪼개며 나를 꼬나보고 있다.
대련장에 올라온 순간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쫄았냐? 시발 말 존나게 많네."
"뭐, 뭐라고?"
우리가 올라온 대련장에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긴장된 분위기에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났다.
"야, 여기 진짜 싸움 났다!"
"이호연하고 김호진 싸운다!"
김호진. 또 기억하기 싫은 이름을 기억해버렸다.
얘는 그냥 비실이가 딱 인데.
대련장 밑에선 루시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야! 마법사가 암살자랑 1대1 뜨는 게 말이 돼? 김호진 너 자존심도 없어?"
쟤가 암살자였구나.
가만히 있어도 설명이 들어오니 참 편하다.
"이호연은 알겠는데, 김호진은 누구야?"
"김호진 몰라? 저번 주에 아이리스 길드에서 접촉해서 난리 났었잖아."
"진짜? 1학년인데 아이리스 길드랑 접촉이라고?
"응, 에브리데이에 완전 난리였어."
음음, 그랬구나. 그랬어. 아카데미물 답게 설명해주는 설명충들이 많으니 참 좋다.
대충 비실이에 대해서 알 것 같다.
아이리스 길드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정보 길드다.
참고로, 히로인인 엘리스가 아이리스 길드 딸내미다.
거기에서 접촉했을 정도면 꽤 유망주긴 하다.
애초에 엑스트라 악역이긴 하지만, 도진혁도 유망주 라인이긴 하다.
그래야 주인공하고 경쟁하지.
비실이가 저래 보여도 도진혁 패거리 중에서 잘나가는 놈인가보다.
하긴, 생각해보면 비실이도 퉁퉁이 다음으로 2인자 느낌이 나긴 하니까 얘도 비슷한 거겠지 뭐.
"근데 마법사랑 암살자랑 1대1이 되는 거야? 심지어 지형도 없는 돔에서?"
"그니까 김호진이 저렇게 시비를 걸었겠지. 멍청아."
"아니, 그걸 받아주는 이호연은 뭔데?"
설명충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띄워주고 있다.
다른 구경꾼들도 나를 걱정하면서 웅성웅성거리는 게 이래서 선동이 무섭구나 싶다.
지이잉-
대련장의 마법진이 가동되면서 구 형태의 마나 필드가 가동되었다.
나와 비실이 사이에 결계가 펼쳐진다.
비실이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서 자세를 낮추었다.
대쉬를 위한 자세인 것 같다.
"카운트 다운 시작한다!"
[3]
두근.
전투 감각이 바닥에 닿는 발끝부터 몸을 타고 서서히 올라온다.
[2]
"이호연. 네 거품을 확실하게 걷어줄게."
비실이는 칼을 겨누면서 살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호연으로 살면서 느끼는 건데, 남자들이 적의를 엄청나게 보낸다.
하긴, 나도 저 얼굴일 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1]
두근. 두근.
"뭐야… 이게 끝이야?"
몸이 더 이상 끓어오르질 않는다.
펠릭스와 싸웠을 때는 온몸이 소리를 질렀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심장이 빠르게 뛰며 온몸에 활력이 돌았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감각들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근데 지금은…
두근 두근.
평온하다.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 말은 즉, 앞에 서 있는 저 새끼와 싸우는 과정에 있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니, 전력을 낼 가치조차 없는 상대이기에 전력이 나오지도 않았다.
[시작!!!!]
"이때만 기다렸다, 이 개새끼야! 한 방에 끝내주마!"
비실이가 시작하자마자 땅을 박차고 내게 뛰어들었다.
확실히, 속도는 꽤 빨랐다. 펠릭스 급은 아니었지만, 속도만 보면 엘리스급은 되는 것 같다.
지잉-
'개안.'
비실이의 오른손에 들린 단검에 마력이 모인다.
루트는 직선. 내 미간에 단검을 꽂으려 하고 있다.
내 얼굴에 확실히 원망이 많은 모양이다.
쉬익-
비실이가 내게 쇄도하고, 나는 타이밍 맞게 몸을 옆으로 젖히며 단검을 피해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내가 근소한 차이로 피한 것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 여유로웠다.
비실이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는 내 뒤에서 몸에 제동을 걸었다.
"피하는 것밖에 못하는 버러지 주제에 왜 덤빈 거야?"
비실이도 내가 간신히 피한 거로 보였는지, 낄낄대며 도발하기 시작했다.
"더 없냐? 더 강하고, 더 빠른, 네 필살기 같은 거 없어? 내가 보여줄 게 없잖아. 임마."
그딴 단순한 공격만 하면 내가 보여줄 게 없다.
관객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좀 보여줘야 할 거 아니야.
"… 그래. 조금 가지고 놀아주려고 했는데, 그냥 빨리 끝내줄게."
비실이는 내가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알고 진짜로 열 받은 모양이다.
난 진심인데. 네가 뭔가 엄청난 걸 보여줘야 내가 이겼을 때 더 대단해 보일 거 아니야.
눈앞에 비실이는 나를 어떻게 끝낼지 고민하다가, 몸 전체에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호오…."
온몸에 마력을 순환시키는 게, 마치 [가속]과 비슷한 운용이었다.
다만, [가속]은 반동을 공간으로 보내도록 설계되 있어서 몸에 과부하가 없지만, 저 기술은 그 정도 고급 스킬이 아닌 모양이다.
마나를 가속해 억지로 몸을 빠르게 만들긴 성공했지만, 반동을 감당할 방법을 마련해놓질 않아서 몸을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마 공격에 모든 힘을 실어서 상대방에게 반동까지 넘기는 방식으로 사용 하는 것 같다.
쉽게 말해서, 내가 맞질 않으면 저 반동은 모두 시전자에게 돌아간다.
놈이 빠르게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내 주변을 도는 것처럼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그 속도가 펠릭스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다.
펠릭스의 속도도 잡아낸 내가 저 정도의 속도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떠냐! 언제 베었는지도 모르게 베어주지!"
"와우… 대사 존나 멋있네."
"지금 칭찬해도 늦었어!"
"… 어, 응. 그래."
내 주변을 빙빙 도는 놈을 보면서 나도 [가속]을 사용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죽여버리겠어!"
더 이상 속도를 주체할 수 없는지 비실이가 몸을 낮추며 단검을 쥐고 내게 돌진해왔다.
그리고 난, 손에 마나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했다.
파악-!
"크억…! 이, 이게 무슨…."
"느려."
오소이!
남들이 보기엔 엄청나게 빨라서 제대로 반응도 못 했을 속도.
나는 그 엄청난 속도의 돌진을 쉽게 반응했다.
자연스럽게 걸어나가서, 돌진하는 비실이의 멱살을 한 손으로 쥐어잡았다.
"크읍. 어, 어떻게!"
멱살을 잡은 손을 하늘까지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커…헉…?"
비실이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바닥에 엎어져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도 등부터 떨어졌으니까 덜 아플거야.
비실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나를 걱정하면서 꺅꺅대던 루시와 루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고, 아까 비실이의 길드 어쩌구 유망주 어쩌구 하던 놈들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그대로 비실이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가, 다시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크…헉…."
마법진이 가동하고 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만, 고통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야 실습 훈련이니까.
"내 몫으로 한 번. 루시랑 루미 몫으로 열 번이다."
한쪽 무릎을 꿇고 비실이와 눈높이를 낮추었다. 다시 바닥에 박혀있던 머리채를 잡고 올려서 눈을 마주쳤다.
아까 그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눈에 가득했다.
"자, 잘못했…."
미안한데 지금 반성해도 소용없다.
여기서 봐주면 나중에 더 귀찮아지거든.
수업 시간에 떠들다가 걸려서 감점당하는 운 안 좋은 첫 번째 희생양 같은 거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지만, 수업의 분위기를 위해 첫 타자를 감점시키는 거다.
쾅! 쾅! 쾅!
"끄윽…"
[대련, 멈춰!]
"약해빠졌네."
아직 네 번밖에 안 꽂았는데,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마법의 대련 종료 구호'가 나오면서 대련이 강제로 종료됐다.
대련장 밖에는 어느새 A클래스 대부분이 우리 대련을 보고 있었다.
슬쩍 보니 남다은은 없었지만, 엘리스의 얼굴도 보였다.
나는 묵사발이 된 비실이의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모든 생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나 방금 마법 안 쓴 거 알지?"
"…!"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자 도진혁 패거리였다.
"얘처럼 또 까부는 애 있으면 다음에는 몸을 태워버릴 테니까. 처신 잘하라고."
쾅!
그대로 비실이의 머리를 잡은 손의 힘을 풀고, 대련장 밑으로 걸어 나왔다.
나를 기다리는 루시와 루미는, 다행히도 두려움보단 기쁨의 얼굴이었다.
하긴, 히로인들이 주인공이 강한 걸 무서워하면 말이 안 되잖아.
"뭐야! 너 왜 이렇게 잘 싸워! 그리고 왜 대련 때마다 마법 안 써? 너 사실 마법사 아니지!"
"가, 감사합니다."
루미는 어떤 맥락에서 나에게 감사하다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기뻐 보이니 됐다.
*
1대1 대련 수업에서 벌어진 대련은, 당연하게도 누군가가 촬영해서 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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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논란 있던 이호연 대련 영상 레전드 ㅋㅋ]
[영상]
영상만 봐선 대단하긴 한데 레전드인가? 싶을 텐데.
반전이 얘 마법사임 ㅋㅋ 마법 하나도 안 쓰고 아이리스 길드에서 접촉한 유망주 개 패듯이 패버림.
추천 : 329 비추천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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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마법사라고? 근데 ㅅㅂ 어떻게 저 속도를 잡음?]
[와, 얼굴 바닥에 찍는 거 봐 존나 무섭네 ㄷㄷ]
[아이리스 길드 거품으로 밝혀져 ㅋㅋ]
[전 세계를 둘러싼 거품 ㄷㄷ]
[잘 싸우는 건 알겠는데, 난 얘 얼굴만 보면 짜증 나서 비추천함.]
[ㄴ ㅇㅈ ㅋㅋ 이 새끼 볼 때마다 여자랑 사진 찍혀있음. 개빡치네.]
[-------빅토리아 아카데미 패배자들 명단-------]
[이 씨발년이]
[속보 ㅋㅋ 아이리스 길드에서 김호진한테 계약 조건 제시 했던 거 취소 ㅋㅋ]
[ㄹㅇ임? 좃됐네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이 정도면 마인 진짜 루시랑 얘가 잡은 거 아님?]
[ㅇㅈ 마법 안 쓰고 이 정도인데 마법까지 쓰면 마인 순살치킨 만들기 쌉가능]
[글쎄. 난 이거 보고도 아직 안 믿는 쪽임.]
[나도 아직은 안 믿음. 뿔 두 개 마인을 상대해본 현역들은 거의 다 부정적인 게 팩트]
"현역들 이러고 자빠졌네. 나보다 약하면 현역 딱지 떼야지."
에브리데이 반응이 어떤가 보고 있는데, 영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래도 여론이 좋아진 것에 감사해야지. 예전 반응을 찾아봤는데, 그때는 사기꾼 새끼라고 난리가 났더라.
진작 나한테 티를 내주던가. 그럼 어떻게든 빨리 해명을 했을 텐데.
어떻게 아무도 안 알려주지?
날 배려해도 너무 배려하는 거 아니냐고.
"흐아. 다 끝냈다! 루미 너는?"
"나도 다 끝냈어."
지금은 동아리방에서 과제를 하던 중이다.
나는 한 30분 만에 끝냈는데, 루시와 루미는 1시간 정도 걸렸다.
내 걸 보고하라고 해도 꿋꿋이 자기들이 하겠다고 해서, 참 기특했다.
"다 했으면 슬슬 갈까?"
"넵!"
"오케이! 집으로 고고!"
우리 동아리는 여전히 3명이었다.
내가 동아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동아리가 이제 목록에 노출된다.
거기에 루시와 루미라는 미녀 쌍둥이 조합 때문에 남자 생도들의 신청이 줄줄이 들어오고, 나 때문에 여자 생도 신청도 많이 들어온다.
하지만 아직은 펠릭스의 흉터가 루시에게 남아있었다.
루시는 그 이후로 나를 제외한 남자들과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뭐, 루시가 남자 새끼들이랑 대화하는 꼴을 안 봐도 돼서 나는 좋았다. 약간 의도한 일이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당분간 신입 부원을 받지 않기로 했고, 이 동아리방은 셋이 사이좋게 지내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그럼 내일 보자."
"어차피 같이 기숙사 갈 거면서 인사는 왜 해?"
"응? 아, 오늘 쇼핑할 일이 있어서!"
루시가 지갑을 흔들며 말했다.
"아하, 그래? 뭐 살건데?"
"그, 그냥 뭐. 생필품?"
말을 더듬는 거 보니 생리대네.
이런 사소한 걸로 여자의 심리를 알아채다니, 나도 감이 좋아졌다.
"알겠어. 나랑 루미랑 같이 갈게. 내일 보자."
"잘 가. 루시. 내일 봐."
"응! 바이바이!"
루시는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우다다 달려갔다.
나는 남은 루미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그럼 우리도 갈까?"
"… 그, 호연 씨?"
"응?"
"하, 할 말이 있는데 잠깐 동아리방으로 다시 가주실 수 있나요?"
"어, 당연히 가능하지."
나는 루미의 뒤를 따라 동아리방으로 돌아왔다.
루미는 내가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문을 잠그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루미?"
루미의 얼굴이 조금 빨갛다. 문을 잠그기까지 했고.
이쯤 되면 무슨 일을 할지 나도 감이 온다.
"오, 오늘 저희를 위해 나서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루시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별 거 아니야. 나도 짜증 나서 그런 거니까."
"저를 위해 짜증을 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정이, 되게 기뻐요. 루시는 가족이지만, 호연 씨는 가족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저를 위해서…."
음, 솔직히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그런 건데. 그냥 가만히 있자.
루미는 엄청나게 감동받은 듯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귀엽네.
"우, 우리는 비밀 친구잖아요. 그, 이럴 때는 좀 더 비밀스러운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응."
"호연 씨 에게 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루미는 양손의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었다.
"그, 그러니까아… 감사의 의미로… 기,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그, 근데 제가 아직 서툴러서……."
그리고 자기 입안에 v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입을 사각형으로 최대한 넓게 벌리면서 웅얼거렸다.
"여, 여기. 호여 시가 지쩌 사요해주세여…."
꿀꺽.
루미의 빨간 속살이 내 눈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