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테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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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롭게 모임에 녹아든 나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활동 자금 명목으로 거액을 쾌척.
테러는 보기보다 돈이 많이 드는 일인지라, 모임의 사람들은 기쁘게 그것을 받았다.
테러가 없는 자들의 투쟁수단이라곤 해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역시 돈이 최강이다.
"오오... 이만한 돈이 있으면 용병도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러시아의 헌터들은 용병으로 자주 활동한다고 듣긴 했습니다. 한 번 알아보죠."
"자세한 투쟁 방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거군요?"
"네. 아직 인원과 자금을 모으는 중이니 유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헌터 범죄의 피해자라서 정신무장이 비교적 잘 되어있는 편이었으나...
나는 주저없이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이 아파트도 사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아파트요?"
"네. 서울을 20년 동안이나 지켜주셨는데, 아직 아파트 하나 없다고 하셨잖아요. 서울에 자택을 가지고 있으면 아지트로 사용하실 수도 있을테니까..."
도박으로 재산을 싸그리 날려먹었던 은퇴 헌터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떨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헌터들과의 소송 등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라 내 도움을 아주 고맙게 받아들였다.
원래부터 후원을 해주던 배후가 있긴 했지만, 그쪽은 나와 달리 활동 자금을 상당히 빠듯하게 줬다.
그쪽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잃을 것이 있다면 테러를 하기 힘들어진다.
본인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사상에 심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릴때부터 철저하게 세뇌된 사람들도 막상 실전에선 폭탄 조끼를 벗어던지고 도망쳐버릴 수 있다.
생명과 재산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 따윈 없다.
우리의 공작은 모임의 외부에서도 진행됐다.
서지유는 오늘따라 유달리 표정이 밝은 회원에게 다가가서 그를 축하해줬다.
"축하드려요. 고향 사건의 진범이 잡혔다면서요?"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부모님들께서도 성불하실 수 있겠어요. 역시 특수대는 좀 믿을만할지도..."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특수대도 결국 헌터 협회의 앞잡이일 뿐이라구요. 지금의 썩은 협회와 정부를 뿌리채 뽑지 않으면 특수대가 활약해봤자 소용없습니다."
"...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잠시 마음이 약해졌나봐요."
물론, 아무리 그래도 집단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극적으로 바뀌진 않았다.
이들은 나름대로 엄선된 조직원들인 것이다.
각자 사연과 고충은 달라도 헌터들과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만큼은 진심이다.
이제와서 투쟁하기 싫다며 당당하게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조직의 투쟁 방법은 점점 더 온건한 쪽으로 논의되었다.
처음 계획은 생화학무기나 폭탄을 활용한 무차별, 대규모 테러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슬슬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생화학무기는 취급이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보기보다 살상력이 약하다는 소리도 있고..."
"맞습니다. 한 번 들이쉬자마자 죽어버리는 수준의 독가스 같은 건 거의 없더라구요."
"바이러스는 대량으로 구하기가 곤란한데..."
"이곳의 설비로 폭탄을 제조하는 것은 어렵겠죠?"
"폭탄은 그만두죠. 만에하나 실험 도중 폭발이라도 하면 순식간에 들통날테니까요. 여기엔 폭발물 전문가도 없고..."
이건 힘들다, 저건 곤란하다.
이런저런 변명거리와 함께 차일피일 미뤄지는 결행일.
심지어 테러의 장소는 어느덧 강남에서 광화문으로, 그리고 광화문에서 강북으로 바뀌었다.
시내는 감시가 워낙 철저하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 핵심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의 조직원들은 다들 강남에 집 한채씩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이기주의의 결정체, 님비현상은 이런 테러에서도 충분히 적용이 된다.
이번만큼은 그런 인간의 이기심이 썩 보기 싫지 않았다.
서지유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살짝 감탄했다.
"결국 이번 회의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잘 풀릴 줄은..."
"훗. 벌써 다들 열정이 식어버린 게 보이지? 이제 그 사람들도 강남 부동산 오너인데 테러 따윌 하고싶진 않겠지."
참고로 여기까지 2주도 안 걸렸다.
아까 서지유에게 위로받았던 회원같은 경우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탈주각을 재고 있었다.
"그 양반은 아마 다음 집회에 안 나올 거야. 한 번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금방이지."
"그나저나 아직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후원자는 어떻게 하죠? 아무래도 그쪽이 진짜 리더 같은데요."
"그쪽은 이미 눈치까고 손 뗐을 걸? 아까 대표의 말이 좀 지리멸렬했잖아. 그게 다 진범이 대본을 짜주지 않아서 그래."
"아..."
내 말대로 결판은 금방 나버렸다.
오늘 저녁 뉴스에서 테러 처벌법 강화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마자 대표가 내게 연락을 걸어온 것이다.
"아, 네. 대표님. 갑자기 30억이요? 아... 확실히 헌터장비가 비싸긴 하네요. 마침 부동산 자산을 처분해둔 게 있으니까 금방 준비해보겠습니다. 네, 전달 방법은 전과 같이... 네네."
서지유가 옆에서 배꼽을 잡고 소리죽여 웃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누가 탈주했나봐."
한 번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런 비밀조직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만에하나 신고라도 당하는 순간 끝장.
지금까지는 용케 회원들을 관리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통솔했다면 모르지만 말야. 블랙 로터스 자식..."
"아앗, 역시 이번 건은..."
"걔 말고 또 이런 계획이 가능한 놈이 있겠어?"
범죄 컨설턴트.
이번 테러 조직의 수법은 블랙 로터스가 보여줬던 것과 굉장히 유사했다.
녀석은 은행강도 사건 때 현금 40억을 확보했으니, 자금지원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물론 그래봤자 이쪽에서 돈다발로 때려대니까 버틸 수가 없다.
이틀 뒤,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안전가옥에서 뒹굴거렸다.
어젯밤에 돈을 챙겨서 도주를 시도했던 대표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대원들에게 곧바로 구속당했다.
조직 범죄가 대개 그렇지만, 테러 조직의 수괴는 특히나 처벌이 엄중하다.
나를 포함한 회원 몇 명과 대표가 출석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인원들은 지금쯤 패닉 상태에 빠졌으리라.
잠시 뒤, 특수대 사무실에는 곧바로 테러 신고 전화가 몇 건이나 걸려왔다.
겨우 상황을 눈치챈 회원들이 서로를 신고하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군."
오늘 저녁 즈음이면 내가 기다렸던 기사가 속속 올라올 것이다.
헌터 대상 테러 모의 일당, 내분으로 인해서 자멸!
덕분에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테러 범죄율이 낮은 국가라는 명예를 지켜낼 수 있었다.
서지유는 살짝 안도하면서도 뒤늦게 질문했다.
"그런데 실행까진 가지 않았는데 테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는 건가요?"
"테러는 단순 모의나 예고, 조직 결성도 처벌한다니까? 특히 이번 건은 빼박이야."
비록 미수로 끝나긴 했지만... 이번 조직은 회사의 설비를 이용해서 생화학 무기의 제조까지 시도했다.
녹취록도 준비해뒀으니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걱정없다.
"녹취록은 또 언제... 집회에는 전자기기 못 들고갔잖아요?"
"요즘은 집음기 성능이 너무 좋아서, 장소만 대충 알면 게임 끝이야."
덕분에 한 건 해결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돌연, 나긋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본 출장 때 겪었던 바로 그 현상이었다.
[또 특별 수사관님이신가요...]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나는 블랙 로터스의 텔레파시에 분통을 터뜨렸다.
서지유도 들리는 듯 무척 당황한 모습.
이곳은 확실히 안전할텐데... 장소파악이 안 돼도 텔레파시를 전달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당했어요. 설마 그런 방법을 사용하실 줄이야. 핵심 멤버들은 나름대로 잘 선정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역시 직접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통제에 한계가 있군요.]
"잘 아네. 그럼 슬슬 보여주시지? 내가 하루 세 끼, 간식 다섯 번에 콜라 무제한으로 제공할게. 참고로 용돈도 꼬박꼬박 잘 나온다."
만약 티아였다면 넙죽 절하면서 달려들었을법한 조건.
그러나 블랙 로터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하지만 예리엘 프로스트에게 죽고싶진 않아서요.]
블랙 로터스는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녀석의 환영이 보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마력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작전을 끝낸 나는 슬슬 자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서지유는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제스쳐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곤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명색이 위장 부부인데, 부부다운 짓은 거의 못했다.
무척 진지한 분위기의 테러 조직에서 염장질이나 하는 것도 좀 아니지 않은가.
"음, 잘 생각해보니까 내일 들어가도 될지도."
"후훗. 그렇죠?"
소파에 다시 주저앉은 서지유가 은근슬쩍 옷을 한꺼풀씩 벗기 시작했다.
내가 살짝 당황하자 그녀가 되도 않는 변명을 해댔다.
"저... 저는 원래 집에선 속옷차림으로 다니거든요."
"웃기시네. 너도 결국 내 몸이 목적이면서."
"엣.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사실이지만..."
우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천천히 몸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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