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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75화 (75/93)

〈 75화 〉 75화 악신의 칼날

* * *

진짜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다!

무슨 한 마리가 보이면 수십 마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놈 잡으니까 두 놈이 튀어나오네! 아니, 이 도시 진짜 왜 이래? 악신의 칼날이 한 놈만 있어도 이상한데 세 놈이나 있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여기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도시야?

여기서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거야?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이거 가볍게 생각하고 나왔는데, 상상 이상의 문제가 있는 곳이었다. 이러다가 여기 문제를 다 해결하고 가려면 이계형 던전에도 못 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그건 안 돼. 뭐가 됐든 최우선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가야 해. 내 모든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분명 무언가가 바뀔 거라고. 예지에 가까운 직감. 살아오면서 이게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아이르세르의 말에 멍청하게 넘어가서 그래. 하아. 후회는 해도 해도 끝이 없군! 뭐,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이다. 지구에서도 이 정도로 후회할 일은 두 번뿐이었으니까.

아. 진짜 짜증나네. 화가 솟구친다. 열 받아. 죄다 때려 부수고 싶은 기분이야. 구체적으로 눈앞의 두 명을. 기분 나쁜 새끼들. 정말 더러운 기운이다.

……아니지. 흥분해서 좋을 게 없어. 좋아. 심기일전하자.

“후우.”

길게 숨을 내쉬어서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명을 유심히 살폈다.

양쪽 다 어둠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체형과 움직임으로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왼쪽의 등이 굽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자는 노인.

오른쪽의 키가 크고 굴곡진 몸매에 단검을 들고 있는 자는 젊은 여성.

조금 전 구체를 발사한 게 누군지도 알겠다. 너무 고전적인 생김새가 반전이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가 저들을 고전이라 여기는 건 지구에서 와서 그런 거겠지.

“흐, 흐아아아아!”

“으, 으으으으윽!”

내가 빠르게 반응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경비대원과 상단 간부들은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 나는 그들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새끼들 데리고 뒤로 물러나세요. 여기 있다간 죽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조, 조심하십시오!”

다행히 같이 싸우겠다는 등의 헛소리로 시간을 끄는 사람은 없었다. 경비대원들이 상단 간부들을 데리고 경비대장이 있는 뒤로 물러나는 동안 나는 놈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추가적인 공격은 없었다. 그저 이쪽으로 걸어올 뿐이었다.

…내 오른손에 잡힌 놈도 그렇고 저것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쓸데없이 폼잡는 걸 좋아하는 거야?

…뭐, 이런 야밤중에 후드를 쓰고 얼굴도 가리고 있으면 의미심장한 발걸음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그건 어릴 때나 허용되는 행동이지, 나이도 먹을 대로 먹고 신의 사도라 부를 정도의 녀석들이 할 짓은 아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것들의 직책이 악신의 칼날이라는 실로 중2병스러운 네이밍이었지? 와. 이걸 왜 이제야 깨달았지? 판타지 세계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건가? 아니면 내 마음속 중2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놈들은 내게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조금 전에 그런 난리가 났으니, 이제 군대도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고, 각 교단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비교적 외각에서 한바탕 벌인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를 피웠으니 온 도시 사람들이 다 알았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여유를 부린다고?

…지능이 없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믿고 있는 게 있다는 건데? 좋아. 먼저 말을 걸어볼까.

“뭐야. 다들 벙어리야? 왜 말들이 없어?”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반응은 있었다. 노인 쪽이 작게 몸을 떨은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그들이 왜 가만히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아. 조금 전부터 기분이 나빴던 게, 짜증 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만이 아니었구나!

나는 이제야 깨달은 사실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조금 전부터 부리는 수작이 먹히지 않아 말을 잊을 정도로 당황하셨나?”

“……네놈.”

그 말에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잔뜩 늙은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이죽거렸다.

“하여간, 누가 악신 따위를 믿는 것들 아니랄까 봐, 일단 무지성으로 저주 같은 걸 걸어보는군? 하지만 이걸 어쩌나. 너희 신의 그 허접한 저주로는 내 몸에 흠집 조차 못 내는데?”

“…내가 부족할 뿐. 그분의 진정한 힘에 비하면 네놈은 하찮은 벌레에 불과하다.”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으르렁 거리는 노인의 말에 나는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허이구. 그러셔? 그럼 그 잘난 신께 나를 조져달라고 애원이라도 하시지 그래? 아무래도 너희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어?”

“……벌레놈이.”

노인이 살기어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옆에있던 여자가 움직였다.

쐐애애애액!

어둠을 담은 단검이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무려 초속 250m! 이 세계에 와서 겪어본 투척물 중에 가장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내게는 익숙한 속도다.

탕!

“………!”

“………!”

마치 하찮은 벌레를 쫓듯이 휘두른 손등에 맞은 단검이 하늘로 튕겨 나갔다. 손잡이를 잡아볼까 했지만, 원거리에서도 간섭 가능하다면 오히려 낭패를 볼 수 있기에 일부러 튕겨냈다. 예상대로 튕겨나간 단검은 허공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여성의 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추가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노인도 여성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을 보고 내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벌레인지 모르겠네. 웬 날파리람.”

자존심을 박박 긁는 도발에 여성이 움찔했다. 나름대로 자신 있는 특기였을 텐데, 너무나도 간단히 막혔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 좋아. 더 분노해라. 너희들의 빡침은 나의 기쁨이니!

“……페르딘마르가 괜히 당한 게 아니군.”

“전력을 다해야만 해.”

처음으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호오. 생각보다 더 어린 것 같은데? 목소리만으로 나이를 짐작하는 건, 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위험하지만, 1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의 목소리다.

여자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교도들이 냄새를 맡았다. 페르딘마르는 포기다.”

“…저 자는?”

“시간이 없다.”

“………응.”

노인의 말에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수긍하기는 했지만 납득하지는 못한 모양새.

그런데 말이다. 이것들은 왜 나를 개무시하고 있는 거지?

“누가 그냥 보내준데?”

서늘하게 내뱉고 들고 있던 놈을 힘껏 하늘로 집어 던졌다.

“………!”

“……웃!”

조금 전에 포기하려고 했던 동료가 하늘을 날자 두 사람은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후퇴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자기네가 원하는 것을 냅다 던져 주면 누구라도 당황한다.

당황은 빈틈이 된다.

진괘?? 전광?光

단 한걸음과 그들과 나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었다.

“………!”

뒤늦게 내 접근을 알아차린 노인의 지팡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 주먹이 한발 더 빨랐다.

진괘?? 뇌격雪?

콰아아앙!

“크허어어억!!”

“…영감!”

노인은 가까스로 방어막을 형성하긴 했지만, 단 한방에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아주 잘 날아가는군! 아까 놈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리액션이 찰지다니까!

“이…!”

“느려.”

동료가 날아간 것에 분노한 여자는 단검으로 내 목을 찌르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내가 훨씬 빨랐다. 해보고 싶었던 대사 7위를 내뱉으면서 손목을 잡고 그대로 무릎을 걷어찼다.

“큭!”

여자는 보기보다 튼튼했는지 한방에 무릎이 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균형이 무너지고 내게 붙잡힌 이상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감괘?? 수번?

내가 당기는 대로 앞으로 회전한 여자는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컥!”

그래도 최후의 순간엔 양팔로 머리를 보호했지만, 충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그리고 그때 내가 집어 던진 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놈을 돌려차기로 걷어차서 경비대장이 있는 쪽으로 날려버렸다.

“그놈 잘 간수하고 있어요!”

“…아, 알겠습니다!”

경비대장은 악신의 칼날 두 명을 순식간에 압도한 내게 경도되었는지 겁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와 놈을 질질 끌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보고 피식 웃은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팡!

내 머리를 노리던 검은색 광선이 손등에 튕겨 나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 조금 저릿한 게 겉보기와는 달리 보통 위력이 아니었나 본데? 조금 감탄하면서 공격이 날아온 곳을 보자 온몸에서 검은색 기운을 뿜어내는 노인이 지팡이를 겨누고 있었다.

“곱게 죽진 못할 거다!”

“…크아아악!”

분노의 외침에 분노의 포효가 대답했다. 내게 여전히 손목을 잡힌 여자는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힘의 방향을 조정하면 자기 팔을 베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노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슝! 슝! 슝! 슝! 슝! 슝! 슝! 슝!

검은색 광선이 끝도 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쳐내면서 여자의 손목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목표를 잃은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키야아아앗!”

짐승 같은 표효를 지르면서 여자가 마구 단검을 휘두르자 얇은 검기가 마구 쏟아졌다. 누가 동료 아니랄까 봐 공격방식도 똑같군!

나는 벌레를 쫓는 듯이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응수했다.

타다다다다당!

파바바바바밧!

그 결과 노인의 검은색 광선과 여자의 검은색 검기를 양손으로 각각 쳐내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검기와 광선의 난무!

주변 건물과 바닥이 엉망이 되었지만, 죽거나 다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일부러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 네놈들 상대론 이 정도 조절은 여유지!

그 감정을 감추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자 놈들도 악이 바쳤는지 더욱 가열 찬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움직임은 더욱 부드러워지고 여유로워졌다. 놈들의 공격에 익숙해지고 미리 예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춤추 듯이, 구름을 노닐 듯이, 하늘을 날 듯이.

살의를 품은 흑선?? 사이에서 오로지 나만이 자유로웠다.

…하, 하하하하하! 역시 실전이야! 실전이야말로 실력 상승의 정석이다!

막혀 있던 벽이 시원하게 뚫렸다. 연달아 치러진 전투에서 나는 내 영혼육백의 사용법을 더욱 세세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마력과 기는 다룰 수 없고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한 발자국씩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여기서 이놈들과 싸울 이유는!

“크아아아아아!”

“키야아아아앗!”

공격이 통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더욱 여유로워지자, 놈들도 온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검은색 광선은 더욱 두꺼워지고 빨라졌으며, 안 그래도 얇았던 검기는 더욱 얇아져서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검은색의 폭풍우 속에서도 내 마음은 평온했다. 마음이 평온하니 몸 또한 평온했고 내가 장악한 공간엔 평화만 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손이 원을 그렸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자연스럽게 발이 원을 그렸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원 안에서 모든 것은 순환했다.

내 몸도. 마음도.

내 육백도. 영혼도.

회전하고 다시 회전하고 다시 회전한다.

“……….”

“……….”

회전 끝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그야말로 처참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도로의 포석이 엎어져서 흙바닥이 드러났고, 주변 건물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곳을 찾는 편이 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광경 속에서도 오로지 내 주변만 멀쩡했다.

파괴의 현장 속에서 내가 그린 원만이 오롯이 존재했다.

태극太?

두 악신의 칼날은 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을 가리던 어둠마저 사라진 두 명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나는 옅게 웃었다.

그때, 나를 향해 익숙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시그 님!”

그 뒤를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따라왔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야천랑의 발톱을 만든, 아이르세르의 축복을 받은 칼이 내 손에 잡혔다.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야천도???다.

야천도를 눈앞에 세웠다.

밤하늘의 별빛 아래에서 빛나는 검 너머로 멍하니 있는 악신의 칼날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나의 여신이 보였다.

“시르.”

지금부터 너의 남자가 악신의 사도들을 어떻게 박살 내는지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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