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74화 (74/93)

〈 74화 〉 74화 악신의 칼날

* * *

레르크 상단주를 제압하고 상단 건물에서 악신의 상징을 다수 찾아낸 나와 경비대원들은 참고인들을 몇 명 붙잡았다.

악신의 엠블럼을 가지고 있던 직원은 케로스라 불린 직원 하나였지만, 악신의 상징이 발견된 방을 주로 사용하던 사람들과 상단의 간부들도 심문을 받아야 했다.

상단 건물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곧바로 그들의 집으로 경비대원들을 보냈다. 다행히 최근 상단이 바빠서 대부분 직원이 상단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기에 데리고 올 직원은 두 명뿐이었다.

레르크 상단에서 일어난 소란에 잠에서 깬 주변 주민들은 난데없는 소란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경비대원은 물론이고 상단 사람들도 그것을 설명해줄 정도의 정신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내 말에 따라서 움직이면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야, 잘나가던 상단의 주인이 알고 보니 악신의 추종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걸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흠. 상단직원들의 대부분은 죄가 없으니, 일단 안심시켜줘야겠군.

“이런 일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군요. 이미 들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이름은 시그입니다. 옥석 모험가이고 이번에 어쩌다 보니 악신의 추종자들과 싸우게 된 사람이죠.”

“그, 그러시군요.”

상단주는 펀치 한 방에 기절했고 간부들은 전부 포박했기 때문에, 과장급 위치였던 직원이 대표로 대화를 나눴다.

“순전히 우연으로 시작된 싸움입니다만…. 모든 정황이 레르크 상단주가 악신의 추종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니 숨길 수 없는 악신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악신의 기운… 그런 걸 느끼실 수 있는 겁니까?”

“제가 익힌 기공이 조금 특이해서.”

그렇게 대답하면서 웃어주자 과장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서 레르크 상단주를 제압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상단에서 근무하는 모든 분이 악신의 추종자와 연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그렇습니다! 애초에 저는 지신교를 믿습니다!”

“저, 저도 지신교를 믿고 있습니다!”

“저는 천신교에요!”

“사원에는 매주 가고 있다고요!”

혐의에서 벗어나고 싶은 과장의 외침에 다른 직원들도 따라서 외쳤다. 악신의 추종자와 연관이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극형이 내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흉악한 범죄다.

이번 일에 직접 관련된 자들은 틀림없이 사형이 선고될 것이다. 어쩌면 각 종단에서 이단심문관을 보내서 고문 끝에 화형을 당할 수도 있고. 그 정도로 악신의 추종자들을 대하는 이 세계 사람들의 태도는 격렬했다.

그야, 그렇게 사악한 행위를 밥 먹듯이 하고 테러를 하는데, 인식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나 참. 그런 정신 나간 신을 믿는 것들이 꾸준히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라니까.

뭐, 악행이 적성에 맞는 인간들에겐 딱이겠지. 평소 좋아하는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힘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잖아? 탄압당해야 마땅한 종교다.

직원들의 격렬한 반응은 당연하다. 그들은 억울할 것이다. 안 그래도 상단도 망할 판국인데, 여기에 악신의 추종자와 연관되었다고 엮인다? 그날로 인생 끝이다. 필사적일 수밖에.

그런 심정을 알기에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물론, 저는 여러분들이 전부 그런 추악한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요? 그 레르크 상단주가 악신의 추종자였다는 것을! 그처럼 자신의 종교를 숨기고 숨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그건….”

“…그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케로스 씨…. 같이 천신교 사원도 같이 갔었는데… 그게 전부 연기였다고?”

“젠장! 악신의 추종자들은 신앙을 속이는 것 정도는 죄에 들지도 않아! 쓰레기 새끼들이라고!”

직원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나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면서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알다시피 악신의 추종자는 하나같이 흉악한 범죄자들! 그런 자가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여러분들은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

대답은 없었다. 그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앞날에 드리운 어둠을 보고 절망할 뿐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군. 일단, 여기 있는 사람 중엔 악신의 추종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저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악신의 추종자같이 흉악한 자들이 아닌 이상에야 그 누구도 바라지 않겠죠. 그래서 저는 이번 일의 전말을 얘기할 때 여러분들의 무죄를 탄원하겠습니다.”

“그, 그럴 수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오, 오오오! 이토록 자비로울 수가!”“감사합니다! 모험가 님!”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환호성과 함께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감사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저는 여러분들을 믿지만, 조사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조사에는 최대한 협조적으로 참여해주세요. 그래야만 여러분들이 악신의 추종자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선 약간의 고통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얘기하겠습니다!”“기회만 주신다면…!”“아. 신이시여!”

일부 직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야, 이대로 지옥으로 떨어지나 싶었는데 그걸 적극적으로 구해주려는 사람이 있으니 눈물이 나올 법도 하지.

좋아. 이걸로 27명의 직원에게 은혜를 입혔어.

그들은 악신의 추종자와 연관되었다는 혐의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그들이 평화를 얻는 건 아니다.

악신의 추종자가 상단주로 있던 곳의 직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편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볼 것이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겠지. 그렇게 되면 여기 직원들의 삶은 고달 퍼지게 될 거다.

더군다나 상단의 재산은 영주가 몰수할 확률이 높아서 모아둔 돈이 없으면 무일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도시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어지겠지.

그때 내가 이들을 줍는다.

그리고 내가 만들 회사의 직원으로 고용한다.

이런 잘나가는 상단의 직원들이라면 기본적인 능력은 보증되었다. 거기다가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는 은혜를 입혔다. 충성을 바치는 능력 있는 직원 27명을 얻은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갚으려고 하진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전체의 90%만 내게 절대적으로 충성해도 남는 장사다.

운이 좋군.

그 뒤에 상단주와 주요 간부들의 포박을 끝내고 증거물도 전부 수집한 뒤에(당연히 장부도 챙겼다) 상단 건물을 나섰다.

직원들은 그런 우리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래도 일단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경비대원 두 명을 남겼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괜히 적대적인 행위를 해서 의심을 사느니 조용히 있는 게 낫다는 걸 아는 거겠지.

나는 직원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면서 끌고 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기절한 상단주는 굳이 볼 것도 없었지만, 간부들은 체념하는 사람이 반, 분노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전원이 상단주에게 협력한 건 확실하다. 하지만 체념한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고뇌하거나, 악신을 추종하는 무리는 아닐 것이고, 분노하는 자들을 진지하게 악신을 믿던 놈들이겠지.

악신의 상징이 있던 방을 자주 이용했던 직원들은 억울한 표정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단 지금 같이 데리고 가야 나중에 덜 문제가 된다. 억울하겠지만, 매도 처음에 맞는 게 나으니까.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관청으로 향했다. 그렇게 걷던 도중에 경비대원 중 한 명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시그 님은 정말 자비로우시군요.”

“어떤 게 말입니까?”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척하며 묻자 경비대원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기 직원들의 처우 말입니다! 보통은 상단주가 악신의 추종자라면 그 밑의 직원들도 같이 처벌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그들에겐 죄가 없으니까요. 나쁜 건 윗대가리들이지, 밑의 사람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크으. 역시 영웅이십니다!”

경비대원은 존경의 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기분 좋게 받으면서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관청으로 향했다.

“시그 님! 그자들은…!”

관청에 도착하자 나를 반갑게 맞이하던 경비대장은 뒤에 포박된 자들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네. 여기 레르크 상단주와 상단 간부들입니다. 그들은 악신의 추종자들이 맞았습니다. 여기 증거물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사무적으로 말하면서 증거물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경비대장의 안색이 파리해졌다가, 이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이, 이 흉악한 놈들이!”

그는 포박된 상단 간부들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제법 기세가 있어서 몇몇 간부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호오. 제법인데?

“이들은 마땅한 죗값을 치를 겁니다. 그런데 관청 사람들은?”

“아! 다들 오고 계십니다.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거기다가 엮여 있는 사람들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경비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뒤에 있던 경비대원들은 하나 같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데려간 대원보다 수가 조금 늘었군. 관청을 지키던 대원들까지 합류시킨 걸까? 새벽에 다들 고생이 많네.

…제일 고생한 건 나지만. 하아. 이 도시 사람도 아닌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악신의 칼날을 노려보았다.

…그래. 이 좆같은 씨발 새끼들 때문이지. 이것들이 내가 가는 도시에 있었고, 좆같은 짓들만 벌이니 가만둘 수가 있어야지. 어차피 척을 질대로 진 이상, 주요 전력을 이렇게 날려버릴 수 있는 건 큰 이득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자.

경비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른 걸 물어봤다.

“경비대장님. 혹시, 최근에 이상한 일들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건 말이죠.”

“그거라면….”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편인 경비대장은 내가 묻고 싶은 게 어떤 건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이를 악물고는 눈을 번쩍 떴다.

“…있습니다.”

“뭡니까?”

“…최근에 부랑아들이 연달아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

“부랑아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골목에서 자주 보이던 아이들도 전부 사라졌었으니까요. 그쯤 되는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생존방법이 있어서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다니…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조사를 해보려고 했는데…. 페도쿠스 의원이 그런데 사용할 인력은 없다고 막았었습니다.”

“페도쿠스 의원?”

“시그 님이 잡은 고위 공직자입니다! 빌어먹을!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작자가…!”

경비대장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거, 진심이군. 조사하려고 했던 것도, 그것을 페도쿠스라는 이름도 더러운 놈이 막았었던 것도. 하지만 경비대장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고위 공직자를 거스르면서까지 조사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뭐, 그게 어딘가. 연고도 없는 부랑아들을 그 정도로 걱정해줬던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선량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분노에 공감했다. 진심으로.

“그 인간 같은 않은 새끼의 집에도 경비대원을 보내야겠군요. 그리고 도시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겠습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는지 모르니….”

“…크으으윽!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악마의 하수인 새끼들!”

경비대장은 구속되어있는 상단 간부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경비대원들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중에 사라진 부랑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은 없었다.

…나야 당연히 그렇고. 이런. 우울해지네.

하아. 그런데 이렇게 사악한 의식을 꾸미고 있는 녀석들이 있는데, 다른 종교놈들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오히려 이런 놈들은 종교인들 전문 아닌가?

……아니, 잠깐만.

분명, 아이르세르는 각 종파의 높으신 분들에게 정보를 알렸다고 했다. …아니, 아니야. 그건 차원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는 얘기다. 아이르세르가 교단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야. 아이르세르는 어째서 악신의 추종자들과 관련된 정보는 각 교단에게 알리지 않은 거지?

이상하다.

차원에 구멍이 뚫린 게 큰 문제인 건 맞다. 하지만 악신의 추종자들의 존재도 큰 문제이다. 그리고 굳이 놈들에 대한 정보를 교단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차원의 구멍 얘기를 할 때, 악신의 추종자들 얘기도 같이하면 되잖아?

아무리 신들이 인간과 감성이 다르다 하더라도, 굳이 신령이나 계시 같은 걸로 정보를 내려준다는 건 정보의 중요성을 안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째서 교단에게 악신의 추종자들의 정보를 알리지 않았지? 그랬다면 내가 굳이 여기 아지트를 공격할 필요도 없이 각 교단이 박살을 냈을 텐데.

그리고 어떻게 아지트의 정보까지 알 수 있었던 거지?

…그래. 이것도 이상해. 신이 그 정도로 전지전능하다면 이 세상에 악신의 추종자 같은 무리는 진즉에 사라졌을 것이다. 일부러 봐준 것도 당연히 아니다. 아이르세르가 보인 반응을 보면 그녀는 악신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었다.

즉, 아이르세르가 정보를 얻은 방법은 전지전능한 신적인 힘이 아니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신자가 아지트들의 존재를 알아내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방법은… 지금 당장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알아냈다면, 신령을 통해 내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해당 도시의 다른 교단에 알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 어떤 교단이라도 악신의 추종자들이 상대라면 서로 힘을 합칠 테니까.

그래. 그래도 이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건 있다. 그녀의 신자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아지트의 존재를 알았지만, 특별한 방법이니만큼 어떤 제약이 있어서 다른 교단에 알리지 못했다는. 지극히 편의적인 상황이어도 일단, 말이 되기는 한다.

지금 가장 말이 안 되는 상황은 내가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는 거다.

…본래라면 아이르세르와 대화할 때 깨달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왜 이제야? 이런 당연한 의문을 떠올리게 된 거지? 어째서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사명감을 가지고 악신의 추종자들을 박살내러 간 걸까?

이미 엮일 대로 엮어서 미리 부순다? 그래.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내가 할 법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전제조건을 생각했어야 했다.

어째서 아이르세르는 이 정보를 나한테만 줬지?

어째서 나는 아이르세르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나?

…조종당하고 있다? 내가?

…아니, 그건 아니다. 내 영혼육백에 침입의 흔적은 없다. 그날 밤 얻은 작은 성취로, 나는 영혼육백을 제대로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르세르가 말한 내 영혼육백의 완벽성과 강력함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직접적으로 조종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접적이라면?

…이건 내가 지구에 있을 때 자주 사용한 방법이다. 아니, 이세계에서도 몇 번이나 사용한 방법이다.

상대방이 스스로 나를 돕게 만드는 것.

기쁜 마음으로. 별다른 의심 없이. 호의로. 혹은 존경과 애정으로.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재산을, 노동력을 희생해서 나를 돕게 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건 그냥 사람들이 내게 선의를 가지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확실하게 보상도 했다.

…아이르세르가 내게 한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했던 것보다 좀 더 강력했을 뿐.

……그래. 나는 아이르세르가 만났던 다른 인간들과 확실히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 그녀의 신성에 영향력을 받은 건 다르지 않았던 거야.

그건 일종의 언령?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에 그녀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것처럼.

구해달라는 목소리에 마음이 강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살려달라는 외침에 의협심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말에 악신의 추종자들을 스스로 나서서 박살 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 붙인 이유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유가 없더라도 놈들을 박살 내기로 했다.

……하.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내가 이런 거에 당할 줄이야!

내가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움직일 줄이야!

그래. 100% 타인의 의지는 아니겠지. 오히려 내 의지가 90%는 차지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누가 구해달라고 해도, 누가 살려달라고 해도. 그 말에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100% 나의 의지다. 그 말들은 어디까지나 행동의 목적이 되는 거지, 행동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언행의 이유를 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다.

그런데 아이르세르는 그 이유를 본인이 정했고, 나는 멍청하게도 그대로 따랐다! 행동의 목적은 자신이 정했다는 식의 무자각의 멍청한 자기 위로를 하면서!

…망할 년! 시르와 닮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휘둘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악의는 없었겠지. 사실, 나를 조종하려는 의도 조차 없었을 거다. 그저 신령이라는 존재가 가진 막강한 힘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자연스러운 힘이. 그녀의 외모가.

내가 그렇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이르세르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고작 그 정도에 휘둘려서 움직인 미숙한 내 잘못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화가 나고 분했다.

“…씨발.”

“네! 정말 씨발새끼들입니다아아!!!!”

저도 모르게 나온 욕설에 경비대장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욕설을 지껄였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경비대장은 놈들의 행태를 상상하면서 더더욱 흥분하고 있었다. 그에 동조하듯이 경비대원들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후우. 그래. 후회는 나중에 하자. 반성회는 시간이 있을 때 찬찬히 해야지.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겠군. 완벽하기는 무슨. 아직도 고작 그 정도의 말에 휘둘리는 멍청이다.

그래도 발전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한 건 좋은 일이네. 그리고 아리르세르는… 본인이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내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들었으니, 나중에 만나면 엉덩이라도 걷어차 줘야겠다. 고맙다. 씨발년아.

“자자. 진정하세요. 지금은 이놈들을 족치는 게 아니라, 놈들의 음모를 막는 게 가장 중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등 뒤에서 오싹한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엎드려!”

“………우왓!”

내 말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이미 한번 경험한 적 있는 경비대장과 대원들이었다. 나는 내 뒤에 있던 경비대원들이 엎드리는 순간 그들의 등을 밟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떨어지는 거대한 검은색 구체를 발로 걷어찼다.

퍼엉!

콰앙!

“우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하늘로 솟아오른 검은색 구체는 이내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충격에 근처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만약, 저게 본래의 목표에 맞았다면… 나는 몰라도 레르크 상단의 인간들과 경비대원들은 뼈도 못 추렸을 거다.

“하. 씨발.”

욕설을 내뱉으면서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두 인영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오른손에 붙잡고 있는 망할 놈과 똑같은 복식을 한, 남녀가.

얼굴을 어둠으로 가리고 그 안에서 붉은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젊은 여성과 노인이.

악신의 칼날.

그놈들이 둘이나 더 나왔다.

…이 도시 괜찮은 거야? 이미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먹힌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여기에 저놈들이 셋이나 있는 거냐!!!!

조금 전의 고민 따윈 하늘 저편으로 날려버릴 정도의 분노를 느끼며 나는 소리쳤다.

“한 마리씩 튀어나와! 이 바퀴벌레 새끼들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