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76화 악신의 칼날
* * *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시르가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 뒤를 이어서 잔뜩 긴장한 기색의 라냐도 착지했다. 시르는 몰라도 라냐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따라왔네. 용기를 낸 건지 엉겁결에 따라 온 건지는 몰라도 시르가 먼저 권유하지는 않았을 거다.
“시그 님.”
시르는 나를 보면서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상냥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아니라 상냥하고 무서운 미소였다! 너무 무서워서 순간 나 자신을 속이고 말았어! 히익!
…흠흠! 그래도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시르도 나와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이 어떤 녀석들인지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위험한 일에 자신을 대동하지 않은 게 서운할지언정 크게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시르를 따돌리는 건 안 좋아. 조만간 시간을 내서 시르와 함께 단련을 해야겠어. 물론, 라냐도 같이. 나도 재점검을 해봐야겠고. 후후. 오랜만에 빡세개 수련하겠군.
“………?”
앞으로 혹독한 수련을 암시하는 눈빛을 받은 라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면서 전환이 빠르구만.
그걸 보고 피식 웃고 다시 악신의 칼날 놈들을 바라보았다. 놈들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태극과 내가 들고 있는 야천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군.”
어느새 굽었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교의 신이 축복한 검인가…. 조금 전의 그것도….”
“그건 그냥 내가 강해서 그런 거고.”
놈의 말을 자르면서 나는 야천도로 놈들을 강렬하게 겨눴다. 그 기세에 그들이 움찔한 순간 나는 움직였다. 단번에 노인에게 달려들어서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흡!”
노인은 되도 않는 기합을 내면서 방어막을 생성했지만, 주먹으로도 부술 수 있는 걸 칼로 부수지 못할 리가 없다. 방어막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그 아래의 오른팔도 육체와 이별했다.
피가 튀고 노인의 오른팔이 튀어올랐다.
“큭!”
“영감!”
뒤늦게 격양한 여자가 밀도 높은 어둠을 두른 단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얇은 검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드디어 학습했나 보군. 그건 암살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면 대결에서는 별로야. 은밀성을 높이다 보니 위력을 희생시켰잖아.
여유로운 생각을 하면서 일부러 여자가 휘두르는 단검에 야천도를 부딪쳤다. 리치 차이를 생각하면 굳이 부딪칠 필요는 없었지만, 본래 여유가 넘칠 때는 상대방을 밑바닥부터 철저하게 박살 내는 편이 좋다.
“큭!”
단 한 번의 충돌에 여자의 단검이 튕겨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서 두르고 있던 밀도 높은 어둠마저도 흩어졌다.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뜬 여자는 다시 어둠을 단검에 담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야천도가 움직였다.
여자의 오른쪽 손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윽!”
단검을 잡던 손목이 사라지고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잘려나간 부위를 붙잡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때 노인이 강렬한 기세를 담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콰과강!
굉음이 터지면서 내가 있던 자리의 지면이 폭발했다.
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정통으로 맞았다면 확실하게 균형을 잃었을 공격! 그리고 당연히 이딴 공격에 얻어 맞을 내가 아니다. 한 바퀴 회전하면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야천도를 휘둘렀다.
사각
종이를 베는 감각이 느껴지고 노인의 왼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 잘려나갔다.
“………!!!”
노인은 이번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이번에는 바닥이 폭발하는 대신 거대한 검은색 창이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너무 흔하고 시시한 마법. 문제는 그 크기가 내 뒤에 있는 건물까지 뚫어버릴 수준이라는 점이다. 피하면 저기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는다.
…하. 이제야 주변을 인질로 쓰는 거냐? 조금 전에도 그렇게 나왔다면 이렇게 쉽게 압도하진 못했을 텐데. 악신을 믿는 주제에 이상한 부분에서 정정당당하단 말이야. 우연히 그렇게 된 거겠지만.
뭐, 그랬어도 결국 이기는 건 나였지만.
암흑의 창을 밤하늘의 빛을 담은 칼로 내리쳤다.
진괘?? 벼락
최악!
일격. 단 일격에 거대한 창이 양단되었다. 검기 같은 걸 쓰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강대한 영혼육백이 담긴 칼날은 마법을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베어냈다.
“흠!”
그걸 보고 잠시 경악하던 노인은 억지로 기합성을 쥐어짜면서 다시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그건 잘려나간 다리를 대신하려는 발악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나를 중심으로 바닥에 검은색 원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물감 같은 검은색 액체가 꿈틀거리더니, 이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면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나는 순식간에 생성된 검은색 회오리 안에 갇혔다. 검은색 액체가 세탁기처럼 회전하면서 내 몸을 갈아버리려고 했지만, 내 몸엔 아무런 영향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닿은 액체는 산산이 흩어졌다. 내 저향력을 뚫지 못한 것이다.
이야, 그래도 이제야 좀 마법같네! 그동안 본 마법들은 하나 같이 효율 중시라서 시각적인 효과가 심심했는데 말이야! 색상별 광선이랑, 색상별 창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속으로 감탄하면서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추면서 양발을 땅에 박아 넣었다. 제아무리 내가 초인이어도 체중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액체에 몸이 갈리지는 않았지만, 점차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지지대도 없는 곳에서 몸이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바닥에 고정시키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이대로 있어도 마법은 풀릴 거다. 몸에 닿을 때마다 사라지는 검은색 액체도 결국 바닥을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야천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간괘?? 절산山
산을 가르는 일격에 회오리가 분쇄되었다.
“…크윽!”
검은색 회오리가 사라지고 보인 것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노인이었다. 안 그래도 새빨갛던 눈은 흰자위까지 피로 물들었고, 귀와 입은 끊임없이 피를 토해냈다.
얼굴과 목, 하나 뿐인 팔에서 징그럽게 돋아난 핏줄은 그 과부화를 견디지 못했는지, 피부를 뚫고 피를 분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작 조금 전 마법이? 그야, 처음으로 본 판타지스러운 마법이었지만, 악신의 칼날이 목숨을 걸 정도의 마법은 아니라고 보는데? 의아한 생각에 재빠르게 발을 바닥에서 뽑고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을 때, 시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그 님!”
고개를 돌리자, 오른손목을 잘라서 무력화시켰을 여자가 검은색 구체에 갇혀있었다.
뭐야 이거?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젠장. 그래. 이 녀석들은 기운을 감추는 성법을 쓸 수 있지! 나를 공격하는 거라면 알아차릴 수 있지만, 대상이 내가 아니면 알기 힘들어! 칫. 내가 아니라 동료에게 쓸 줄이야.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 여자 수준이라면 나를 앞에 두고 감히 시르를 먼저 공격할 수도 없고, 설사 무리해서 공격해도 시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방치한 탓이다!
나는 노인이 목숨을 걸고 여자의 몸을 감싼 구체가 뭔지 깨닫고 곧바로 구체를 향해 야천도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검은색 구체가 한순간에 수축하더니, 아예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야천도는 뒤늦게 구체가 사라진 공간을 허무하게 가를 뿐이었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잘려나간 여자의 손목과 거기에 잡힌 단검뿐이었다.
“…후, 후후후후!”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나를 가리키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다리도 하나뿐이어서 휘청거리고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지만,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걸로… 됐다. 그 아이만 살아남는다면…. 크크큭. 설마… 우리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킬킬 거리면서 중얼거린 노인은 이내 눈을 번뜩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 갔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놈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투스리카스 님이시여! 그대의 종이 귀의합니다!”
피 끓는 외침과 동시에 노인의 몸에서 검은색 기운이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페르뭐시기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와 같은 현상.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뭐시기는 그 기둥에서 힘을 받았지만, 노인은 오히려 그 기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인의 발아래부터 검은색 입자로 변하더니 기둥에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사라진 노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역겨워서 토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어린아이들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놈이, 마지막에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행복하게 죽는다? 거기다가 기둥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그 힘의 방향을 보면 최후엔 기운을 폭발시켜서 주변을 휘말리게 만들 셈이다. 전형적인 악당의 자폭.
악당이 자기만족을 하면서 죽고, 그 자폭을 가만히 두고 본다? 내가 그런 새끼였다면 진즉에 대가리에 칼 박고 자살했다. 그런 한심한 새끼 같냐? 내가 네놈이 그 지랄을 할 줄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냐?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지,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앗!
전광?光으로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락??으로 대지를 박찼다. 태을천강 강화복의 힘까지 더해져서 단번에 7m 가까이 뛰어오른 나는 야천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밤하늘의 모든 빛을 머금은 야천도는 도시 전체를 비출 수 있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새벽을 비추는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아이르세르의 축복.
그 힘이 내 영혼육백에 반응해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축복을 소모 시키는 행위지만, 그만큼 효과는 탁월하다. 아이르세르의 축복이 10년도 아닌 1년밖에 가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지상을 바라보았다. 5m밖에 되지 않은 검은색 기둥 안에 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황활경에 빠져 있던 두 눈이 경악에 물든다. 경악은 곧바로 두려움으로, 공포로 변했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를 즐겼을 때, 냉혹한 물리법칙에 따라 내 몸이 추락했다.
아니, 이건 강하?下다.
그리고 일섬一?.
건괘?? 곤괘?? 복합?? 건곤참???
밤하늘의 별을 담은 칼로 악신의 기둥을 베어내렸다.
그 안에 있던 추악한 노인의 역겨운 희망마저.
탁.
7m 높이에서 떨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소리와 함께 착지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파사사사사삭
반으로 갈라진 검은색 기둥이 위부터 빠르게 먼지로 변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야천도를 어깨에 올렸다. 그때 즈음에 검은색 기둥은 노인이 있던 부분까지 먼지로 변하고 있었다.
“……….”
노인의 육체는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위로만 남은 육체엔 생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홀경에 빠져 있던 두 눈에 절망만을 담고서 노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시작이 쓰레기이면, 끝도 쓰레기인 법.
한결 같은 인생을 맞이했으니, 이 또한 축복이다.
네놈이 믿는 신이 아닌 내가 주는 축복이지만.
쓰레기가 된 비료로도 못 쓰는 것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양손을 모아쥐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르와 입을 쩍 벌리고 침까지 흘리고 있는 라냐가 있었다.
시르에게 활짝 웃어준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경비대장과 경비대원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계속 박으면서 참회하고 있는 상단 간부들이 있었다.
…보기 좀 거북하군. 저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말이지.
작게 한숨을 쉬고 이번에는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성기사와 사제들과 고위 공직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만, 저 인간들이 발목을 잡고 있었구만? 분명 자기들을 먼저 보호해 달라고 땍땍거렸겠지.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표정을 보니 뻔하다. 뻔해.
나는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선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고 긴 새벽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길고 긴 뒤처리를 할 시간이었다.
……이계형 던전. 제 시간에 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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