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대본 리딩하는 날 (10)
* * *
“수고하셨습니다.”
오지윤 감독의 말을 시작으로 다들 수고하셨습니다를 연발했다. 나도 인사를 따라 하면서 이수아랑 윤가영하고 문 쪽을 봤다. 이제 귀가하는 건가. 조금 멍했다.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적응이 약간 됐다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유야.”
정서아 목소리였다. 고개 돌려 정서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응?”
“인터뷰해야 돼, 메이킹 영상에 들어갈 거.”
“아. 응.”
“수아도.”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아랑 정시은이랑 같이 정서아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뒷배경이 깨끗한 조용한 곳에 의자가 하나 있고 카메라가 준비되어 있었다. 앉아서 카메라를 멍하니 봤다. 촬영감독 옆에서 선 정서아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캐릭터 소개만 간략하게 하면 돼. 영상에 진짜 짧게만 쓴다니까 너무 고민할 필요 없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대로 편히 답하면 돼.”
“아, 알겠어.”
정서아가 살폿 웃었다. 귀여운 걸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단 인사하구.”
“응...”
고개를 얕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겁쟁이둘에서 이윤우 역할을 맡은 이온유입니다.”
“이제 캐릭터 소개해주세요.”
“아, 이윤우는 드라마 제목 겁쟁이둘에서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소심한 캐릭터입니다. 윤우는 오랫동안 알아왔던 친구인 정하윤을 이성으로서 좋아하면서도, 고백을 했다가 차이게 되면 지금의 관계마저 잃게 되는 거 아닐까 두려워서 마음을 꾹꾹 숨겨두기만 하다가, 하윤이도 자기랑 비슷한 마음일지 확인해보고자 질투심을 자극하려 귀여운 짓들을 합니다.”
계속 말은 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잘 이해가 안 됐다. 머리가 하얀 게 아무 말이나 하는 느낌이었다.
정서아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건지 더 하라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더 해...?”
“아냐. 좋았어. 나와도 돼.”
“응...”
의자에서 나왔다. 이수아가 걸어와서 앉았다. 정서아가 인사해줘, 라고 하자 이수아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정하윤 역할의 이수아입니다.”
“캐릭터 소개해주세요.”
“하윤이는 윤우랑 마찬가지로 겁쟁이인데요. 윤우를 좋아하고 있지만, 고백을 했다가 어색한 사이가 될까 무서워서 마음을 털어놓는 걸 미뤄둬요. 그러던 중 온유가 제 친구인 서은이를 좋아하게 됐는데 사귈 수 있게 조언을 해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둘의 사이를 망치기 위해 최대한 비호감스러운 행동을 하게 유도해요.”
이수아가 정서아를 올려봤다.
“된 거예요?”
정서아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수아가 의자에서 나오고 내 오른편으로 달려왔다. 정시은이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이수아가 나를 올려보고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았어?”
목소리가 조용한 게 귀여웠다.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
“응.”
“... 근데 왜 웃어?”
“귀여워서.”
“... 미친...”
이수아가 내게서 고개 돌려 정시은을 바라봤다. 나도 따라서 정시은을 봤다.
정시은이 생글생글한 얼굴을 하고 카메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겁쟁이둘에서 이서은 역할을 맡게 된 정시은입니다.”
“캐릭터 소개해주세요.”
“서은이는 모범생인데다 눈치 좋은 영악한 캐릭터예요. 연애 같은 거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하윤이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 한 이윤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하윤이랑 윤우 사이에 끼게 되죠. 그런데 마냥 고통받지만은 않고, 윤우의 본심을 곧장 알아차린 다음 이미 둘 사이에 끼이고 만 거 즐기겠다는 마인드로 윤우의 진정한 코치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하윤이의 질투심을 자극할 수 있게 도와요.”
정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응.”
정시은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근데 둘은 어떻게 돌아가요?”
“매니저님이 데려다주실 거야.”
“으응. 어디 회사인데요?”
“AOU 엔터.”
“음. 알겠어요.”
정서아도 다가와서 정시은의 왼편에 섰다.
“이제 가는 거지?”
내가 물었다.
“응. 집 가는 거야?”
“그치.”
“으응. 일단 나가자.”
“그래.”
스태프분들을 보며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며 빠져나왔다. 정서아랑 정시은을 보며 잘 가라고 하고 폰을 오른 주머니에서 꺼냈다. 윤가영한테 전화할까 하다가 이수아가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김민준 실장한테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한 번 가고 전화가 연결 됐다.
ㅡ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디 있으세요?”
ㅡ지금, 차 때문에 지하 주차장에 있어요.
“아, 네. 그럼 저희가 내려갈게요.”
ㅡ알겠어요.
“네. 끊을게요.”
ㅡ그래요.
전화를 끊었다. 이수아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옆에 없는가 봐.”
“그럼 일단 대본 리딩한 데 가보자.”
“응.”
나란히 걸어갔다. 회의실 문 근처에 서 있던 윤가영이 바로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윤가영이 나를 봤다가 이수아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잘됐어 수아야...?”
수아가 자기를 우선으로 해달라고 한 거 때문에 나한테 물으려 했다가 수아보고 물은 건가.
“응. 그냥 인사만 하고 끝나는 거였던데.”
“으응...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실장님 와 계신대.”
“방금 통화했어요.”
내가 말했다.
“응...”
다 같이 나란히 걸어갔다. 이수아가 왼편에 있고 윤가영이 오른편에 있었다.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모녀의 사이에 서서 단순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배덕감이 치밀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설 것만 같았다. cctv가 있으면 선 게 담길 텐데. 제발 집에 갈 때까지만이라도 얌전했으면 했다.
엘리베이터에 타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김민준 실장이 보였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듯했다.
“다 집으로 가는 거죠?”
“네.”
이수아가 답했다. 김민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를 밴으로 데려갔다.
뒷문을 열어주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벨트를 맸다. 김민준이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실장님도요.”
윤가영이 말했다. 김민준이 멋쩍게 웃었다.
“전 뭐 한 거 없잖아요.”
“아침부터 저희 데려다 주셨으니까요... 이 드라마도 다 실장님이 해보라고 권유해준 거기도 하니까 또 그렇죠.”
김민준이 웃음 지었다.
“온유랑 수아 학생이 기회를 잡을 능력이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윤가영이 빙긋 웃었다.
“그쵸...”
윤가영이 오른손으로 이수아의 왼볼을 쓰다듬었다. 이수아가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둘 다 미치도록 귀여웠다. 사랑스러움이 유전된 듯했다. 아니면 교육되어서 사랑스러움이 이수아에게 전달됐거나.
고개 돌려 김민준을 봤다.
“저한테 말 놓아주셔도 돼요.”
“으응... 그래. 그럼 너도 나한테 말 편하게 해.”
“알겠어요 형.”
김민준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형 근데 저 음악하는 거 있잖아요.”
“어? 응.”
“제가 자작곡을 쓴 게 좀 있는데 그거로 앨범 제작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지. 당연히 가능하지. 얼마나 있어? 만든 곡?”
“세보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아니, 그냥 곡들 모아서 노트북 같은 데 담고 회사에 가져갈게요. 겁쟁이둘 촬영 다 마치는 즈음에요.”
“응... 일단은 겁쟁이둘 다 찍을 때까지는 연기에 집중하려고?”
“네. 그리고 음악 만들어 놓은 것들이 좀 더 손볼 데 있는 거 같기도 해서요. 더 쓰고 싶은 것들도 있고.”
“으응. 기다리고 있을게.”
“네.”
차가 집 앞에서 정차했다.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형.”
“어. 잘 들어가.”
“형도요.”
차에서 내렸다. 이수아가 뒷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저한테도 편히 말씀해주셔도 돼요.”
“아, 응. 알겠어.”
이수아가 살짝 미소 지으며 내렸다. 윤가영이 김민준을 보며 고개를 얕게 숙였다.
“감사해요.”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네...”
윤가영이 차에서 내렸다. 대신 뒷문을 닫아줬다. 윤가영이 나를 보면서 살폿 웃었다.
“고마워.”
“네.”
윤가영이 대문을 열고 먼저 안에 들어갔다. 이수아랑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윤가영이 빠르게 집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뒤따라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갔다. 뒤늦게 신발을 벗고 문을 잠근 이수아가 타타타 뛰어서 윤가영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윤가영이 흠칫했다가 두 손으로 이수아의 팔을 잡고 같이 걸었다. 모녀가 뒤뚱뒤뚱 걸어서 거실로 갔다.
“소파에 눕자 엄마.”
“그래.”
이수아가 두 팔로 윤가영의 배를 감싸 안은 채로 소파에 누웠다. 소파 등받이 쪽에 등이 가까운 이수아가 품속에 있는 윤가영을 꼭 끌어안았다. 이수아의 가슴이 윤가영의 등에 닿아 지그시 눌렸다. 윤가영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이수아도 가슴이 컸다.
“엄마도 피곤하지.”
“으응... 근데 딸, 안은 것 좀 풀어주면 안 돼...? 엄마 불편해...”
“으음, 싫어. 나 엄마 안고 있을래.”
윤가영이 소리 없이 끄응거렸다. 이수아한테 별말 못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데 윤가영은 어떤 다툼도 없이 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이수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이수아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왜, 오빠도 끼고 싶어?”
미치겠네.
“아니.”
이수아가 픽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요망했다. 윤가영 같았다. 왜 자꾸 이수아를 윤가영이랑 비교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되지. 내가 쓰레기인 건가. 심란했다. 입을 열었다.
“너 옷 안 갈아입어?”
“좀 쉬었다가 갈아입으려고.”
“어.”
“오빤 지금 갈아입게?”
“응.”
“어.”
뒤돌아서서 내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말이랑 교복을 벗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예 나신이 되고 물을 틀었다. 오른손으로 온도를 늘기를 기다리고 적당히 따뜻해졌을 때 샤워기 아래에 섰다. 따스한 물이 어깨를 때리고 몸을 타고 흘러 성기에 도달했다. 사소한 자극에 그대로 자지가 솟아올랐다. 부끄러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