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오디션 후 (4)
* * *
끝까지 다 보았다.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는 계약서였다. 사실 더할 나위 없다 싶은 지원에 6대4라는 정산비, 그리고 5년이라는 계약 연수까지 확인하고 바로 사인해버리고 싶었다.
윤가영이 고개를 들어 백채영을 쳐다봤다.
“제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는데... 신인한테 제시하는 거라기에는 조건이 너무 좋은 거 아닌가요...?”
백채영이 미소 지었다.
“온유 노래 최대한 듣고 싶어서 그래요. 수아가 연기한 작품도 많이 보고 싶고. 사실대로 말하면 둘 다 완성형인 거 같기도 해서 좋게 준 거예요.”
“그래도 이건 너무 좋은 거 같아서요... 사기인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백채영이 웃었다.
“사기 치는 건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근데 계약서에 하나 잘못 기입된 게 하나 있기는 해요.”
“네...? 뭐 말씀하시는 거예요?”
“계약서 나 줘 볼래 온유야?”
“네.”
백채영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백채영이 왼손으로 계약서를 받고는 오른손으로 볼펜을 잡아 들어 아주 짧게 기입했다.
“받아요.”
백채영에게 계약서를 돌려받고 확인해봤다. 정산비가 6대4에서 7대3로 바뀌어 있었다.
눈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김민준이 멀뚱멀뚱 나를 보다가 궁금증을 못 참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한 번 보세요.”
계약서를 들어서 보여줬다. 김민준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봤으면 앉아요.”
백채영이 말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김민준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수아가 눈을 찡그리고 내 계약서를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수아도 정산비를 본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백채영을 바라봤다.
“저 바로 사인해도 돼요?”
“해도 되는데, 기왕이면 7대3으로 기입된 거에다가 해요.”
백채영이 김민준을 바라봤다.
“들어오기 전에 새로 뽑으라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나왔을 거예요. 한번 나가서 오고 있는지 확인해봐요.”
“알겠습니다.”
김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표실 문을 열더니 그길로 빠르게 걸어서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김민준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마침 오고 있어서 받고 왔습니다.”
“잘했어요. 빨리 와서 줘요.”
“네.”
김민준이 이수아랑 내게 계약서를 줬다.
“혹시 바뀐 거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다 확인해봐요.”
백채영이 말했다. 윤가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바꾼 게 있나요...?”
“농담이에요. 그냥 사람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거죠. 바뀐 거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거는 직원이 실수하거나 했을 수도 있다는 거 염두한 거고.”
“네... 근데요...”
“네 말씀하세요.”
“저희 애들 엄청 굴리실 거는 아니죠...?”
백채영이 살포시 웃었다.
“안 그래요. 만약 그런 일 있었으면 논란 생겨서 자녀분들이랑 여기 오시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그쵸...”
백채영이 싱긋 웃고 나랑 이수아를 봤다.
“한번 다시 봐 봐요.”
““네.””
나랑 이수아가 동시에 답했다. 같이 눈살을 찌푸리고 계약서를 봤다. 정산비가 7대3이었다. 마지막 1년 6개월은 정산비가 8대2로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 외에 바뀐 거는 아무리 봐도 없었다. 펜을 들고 사인했다.
“오빠 완전히 다 읽고 사인하는 거 맞아?”
“응.”
이수아가 나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자기 이름을 썼다.
“넌 다 읽었어?”
“오빠가 다 읽었다니까.”
피식 웃었다. 은근 나 되게 믿나 보네. 괜히 기분 좋았다.
윤가영이 대리인 동의서에 서명했다. 백채영이 나랑 이수아의 계약서를 건네받아 훑어봤다.
이수아가 백채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 어머니도 연기할지도 몰라요.”
백채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얘기야 그게?”
백채영이 계약서들을 내려놓고 윤가영을 바라봤다.
“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
“아 저...”
윤가영이 곤란한 듯 웃었다.
“수아가 농담처럼 얘기한 거예요... 연기할 줄 몰라요... 할지 말지도 모르고...”
“할 생각은 있는 거예요?”
“아뇨 별로 마음은 없어요...”
“오지윤 감독님이 엑스트라로 나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이수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윤가영을 연기시킬 마음이 가득한 듯했다. 무슨 변덕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윤가영이 연기를 하면 되게 귀여운 그림이 많이 나올 것 같았다.
“아 오지윤 감독님이 그러신 거구나.”
“네, 네.”
윤가영이 다급하게 답했다.
“오지윤 감독님이 일반인 캐스팅 되게 많이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외견만 보고 던져보신 거일 거예요...!”
“네. 알아요. 그래서 하실 마음은 아예 없으신 거예요?”
“...”
윤가영이 고개 숙이고 양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만졌다.
“... 진짜 만약에 연기 한다고 해도 딱 그 역할만 할 거 같아요... 그리고 계약 같은 거는 안 하고 그냥 혼자 관리하고 할 생각이에요...”
“그럼 되게 어려우실 텐데. 근데 연기 이전에 따로 하고 계시는 일은 없어요?”
“그냥 주부예요...”
“아아, 네. 그럼 연기에만 전념하실 수 있겠네요?”
“아뇨 저 진짜 연기 진지하게 할 생각 없어요...”
“왜요?”
“네...?”
윤가영이 고개를 들어 백채영을 쳐다봤다.
“왜냐뇨...?”
“아니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요. 배우 하면 좋을 거 같은 조건인데 왜 하기 싫어하시나 해서.”
“그냥 여태 해본 적도 없고, 나이도 많고 하니까...”
“가영 씨보다 훨씬 나이 들고도 연기 도전하시는 분 많아요. 그리고, 해본 적 없다고 안 한다는 거는 너무 소심하지 않아요? 나중에 진짜 나이 들고 나서는 내가 그때 왜 안 했지, 하고 되게 후회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 네...”
“한번 도전해봐요. 해보고 별로다 싶으면 그 뒤로 안 하면 되는 거니까.”
“... 생각해볼게요...”
“그래요. 그럼 엑스트라 역 한번 해보시고, 다음에 계약 얘기해보기로 해요.”
“배우 안 할 거예요...”
“진짜 안 할지 말지는 나중의 가영 씨한테 물어볼게요.”
“... 네...”
백채영이 싱긋 웃었다.
“좋아요. 근데 다들 식사는 했어요?”
“네 다 점심 먹고 나왔어요...”
“저는 오늘 아침 점심 다 안 먹어서 배 좀 채워야겠다 싶었거든요. 만약 안 드셨음 같이 먹자고 했을 건데.”
“아... 아쉽네요.”
“담에 기회 되면 먹기로 해요.”
“네...”
“그럼 저희 일어날까요?”
“그래요...”
백채영이 먼저 일어났다. 윤가영이랑 김민준이 이어서 일어나고, 뒤이어 나랑 이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같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백채영이 한 발치 뒤에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왔다.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타고 가나 했는데 들어오지는 않았다.
“잘 가요.”
엘리베이터 밖에서 백채영이 말했다. 김민준이 백채영에게 고개 숙였다. 나도 따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윤가영이랑 이수아도 고개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계세요 언니.”
백채영이 빙긋 웃었다.
“응. 잘 가.”
“네.”
이수아가 마주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백채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됐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중간에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김민준이 살갑게 인사해서 따라 인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본 사람만 해도 꽤 많아서 아무래도 AOU 엔터 내부 인원을 모두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릴 듯했다.
지하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이수아가 윤가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생각해보니까 우리 배우 가족 됐네?”
윤가영이 한숨 쉬었다. 이수아가 히 웃었다.
“왜 한숨 쉬어?”
“아니, 하아... 왜 그랬어 진짜아...!”
“그냥 드라마 찍는 거로 엄마랑 추억 쌓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윤가영이 뭐라 대꾸는 못 하고 흐응,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이수아가 싱긋 웃었다.
“할 말 없지?”
“응... 왜 이렇게 엄마 할 말 없게 말을 잘해...?”
“엄마 딸이니까.”
윤가영이 히죽 웃으며 이수아의 왼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이수아가 싱글싱글 미소 지었다.
밴의 문을 열어줬다. 윤가영이랑 이수아가 안에 들어가고 나서 문을 닫아준 다음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김민준이 운전석에 오르고 벨트를 맸다.
“근데 진짜 계약서 조건 말도 안 되게 좋은 거예요. 뭐라 비유하기도 힘들 정도로.”
김민준이 차를 몰고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간판배우 부족한 소속사에서 탑스타 되겠다 싶은, 거의 확실하다 싶을 정도로 떠오르는 신예 배우 모셔오는 데 내거는 조건이에요.”
“왜 그렇게 좋게 해주셨을까요...?”
윤가영이 물었다.
“AOU 엔터면 유명한 배우 되게 많잖아요...?”
“네.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유를. 아마 대표님이 수아 학생이랑 온유 학생이 낼 작품들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어요.”
“... 회사 운영을 그렇게 해도 돼요...?”
김민준이 멋쩍게 웃었다.
“보통 같으면 안 되겠죠. 근데 직원들 사이에 대표님이 취미로 운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서요.”
“... 월급은 잘 받으시는 거죠?”
“네. 불만이라는 게 사그라들 정도로 주세요.”
“그러면 대표님이 막 억만장자이신 거예요...?”
“아마도요. 근데 정확한 재산 규모는 몰라요. 그냥 원래도 부잣집 자제인데, 경제학 석사 과정까지 수료하면서 암호화폐 초기에 투자해 가지고 엄청나게 부풀렸다 정도만 알고 있어요.”
“그냥 태생이 엘리트시네요 대표님은... 근데 왜 매스컴에서는 대표님 얘기가 별로 없을까요...?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그니까 사람들이되게 선망할 만한 분인데...”
“그건 대표님이노출되는 게 싫으셔서 인터뷰 같은 거 다 고사하셔 가지고 그럴 거예요.근데 다들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네...”
윤가영이 답했다.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난 지수랑 선우 봐야 되는데.
“저는 집 말고 다른 곳 갈 데 있어요.”
윤가영이랑 이수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김민준이 나를 흘깃 보고 입을 열었다.
“어디요?”
“강남역이요. 친구들 만나고 놀다가 밥 먹기로 해 가지고요.”
“그럼 온유 학생 먼저 내려주고 집으로 가는 거로 할까요?”
“네...”
윤가영이 나직이 답했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지 못한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진 모양이었다. 봐도 봐도 귀여운 여자였다.
2번 출구 쪽에서 밴이 정차했다. 이수아랑 윤가영을 보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저 갈게요.”
“응... 잘 가...”
“잘 가 오빠.”
“응.”
김민준을 보며 고개 숙였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온유 학생도 잘 가요.”
“네.”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밴 안에서 윤가영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애틋했다. 마주 오른손을 흔들면서 잘 가요, 라고 읊조렸다. 밴이 출발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이제 택시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갈아타면서 지수 별장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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