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36 (최종화)
"......"
박우리의 부축을 받은 정소연이 가까스로 일어났다. 꽤나 쎄게 얻어맞은것 같은데... 그것도 손등으로 말이지. 그런데도 정소연의 표정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뭔가 울먹인다거나 아니면 화를 낸다거나 해야 정상 아닌가?
뺨을 어루만지던 정소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할 말이 없으면 손부터 나가는게 언니 성격이죠? 지금까지 성질 누르느라 힘들었겠어요?"
"아니. 할 말이 없어야 손이 나가는게 아니라 원래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 더 맞아볼래?"
현아의 손이 다시금 들어올려졌다. 하지만 정소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우뚝 서 있다. 박우리가 그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만해. 벌건 대낮에 뭐하는 거야? 사람들도 다 보고 있잖아."
박우리의 말에 나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보고 있는 사람도 한두명 있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 이쪽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 아니, 애초에 사람 자체가 별로 없다.
박우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니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분명 소연이의 말대로 박을을 이용해서 니가 원하는 걸 이루려 했다고 해도...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게 있으니까. 그만큼 넌 절박한 상황이었을 테고, 그런 식으로라도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을 꺼야. 다 이해해."
"......"
...이해하기는 개뿔, 지 입장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거다.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절대 그런 생각 못할껄?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넘어갔으니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누가 이걸 그냥 넘어가? 가짜로 사귄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 행복을 위해서 이용당한 건데? 당한 입장이 아니니 현아의 불우한 환경만 눈에 들어오는 거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납득해버리는 거지. 내 생각은 쥐뿔도 안하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사태에서 유일하게 내 입장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정소연밖에 없다. 윤성현이 자신의 취향대로 현아를 굴렸듯이, 현아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를 굴렸다고 생각해주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자 저렇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정소연에게 호감이 생길리는 없지. 저 계집은 굳이 이번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 편을 들어주는 애니까. 이것도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변호했다기 보다는 그냥 무작정 내 편을 들은 거라고밖에 생각이 안된다. 난 어떠한 잘못도 없고 현아가 전부 다 잘못했다는 개념이 정소연의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잖아? 아마 내가 잘못한 상황이라도 정소연은 내 편을 들껄?
가만히 박우리를 올려다보던 현아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예전부터도 그랬지. 자기도 힘든데 날 도와주겠다고 하고..."
"......"
"넌... 아직도 내가 좋아? 이렇게 사람이나 때리고 함부로 굴리는 내가?"
......
무슨 말을 하는거지? 왜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잖아?
짝짝.
별안간 들려온 손벽을 마주치는 소리에 자연히 고개가 돌아갔다. 윤성현이다.
"이거... 날 빼놓고 너무 지들끼리만 이야기하는거 아닌가?"
"......"
박우리의 눈매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현아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다른... 매우 험악한 얼굴이다.
"잊은게 아니라면 똑똑히 새겨두라고. 지금 현아랑 사귀고 있는건 바로 나야. 너희같은 굴러들어온 돌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어슬렁 걸어오는 윤성현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같다. 그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나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윤성현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앞을 가로막아야 한다거나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목소리마저도 목이 메인 듯 입도 뻥긋 할 수가 없다. 왠지 입을 여는 순간... 그 무식한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올 것 같다는 두려움마저 든다.
윤성현 역시 나를 염두해 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은 내쪽이 아닌 박우리를 향해 있었고, 어느덧 그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 바짝 다가서 있었다.
...저렇게 서있으니 알 것 같다. 키는 윤성현이 조금 더 크다. 하지만 전체적인 몸의 밸런스는 박우리쪽이 우세하다.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때가 아닌데. 뭐가 뭔지 모를 이 상황을 덮어버리고 현아와 이곳을 빠져나가는게 급선무다.
침을 한번 삼키고 그 둘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윤성현의 압박에서 겨우 벗어나 가까스로 팔을 들어올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정소연이었다.
"...그냥 가만 있어요. 오빠가 나설 장면이 아니에요."
소근거리는 정소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잠깐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들어보기나 할까? 솔직히 잡아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서로를 마주한 채 대치하던 둘은 윤성현이 입을 여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아가 뭐라고 떠들었던 간에... 저 애를 가지고 있는 건 나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현아를 가져가려면... 역시 날 제치는게 먼저잖아? 안그래?"
......
역시 윤성현은 순순히 현아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하긴 뭔가 이상하다 했다. 그렇게 현아를 굴리면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는데, 현아의 말 한마디로 포기할 리가 없다. 이렇게 쉬웠다면 나를 이용하고 어쩌고 이전에 진작에 현아의 손에서 끝났을 꺼다.
하지만 저 말은 뭐지? 현아를 가져가고 싶으면 자신을 제치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널 제치면 현아는 네 손에서 해방되는 거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게 맞냐?"
"아마 맞을꺼라고 생각한다. 어때, 쉽지?"
박우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쉽네. 단순해서 좋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성현이 허리를 숙였다. 아니, 이건... 허리를 숙인게 아니라 박우리한테 정강이를 까인 거다. 그 반동으로 허리가 숙여졌...
퍼억!
윤성현이 뒤로 날라갔다. 한 몇 미터는 날라간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는 못봤지만... 지금 박우리는 허리를 숙인 윤성현의 얼굴을 무릎으로 쳐올렸고, 그렇게 들어올려진 얼굴을 풀스윙으로 날려버린 것 같다. 저거... 정말 되는 건가? 저런 움직임이 어떻게 나오지?
...윤성현이 일어났다. 저걸 맞고 일어난다고? 저새끼도 괴물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윤성현이 박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박우리도 그런 윤성현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윤성현이 충격을 받았을 때 달려가서 날라차기같은거 해야 하는거 아니야? 왜 저렇게 여유를 부려? 얼른 한대라도 더 날려서 얼굴을 박살을 내야 하잖아?
아까와 마찬가지로 둘은 서로를 코앞에 둔 채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박우리가 허리를 숙였다. 윤성현의 주먹이 박우리의 배에 직격한 것이다.
윤성현은 박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이 갚아 주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박우리의 얼굴을 무릎으로 쳐올렸고, 그렇게 들어올려진 박우리의 얼굴을 뒤돌려차기로 날려버렸다. 박우리의 몸이 찌그러진 깡통처럼 구겨져 저 멀리 날라간다.
......
이건...
이런 싸움이 가능한 건가? 마치 액션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니, 대전게임이라고 해야 하나? 한대 맞을 때마다 뒤로 뻥뻥 날라가서 쳐박히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 맞고 멀쩡히 일어나는 녀석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젠장, 아무래도 좋다. 뭐 몇 미터를 구르던 에네르기파를 쏘던 상관없다.
박우리... 이 등신같은 자식아. 저런 새끼 하나 요리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구르는 거냐. 다른건 몰라도 싸움 하나라면 자신있는 놈이잖아? 그럼 저 윤성현도 그 자신있는 주먹으로 시원하게 쳐날려야 하잖아? 어째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 거냐고.
......
얼른... 얼른 끝내라.
저 재수없는 면상을 다시는 웃지 못하게 만들란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내 현아를 되찾아 오란 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양아치들을 커버쳐준 것도 너였고, 나와 현아를 잘되게 해주려고 등신같이 구른 것도 너였잖아? 그럼 이번에도 그래야지. 얼른... 저 개자식을 피똥싸게 만들고 내 현아를 되찾아 내라. 친구의 여자가 빼앗길 위기에 쳐해있는데 그렇게 쳐맞고 있을 시간이 어딨냐, 안그래?
콰앙!
윤성현의 주먹에 뒤로 밀려나던 박우리가 철창에 부딪쳤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박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보인다. 윤성현은 아직도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박우리의 얼굴은 상당히 어둡다. 그 몸조차도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지금도 서있는게 아니라 철창에 몸을 기대어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윤성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녀석도 여유로워 보이긴 하지만, 이런 싸움을 길게 끌어봐야 전혀 이득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박우리를 향해 전력으로 뜀박질을 하는 거지. 아마 그대로 날아올라서 박우리를 끝장내려는 것 같다.
삐비빅!! 삑!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경찰인 건가? 하긴 이렇게 판타지를 찍고 있는데 안전요원이든 경찰이든 오지 않는게 이상하다. 그 소리에 한창 내달리던 윤성현도 움찔하며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경찰이 아니다. 안전요원도 아니다.
...호루라기를 불은 것은 현아였다.
현아를 쳐다보던 윤성현이 낭패한 얼굴로 다시금 박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박우리의 카운터가 들어갔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낸 윤성현이 볼품없는 모습으로 땅에 나뒹군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이번에는 그 윤성현도 일어서지 못했다.
......
좋아. 해냈다.
박우리가 윤성현을 밟아버렸다. 이제 이걸로 위협은 사라진 건가? 현아를 차지하려면 먼저 자신을 치워보라고 했던 윤성현의 말 그대로, 박우리는 깨끗하게 윤성현을 밀어냈다. 더이상 현아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는 거다.
"......"
박우리도 상당히 지쳐 보인다. 저 싸움꾼을 저렇게 고전하게 만들다니... 윤성현도 꽤나 할 줄 아는 녀석이었군. 아마 저 철창이 아니었다면 박우리는 카운터를 날리지 못했을 것이다. 헐렁한 철창을 로프 반동처럼 이용해 힘을 실었으니까. 거기에 달려오던 윤성현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쓰러진 윤성현을 쳐다보던 박우리가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현아에게 그 시선을 고정시켰다. 흠... 감사 인사라도 할 생각인가? 이걸로 현아는 완벽하게 윤성현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됐으니까. 뭐 이정도는 봐주자. 아니, 현아 성격이라면 왠지 말로 끝낼 것 같지가 않다. 혹시 나한테 '마지막으로 박우리랑 밤을 보내고 싶다' 라던가 그런 부탁을 할지도 모르지. ...정말로 그런 부탁을 해오면 어떡하지? 알았다고 해야 하나?
다가온 현아는 말없이 박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아를 바라보던 박우리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더이상 너를 힘들게 하는 건 없어. 이제부턴 니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거야. 남들 눈을 의식해서 도망갈 필요도 없어. 떳떳하게 박을이랑 지내도 돼."
"정말 그래도 돼? 내가 하고싶은 대로... 남들 눈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래. 이젠 누구도 널 구속하지 않으니까. ...이제와서 내가 널 도왔다는 생각은 하지마. 난 이미 예전에 널 돕기로 한 약속을 깼어. 이건... 널 위한게 아니라 저녀석을 위한 거다. 십년지기 친구란 놈이 여자때문에 흔들렸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정도가 다야. 이제부턴 너희들이 알아서 해."
......
역시...
박우리는 내 친구다.
내가 지금까지 저런 유감스러운 녀석을 친구라고 달고 있던 이유가 뭐겠어? 저런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잠깐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삐걱거리긴 했지만, 역시 녀석은 도와 의를 아는 녀석이었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박우리는 나를 위해 현아를 윤성현에게서 구해냈다. 그리고는 이후의 일은 우리들의 몫이라며 제법 간지나는 대사까지 날려주셨다. 캬, 박우리. 잠시나마 널 엑스트라 취급했던 걸 용서해라. 주인공은 나지만 너도 주연급 조연정도의 위치는 된다.
박우리를 바라보던 현아가 수줍은 미소를 피어올렸다.
"...정말이야? 그럼 나, 이제 다시는 너랑 이어지지 않을텐데? 두 번 다시 너한테 기회는 없을텐데?"
"기회는 이미 예전에 날렸잖냐."
"풉. 열 번 집어넣는 거? 그러게 왜 계속 쑤셔댔어. 혹시 알아? 딱 열 번만 넣었다 뺐으면 내가 맘에 들어했을지. 푸훕."
뭐가 그리 웃긴지 쿡쿡거리던 현아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그 기회라는거, 아직 늦지 않았으면... 한 번 더 줄까...?"
"어...?"
벙찐 표정의 박우리를 뒤로 하고 현아가 나를 돌아본다. 그 얼굴은 장난기로 가득하다.
"헤헤. 을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게 맞냐?"
"응? 역시 알아챘어?"
"......"
"그치만... 이걸로 끝이야. 더는 이런 일 없어. 약속할께."
......
우려가 현실이 됐다. 현아는 정말로 박우리와의 마지막을 침대에서 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걸까? 윤성현은 사라졌어도 녀석이 남긴 그 변태플레이는 이렇게 현아의 몸에 베여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알았어. 마지막이니까 실컷 해라."
"무슨 실컷이야. 딱 열 번만 넣으라고 할꺼야."
...결국 허락했다. 괜한 불씨를 남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 현아는 완전히 내 여자고 박우리도 나를 위해 그 몸을 날렸을 정도로 의리가 있는 녀석이니까. 말 그대로 그 둘의 마지막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 뿐이다. 솔직히 나도 정소연과의 마지막을 침대에서 보냈으니까, 이정도쯤은... 봐줘도 되는 걸까. 에라, 잘 모르겠다. 이미 허락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
그렇게 현아는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박우리와 함께 사라졌다.
후우... 뭔가 커다란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것 같다. 어찌됐든 잘된 것 같은데...
꾹꾹.
뭔가가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옆을 보니 정소연이 있다. 얘 아직도 있었네.
"오빠. 괜찮아요?"
"뭐가?"
"저렇게 현아언니랑 우리오빠 내비둬도 괜찮냐구요. 지금 저 둘 떡치러 가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아마 현아는 박우리의 배 밑에 깔려서 열심히 따먹힐꺼다. 저렇게 두들겨 맞은 박우리가 얼마나 힘을 낼지는 모르겠다만.
"니가 언제부터 나랑 현아를 걱정했냐? 오히려 저 둘이 저렇게 가버리는게 넌 좋은거 아니냐?"
정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근데 틀려요. 난 오빠랑 언니를 걱정하는게 아니라 오빠만 걱정하는 거에요. 오빠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는 거에요."
"이제 저 정도로는 별로 상처받을 것도 안된다. 나도 현아한테 전염되서 이런 걸로는 그다지 신경 안 써."
...물론 거짓말이다. 존나게 신경쓰인다.
그치만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는 거다. 박우리의 공로도 크고, 현아도 마지막이라고 했으니까. 만약 나중에 또 이런 부탁을 해온다면... 그때는 정색하고 화를 내야겠지.
정소연은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응... 그래요? 그럼 나도 상관없어요. 오빠만 괜찮다면."
"......"
뭔가 위화감이 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소연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게 됐지? 이 계집을 피해다니느라 집도 안들어갈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나도 그렇지만 이녀석도 나랑 대화하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눈치다. 정말로 일전의 그건 신경 안쓰는 건가?
"그럼 오빠... 저 언니랑 오빠도 마지막이랍시고 떡치러 갔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하지 않아요? 저 둘만 재미보게 놔두면 억울하잖아요?"
...듣고보니 그러네. 뭔가 억울하긴 하지. 막말로 내가 지금 정소연을 밤새 딴다고 해도 현아는 아무 말 못하잖아? 자기도 딴남자랑 떡치러 갔으니까.
흠...
이 스토커같은 년이랑 또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이 쫄깃한 몸은 별미중의 별미지. 어차피 나도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정소연 만날 일도 없을텐데, 이쪽도 마지막을 장식해 볼까? 저번에는 그렇게 이상하게 끝났지만... 오늘은 제대로 끝을 맺어야지. 왠만하면 좋은 분위기로 가서 나에 대한 정소연의 마음을 단념시키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나한테서 OK사인을 받아낸 정소연이 신난 얼굴로 생글거린다. 아까 현아한테 얻어맞은 얼굴은 괜찮은 건가? 뭐 견딜만 하니까 이러고 있겠지만.
"그나저나 저건 저렇게 둬도 돼요?"
정소연이 뭔가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윤성현이 있다. 뇌진탕이라도 걸렸나?
이때다 싶어서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 발이 보이는 건지, 윤성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아까와는 반대의 상황이 됐다. 이게 바로 너와 나의 눈높이다, 짜샤.
"...불쌍한 새끼. 그러게 왜 그렇게 깝치냐? 싸움도 쳐발리고 여자도 뺏기고... 아주 병신나셨구만."
"......풋."
윤성현이 코웃음을 흘린다. 이게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네?
한 번 걷어차 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찰나, 윤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축하한다. 넌 정말 운이 좋아."
"...운? 아니지. 다 내 능력이야 임마. 니새끼나 박우리처럼 주먹만 믿고 까부는 놈들 위에는 나같은 인텔리가 있는 법이라고. 고등학교 때에는 내가 아직 어려서 너한테 빅엿을 먹었다만, 이제는 니가 나한테 빅엿을 먹었네. 뭐 이런게 세상 돌아가는거 아니겠냐?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윤성현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미친새끼. 지랄도 정도껏 해야 개성이라는 말 모르냐? 넌 그냥 운이 좋은 거야 임마. 그것도 억수로 재수좋은 놈이지. 박우리라고 했나? 저런 등신이 니 옆에 있었다는 걸 하늘에 감사해라."
윤성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영원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것 같던 놈이 일어나자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에이, 그래도 저렇게 만신창이가 됐는데 여기서 날 건드리겠어?
...역시 내 예상대로 윤성현은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일어선 채로 잠시 머리를 휘적거리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윤성현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이제 정말로 다 끝난 것 같다.
윤성현도 저렇게 사라졌고... 더이상 신경써야 할 것은 없다. 왠지 허탈하기도 한 기분에 멍하니 서있으려니, 내 옆으로 다가온 정소연이 다시 한 번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긴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보고 따라하는 거야?
"오빠, 가요. 나... 오빠랑 하고 싶어서 죽을것 같아요."
"......"
역시 정소연은 그대로구나.
그래. 가자 가. 오늘 아주그냥 원없이 따먹어주마. 어디 한 번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빌때까지 뚫려봐라.
* * *
"...흑... 흐윽..."
정소연이 울고 있다. 좋아서 우는건지 힘들어서 우는건지 구분이 안간다.
지금 나는 기록을 세웠다. 연달아 네 번을 쑤셔대고 조금 쉬었다가 세 번을 더 했다. 그러니까 정소연은 내 자지를 일곱번이나 받아먹은 거다. 근데도 용케 그만하라는 소리가 안나왔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저렇게 쪼그만 몸으로 어떻게 내 자지를 전부 다 받아낼 수 있는거지? 하긴... 정소연은 나랑 하다가 기절한 적도 있었지. 아예 기절해버릴 지언정 그만 하라는 소리는 안한다 이건가? 별 쓸때없는 고집도 다 보겠네.
"...후우."
담배를 피고 있는 내 손도 바들바들 떨려온다. 나도 아마 한계까지 갔던 모양이다. 뭣때문에 이렇게 전력으로 쳐댔을까? 현아가 박우리랑 떡치러 갔다는 것에 대한 배덕감의 표출인가? 아니면 그냥 정소연이랑 오랜만에 해서 기분이 업된 건가?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을 꺼내 보기도 귀찮다.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디이이잉─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려온다. 참 타이밍도 기가막히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봐야 하는군.
현아에게서 온 문자다.
문자와 같이 영상이 하나 딸려왔다.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재생시켰다.
[...우리야, 괜찮아?]
[어. 견딜만 해. 하는데 지장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뭐지 이건. 영상 안에 현아랑 박우리가 있다.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은 모양인데... 그렇다는 건 지금 저기는 모텔이란 소린가?
아니 그보다... 왜 이런 영상을 찍어서 보낸 거지?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헤헤. 그럼... 이제 해볼래? 딱 열 번만이야...?]
[...그래. 열 번만 해보자.]
영상속의 박우리가 현아의 다리를 벌려내고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그 허리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며 삽입을 시도한다.
[...아, 아응... 역시 니꺼... 좋아...]
[이제... 움직인다?]
......
박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얼마나 젖어버렸길래 이 소리까지 녹음이 되지?
[...아, 아... 앗! 하윽...]
...나도 모르게 둘의 움직임을 세어보고 있었다. 정말로 열 번만 할까?
박우리의 허리가 아홉번째로 움직이며 현아를 쑤셨을 때, 박우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몇 번째 했지?]
[응... 다섯 번?]
[그럼 좀 더 해도 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박우리가 다시금 움직였다.
다섯 번이라고 했는데 한 여덟 번은 움직인 것 같다.
[이제... 몇 번?]
[학... 하악... 네 번정도 남았어...]
그렇게 구라를 치면서 삽입하는 횟수를 늘려가던 둘의 대화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영상에는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와 철퍽거리는 소리, 그리고 현아의 신음소리만이 녹음되고 있다.
"......"
어느덧 내 옆에는 정소연이 있었다. 말없이 영상을 바라보는 정소연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아! 하읏... 아윽!]
무릎을 굽히고 엎드린 현아의 엉덩이에 박우리의 큼지막한 손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박우리의 자지는 현아의 엉덩이 사이로 쑥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
몇 번이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두번인가 세번째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길게 보이는 걸까. 현아의 보지에서 박우리의 자지가 뽑혀 나오고, 그 벌어진 속살에서 허연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오고, 흘러나오는 정액이 다시금 밀고 들어오는 자지의 압력으로 바깥으로 쏟아지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다.
...아. 맞다.
이건 현아가 즐겨했던 변태플레이였지.
남친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플레이. 현아는 그걸 나한테 보여주고 있는 건가? 마지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
드디어 영상이 끝났다.
침대에 누운 현아와 박우리의 얼굴이 영상화면에 가득히 잡힌다. 슬쩍 웃고있는 박우리와 현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종료됐다.
영상을 다 보고 나서야 같이 온 문자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랑 우리... 제법 잘 어울리지?]
"......"
...뭐지 이건?
이 문자는 무슨 뜻이지?
"...결국 이렇게 됐네요."
정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뭐라고 했지?
"아무래도 오빠랑 현아언니는 끝난 것 같아요. 오늘 일때문에 이렇게 된건지, 아니면 예전부터 이런 조짐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네요."
......
나랑 현아가 끝났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그 시작을 위해서 오늘 너희들을 만난 거였잖아?
"오빠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참 재밌어요. 마지막이랍시고 떡치러 가겠다고 허락을 구하는 여자가 어딨고, 그걸 또 허락하는 남자가 어딨어요? 도저히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여있는 연인이 할만한 대사가 아니에요. 뭐 그것만 봐도 난 이렇게 될 꺼 예상했어요."
"...혀... 현아... 현아야..."
지금 이렇게 있을때가 아니다.
전화를... 전화를 걸어서... 지금 당장 현아를 데리러 가야 한다. 그래, 이거 어쩌면... 박우리한테 협박받아서 찍은 걸지도 모르잖아? 이건 본심이 아닐꺼다. 당연하지. 내 현아가 이럴리가 없잖아?
"...어디가요? 설마 현아언니한테 가려는건 아니죠?"
"......"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
옷을 어디에 벗어뒀더라? 빨리 입고 나가야 한다. 얼른 현아한테...
......
............
시야가 파랗게 물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질...
"...이번에도 그렇게 갈 생각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못참아요. 지난 번에도 참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
"더이상 오빠는 아무데도 못가요. 아니... 솔직히 갈 곳도 없잖아요? 이미 현아언니는 우리오빠의 여자가 됐는데... 가서 확인사살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에요?"
.........
"지금 우는 거에요? 슬퍼하지 말아요. 오빠 옆에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오빠도... 내 인형답게 얌전히 옆에 있는 거에요. 죽을 때까지."
...
"걱정 말아요. 우리도 제법 잘 어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