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41)

색기발랄 35 

날씨가 제법 괜찮다. 해는 구름에 가려져 그 휘황찬란한 광채를 잃었고, 빛을 차단한 먹구름들은 마치 자신이 하늘의 군세라는 듯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 비까지 내렸으면 딱 좋았겠지만... 이정도로 만족하자. 지금만으로도 하늘은 내 편에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는 지금 어린이 대공원으로 차를 몰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옆좌석에는 현아가 앉아 있다. 간간히 창 밖을 내다보며 나에게 말을 거는 현아의 모습에서는 그 어떠한 불안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와 마찬가지로 현아 역시 오늘의 만남에 별다른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날씨 좋다."

창 밖을 내다보던 현아가 은근슬적 말을 꺼낸다. 하늘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현아도 이런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했던가? 

출발하기 전, 현아에게 옷을 한 벌 선물했다. 지금까지 입고 다니던 노출 심하고 치마 짧은 옷에서 탈피해 산뜻한 아가씨로 변신했다. 마치 봄처녀같다는 느낌? 겨울이 성큼 다가온 마당에 무슨 얼어죽을 봄처녀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의미는 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각인된 현아의 노는 이미지를 벗어냈다는 개념적인 옷이지. 이런 산뜻하고 발랄한 옷을 입은 현아는 아마 윤성현이나 박우리같은 녀석들은 한 번도 못봤을껄?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현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녀석들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미 외모부터 자신들이 알던 현아에서 벗어나 나만을 위한 현아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뭐,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니 굳이 걸려들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이것 역시 의도한 것이다.

이 자리를 마련한 나로써는 녀석들에게 굽신거려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고압적인 태도로 할 말만 딱 해버리고 가면 그만인 갑의 위치다. 이런 내가 뭐하러 일찍부터 나가서 녀석들을 기다려야 할까? 나를 기다리며 똥줄을 타다가 뒤늦게 나타난 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녀석들이 해야 할 일이다.

현아는 내 생각을 모른다. 그저 내가 하는대로 말없이 따라줄 뿐. 이래저래해서 이렇게 한다 따위의 설명을 시시콜콜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현아는 전적으로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고, 난 그 기대에 부합하는 행동을 보이면 되는 거다.

......

보자.

약속시간에서 정확히 15분정도 지났군. 이정도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지 않는 적절한 시간이다. 10분정도까지는 어느정도 감안할 여지가 있고, 20분이 넘어가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이 15분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내가 여자들을 만나오면서 터득한 아슬아슬한 경계다.

현아의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인파는 많지 않다. 시간이 어중간해서 그런가? 아무래도 평일이기도 하니까 이정도는 감안해야 겠지. 뭐 어린이 대공원이 예전만큼 인기가 좋지 않은 것도 한 몫 하겠지만.

저 멀리 익숙한 두 사람이 보인다. 하나는 박우리. 다른 하나는... 정소연이다.

내가 녀석들을 눈치챈 것처럼, 저쪽의 정소연도 나와 현아를 알아본 눈치다. 대뜸 손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요!"

......

굉장한 위화감이 내 몸을 전율케 한다. 그런 식으로 헤어져 연락도 씹어먹던 나를 저런 해맑은 표정으로 반기다니? 수상하다. 너무나도 수상하다. 분명 뭔가 있는게 틀림없다.

옆의 박우리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어제 말한대로 정소연을 챙겨서 데리고 나온 걸까? 저 무표정한 얼굴의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박우리는 아무리 나라도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봤자 박우리는 박우리. 내가 불러낸 셋 중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이 박힌 정상인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내가 대처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있다.

어느덧 나는 그 둘의 코앞에 다다랐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 것 같다. 둘의 표정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박우리는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꽤나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다. 아마 녀석은 알고 있겠지. 오늘의 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잘난 싸움실력으로 나를 개패듯이 내려쳐도 현아는 박우리에게 가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겠지. 더이상 박우리에게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정소연은 이상하리만치 활짝 웃고 있다. 지금의 정소연을 객관적으로 말해본다면... 그냥 귀엽다. 근심걱정따윈 일절 내비치지 않은 순수한 귀여움이 여기에 있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가지 않은, 남들 눈에 비치는 정소연의 모습일 뿐이다. 내 눈에 보이는 정소연은 전혀 귀엽지 않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그래. 오랜만이네."

인사를 건네는 정소연에게 무심히 대답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정소연은 이윽고 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응... 언니? 언니야말로 오랜만이군요?"

"응. 언제 봤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걸."

"실망이네요. 난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나저나... 그 옷은 뭐에요? 답지않게 귀여우시네요."

"나름 잘 어울리지? 여러가지 의미가 담긴 옷이야."

"여러가지 의미라... 뭐 새출발을 기념한다는 퍼포먼스는 아니겠죠? 그런 것 치고는 참 싸구려 옷이네요."

"을이가 사준 옷에 가격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 넌 이런 싸구려 옷이라도 받아본 적 있는지 모르겠네."

......

역시나 정소연의 표정은 페이크였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현아에게 독설을 퍼부었고, 현아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맞받아쳤다. 역시 성현아. 정소연의 공격에도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화사한 미소로 맞대응하는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반할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의 대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정소연은 완전히 타겟을 현아로 돌렸다는 거다. 더이상 나를 달달볶거나 몰아세우지 않는다. 모든 잘못은 현아에게 있다는 그 말대로, 오로지 현아에게만 손톱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소연이라도 현아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지. 지금도 정소연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 참이다. 딴에는 애써 상대할 필요 없다는 표정인 것 같지만... 아마 녀석도 알고 있을 껄? 말빨로 현아를 이기는 건 어렵다는 것을. 훗, 말빨이 뭐야.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싸움으로 끝난 거지, 예전의 현아였으면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을 꺼다.

그렇게 두 여자의 기선제압은 현아의 승리로 끝났다. 나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던 박우리는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다. 녀석이 가만히 있으니 나라도 나서서 중재를 할 수 밖에 없다. 내키진 않지만.

"자자, 간만에 만났는데 보자마자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둘 다 진정하고. 흠... 근데..."

말을 꺼내다 보니 그제서야 눈치챘다. 한 명이 안보인다?

"...윤성현은 아직 안온 건가?"

윤성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난 그녀석의 얼굴도 모른다고? 물론 고등학교때 보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지금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다. 그런 녀석의 얼굴따위 못알아보는게 당연하잖아? 아마 박우리나 정소연도 윤성현의 얼굴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싶은데. 약속 장소만 고지했을 뿐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성현이는 저기 있어."

그 하나가 바로 이거다. 유일하게 윤성현을 알고 있는 현아가 알아채는 것이지. 현아는 보란듯이 윤성현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말해 주었다.

"흠... 저게 윤성현이야?"

머지않은 곳에 한 남자가 등을 기대고 서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저 남자가 윤성현인 모양이다. 역시 내 기억에 저런 남자는 없다. 그때 잠깐 봤던 윤성현의 얼굴은 깨끗하게 잊혀진 거다. 

그 시선이 이쪽을 향해있는 것으로 보아 녀석은 자신이 만나야 할 약속상대가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쪽에 현아가 섞여있으니 당연히 그리 생각하겠지만.

윤성현이 움직였다. 몸의 반동으로 벽에서 등을 뗀 윤성현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단지 걸어오는 것일 뿐인데도 나는 상당한 압박감을 받아야 했다. 뭔가 빈틈없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딱히 떠오르는 표현이 없지만, 굳이 느낌을 말해 보자면... 왠지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윽고 윤성현은 우리 앞에 섰다. 

녀석의 인상은... 상당한 호감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 훤칠한 키는 박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클 것 같고, 생김새도 시원시원하게 생겨서 남자한테나 여자한테나 인기가 많을 것 같은 타입이다. 과연... 현아의 옆에 서있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자다. 이정도 외모라면 현아의 아름다움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둘이 나란히 서있는다면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연인으로 비춰질 정도로 잘난 커플이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없을때의 이야기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건 조금 부끄럽지만, 나역시 외모로 따지자면 어디가서도 꿀리지 않는다. 윤성현도 나름 괜찮다만, 역시 현아는 내 옆에 있을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 법이다.

윤성현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하며 나를 내려다 본다. 새끼, 키 좀 크다고 이딴 식으로 사람을 쳐다보네. 박우리도 큰 키에 속하지만 저런 식으로 사람을 내려다보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성이 드러나는 건가?

"오랜만입니다."

녀석이 손을 내밀어 온다. 그 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확히 나를 향해 있다. 현아를 제외하면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 역시 윤성현도 고등학교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분명 평범한 경험은 아니니까 기억에 남아있긴 하겠지. 나역시도 그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할 정도로 뇌리에 박혀 있으니까. 더군다나 '오랜만이다' 라는 인사를 건넸으니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기서 고민하는 흔적따위를 내비칠 수야 없지.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최대한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하며 그 손을 맞잡는다.

"......"

짧은 인사가 끝나고 맞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빌어먹을. 손이 얼얼하다.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 있는대로 힘을 준 모양이다. 그 투박한 손과 크기, 악력으로 미루어 보아 녀석도 한 주먹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느껴지는 이미지는 나와 동류의 인간으로 보이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체격 등의 스펙은 오히려 박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흠... 나와 박우리를 합쳐놓으면 아마 저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윤성현은 박우리와 정소연과도 인사를 나눴다. 나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박우리에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정소연에게 인사를 할 때엔 우리 둘과는 또 다르게 슬쩍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정소연 역시 예의 귀여운 표정으로 그에 답한다. 

참 잘들 논다. 아마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 씌여진 가식적인 가면을 눈치채고 있을 텐데, 뭐하러 이런 겉치레를 하는 거지? 난 그저 빨리 내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단 말이다.

마지막으로 윤성현은 현아의 앞에 섰다. 정소연을 대할 때의 미소가 그대로 그 얼굴에 남아 있다.

"어지간히도 재미가 좋았던 모양이네. 설마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성현아가 맞는 거야?"

녀석의 물음에 현아는 빙긋이 웃었다.

"응. 어제 문자 보냈잖아? 난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그러니까 너도 그대로 따라줘."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럼 어쩔 수 없어.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내 최소한의 배려였으니까. 이런 호의를 무시하고 멋대로 굴 생각이라면... 더이상 이야기 할 필요도 없겠지?"

"......"

윤성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에 서려있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윤성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넌 정말...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제멋대로인 여자구나. 뭐, 나도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거지만... 좋아. 일단은 받아들이자고."

그 말을 끝으로 윤성현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뭐지? 지금의 대화로 우리의 사이를 인정해버린 건가? 나와 현아가 이대로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을 수긍한 건가?

윤성현과의 대화를 끝낸 현아가 이번엔 박우리를 돌아보았다. 박우리는 아까전부터 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야."

"응. 말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사실 말하지 않아도 넌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

박우리는 대답 대신 한층 우울한 얼굴로 현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박우리도 알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까부터 얼굴이 저랬던 거지. 현아에 대한 녀석의 마음이야 충분히 동정이 간다만... 세상에는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라는게 있다. 박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너무 높은 곳을 올려다 봤다는 거다. 그거 외엔... 딱히 녀석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있잖아, 이제와서 이런 말 하면 기분이 어떨까 모르겠지만... 난 그래도 너랑 만날때마다 즐거웠어. 내가 유일하게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상대였고... 넌 기꺼이 내 모든 걸 들어줬으니까. 그리고 그 마음을 속이고 나를 도와주겠다고까지 했잖아?"

"...하지만 끝까지 속일 수는 없었어. 결국 너를 도와주는 입장에서 너를 차지하려는 입장으로 돌아갔으니까. 이미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응. 을이가 그랬어. 너한테 모든걸 들었다고. 하지만 니가 밉다는 생각은 안들어. 오히려 너한테 그런 힘든 부탁을 했던 내가 잘못이잖아? 그래서 난 마음이 놓여. 니가 계속해서 나와 을이를 도와주는 역할로 남았더라면 이런 자리에 너를 부르진 못했을 꺼야. 니가 그렇게 스스로 빠져나가 줬으니까 나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어."

......

현아는 여전히 박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박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잘되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함으로써 박우리의 마음을 확실하게 거절한 거다. 그 시점에서 박우리는 현아와 잘 될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렇게 기억의 뒷편으로 사라질 바에야 현아의 조력자로 남아서 그 인연을 이어가는 것을 택했다. 

아마 박우리가 그 조력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면... 모두가 모인 이 자리에서 박우리는 제외됐을 것이다. 지금까지 도와준 박우리를 위해 현아가 따로 불러냈겠지. 그리고 그 마지막을 추억하기 위해 둘은 긴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하지만 박우리는 스스로 그 위치에서 벗어나 다시금 현아를 노리는 남자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기회를 모두 걸어 나에게 최후의 수를 던졌다. 결국은 실패했고, 박우리는 더이상 현아와 이어질 건덕지가 전혀 없는 엑스트라가 됐다.

"...지금까지 마음 써준거 고마워. 아마 평생 잊지 못할꺼야. 날 생각해 줬던 그 마음 하며... 너랑 보냈던 그 밤들까지 모두. 헤헤, 가끔은 그리울지도 몰라. 너랑 하는거... 정말 기분 좋았거든."

"......"

박우리와의 이야기도 끝났다. 

현아는 마지막으로 정소연을 돌아보았다.

"너랑은... 참 악연이구나. 솔직히 나도 별로 착한 애는 아니지만, 너도 착한 애는 못되는구나 싶어. 뭐... 포기를 모르는 여자라거나 그런 거야? 니가 점찍은 남자는 누가 뭐래도 니꺼라는 신념이라도 있는 거야?"

"......"

정소연의 얼굴이 현아를 향해 들어올려 졌다. 

그 얼굴에는... 나로써는 알아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실려 있다.

"언니한테 들을 말은 아니네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꼴인가요? 내가 잘못한 거라면... 난 그저 한 남자만을 사랑했다는 것 뿐이에요."

"그 한 남자가 내꺼라는 사실은 왜 묻어버리는 건데?"

"그게 어째서 언니껀가요? 주변의 남자들이 언니의 변태같은 플레이에 놀아난다고 해서 나까지도 그럴꺼라고 생각해요? 정신 차려요. 언니가 이 남자들한테 마음대로 굴려지는 물건이 아니듯이, 을이오빠도 언니가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지금 언니의 행동은 그렇게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저사람과 똑같다는 걸 어째서 알지 못하는 거죠?"

"......"

"당연히 부정하겠죠. 하지만 생각해 봐요. 저 윤성현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언니를 굴렸듯이, 언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을이오빠를 굴린 꼴이에요. 뭐? 일단 사귀고 나서 점점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면 벗어날 수 있다? 하... 살다살다 이런 개그는 처음 듣는데요?"

......

어느새 현아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말하는 건 정소연 뿐이다.

정소연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쉴새없이 그 입을 놀렸다.

"그런 악취미에 비하면 내가 한 짓거리는 명함도 못내미는 수준이죠. 난 그저 다시 한 번 을이오빠랑 잘 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뭐... 결국은 이렇게 됐지만요. 이번에도 언니라는 걸림돌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고, 난 또다시 을이오빠를 놓치게 될 위기에 처했어요.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모든걸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나요?"

...이쯤 되면 내가 나서야 할 때인가?

그러고보니 왜 현아가 이 셋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내가 나서서 이 셋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쫑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어째서 현아가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아무튼 지금의 현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정소연의 말대로 현아 자신도 그리 떳떳한 입장은 아닐 테니까. 윤성현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던 계획은 사실이고, 어찌됐건 나를 이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그냥 넘어갔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것을 문제삼아도 뭐라 반박할 수 없다. 

역시... 박우리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그 자리에 정소연을 방치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게 된 정소연은 이렇게 커다란 위협으로 자라나 버렸다.

더이상 현아 혼자 상대하게 둘 수는 없어 끼어들려는 찰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아가 서서히 턱을 들어올렸다. 한 쪽 입꼬리가 말려올라간 채 비실비실 웃고 있다. 저 얼굴...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짝!

현아의 손등에 뺨을 얻어맞은 정소연이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미처 손 쓸 새도 없는 빠른 손놀림이었다.

쓰러진 정소연을 내려다보던 현아가 손목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말 잘하네? 근데 말이야. 마음 속에 담은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한다고?"

......

기억났다.

저 히죽 웃는 얼굴과 싸늘한 눈초리... 고등학교때 윤성현과 짜고 나를 엿먹일 때의 그 성현아의 얼굴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때의 성현아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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