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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2) (30/87)



〈 30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2)

1.

현우는 창백하게 질린 혜지를 한동안  쓰다듬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에도 약간의 핏기가 돌아온다. 가까스로 입가를 끌어올리며 희미한 미소까지 지어보인다.

그러나 그건 증세의 호전이라기보다는 일시적 잠복에 불과할 터. 이깟 말  마디로 조각난 정신이 회복될 수 있다면 정신병원은 모두 문을 닫고 말테니까.

출근까지 이제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일단은 임시방편으로나마 그녀를 진정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나 똑바로 바라봐, 자기야. 자기 눈에는 아직 내가 화난걸로 보여?”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장난스런 미소를 입가에 그려내며 순진하게 눈을 깜빡인다.

“아냐, 그냥 내가, 내가 그만큼 미안해서, 그래서...”

혜지는 입버릇처럼 사과의 말만 계속 입에 담았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 그것말고는 다른 말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미안하대. 나 화  풀렸다니까.”

현우는  반응이 지겨워져 은근슬쩍 핀잔을 주고만다. 그랬더니 이젠 벙어리가  것처럼 입만 뻐끔거린다.

 한 마디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조금만 더 괴롭혀볼까?’

원래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충동이 삽시간에 솟구쳤다. 현우의  눈에 가학적인 탐욕이 일렁거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자기는 혹시 내가 뒤끝 있는 사람으로 보여? 날 그렇게 속좁은 남자라 생각하는거야?”


자못 섭섭하다는 얼굴로 가볍게 늘어놓는 푸념. 단조로운 어조로 그저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툴툴거렸다.


날을 세우지 않은 뭉툭한 말이었지만, 현우는 이 무딘 말이 그녀를 또한번 짓뭉갤 것이란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예상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냐아냐, 절대로 아니야. 오빠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나 그런 생각 조금도 안했어.”

경기를 일으킬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손사래를 쳐온다. 얼마나 간절히 도리질을 치는지 젖가슴이 출렁일 정도다.

방금까지의 불안감을 뒷전으로  채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기에만 급급하다. 그 모습이 현우의 마음에 한층  불을 지폈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계속 그러니까 나까지 불안해지잖아. 말로는 안 서운하다면서 속으로 서운해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고...”


말을 이어가며 점점 목소리를 줄인다. 겉만 본다면 영락없이 여자친구의 눈치를 살피는 순한 남자의 모습이지만...


현우는 잠시간 끝말을 흐리다 남은 말을 마저 이었다.


“아침부터 자기 기분 좋게 해주려고 이렇게 일찍 일어나기까지 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속상하네.”

 말을 꺼내는 현우의 얼굴은 잔뜩 주눅 들어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마디로 순식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불안함을 위로받기보다 되레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해야하는 역설적인 상황.

혜지는 언제나 그러했듯 현우가 부여한 배역에 강제로 캐스팅 되고 만다.

“오빠,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불안해해서 미... 어... 음...”


그녀는 다급히 현우의 손을 붙잡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오빠가 핀잔을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애가 탔다.


“난, 진짜 하나도 안 서운하고 오히려 오빠가 나 깨워준게 고맙기만 한걸. 진짜야. 완전 감동했어.”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접고 떠올려낸 말은 고맙다는 말.  말을 허겁지고 쏟아내고 현우의 눈치를 살핀다.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기분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우는  모습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고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꼭 답을 해달라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했던거야,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한 것처럼.”

이번엔 이 여자의 입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흘러나올까. 현우는 기대감으로 몸이 떨렸다.

이 질문에서까지 애꿎은 스스로를 탓할지, 아니면 뒤늦게나마 눈앞의 가해자에게로 화살의 방향을 돌려올지 그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갑작스런 현우의 말에 움찔한 그녀는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 애처롭게 눈동자를 굴려댄다.


“어... 그건 그냥, 아, 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돼서, 그래서 정신이 없었나봐 쫌.”

혜지는 우물쭈물 말을 더듬다가 마침내 훌륭한 핑계거리를 떠올렸다. 방금까지의 불안을 잠꼬대 정도로 치부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합리화는 이미 그녀의 통제를 훌쩍 벗어나 있었다.


스스로의 불안을 용인 받기 위해 어떻게든 되는대로 주워섬길 뿐이었다.

현우는 풉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맘껏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게 뭐야. 그럼 그냥 잠꼬대 같은거였어?”


혜지도 그제서야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오빠가 큰소리로 웃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만 했다.

‘이쯤에서 그만 다시 달래줄까.’


방금까지의 상황이 퍽 만족스러웠다.

어제의 체벌이 과했나 싶어 알람까지 설정해둔 마당이었다. 자는 동안 지난 밤의 격정이 씻겨나간다면 그녀의 정신이 또렷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내비친 PTSD 증세가 예상치도 못한 성과를 안겨주었다.

원래의 목표는 그녀의 하루 첫 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리하여 어제의 부정적 감정을 뒤덮어버리는 것.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는데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라는 자백 또한 다시금 받아냈다.

심지어 자고 일어난 멀쩡한 정신에서, 방금까지의 불안이 잠꼬대라는 우스꽝스러운 소리까지 덧붙여서.


현우는 마지막으로 작은 장난 하나만 더 치고 지금의 놀이를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나 보면서 활짝 웃어줘. 내가 안심할 수 있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면서.”


혜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새하얀 이가 드러날만큼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볼살로 간신히 함박웃음을 만들어낸다.


“오빠, 오늘... 아침 이벤트 고마웠어. 내가 많이 사랑해. 내가 오빠꺼라는거 알지?”

지독한 한 편의 비극. 화를 내어야하는 상황에서 미안해하고, 울어야하는 상황에서 웃는다.


그건 차라리 코미디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현우는 지금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역으로 사과를 종용한다. 그리고는 웃음까지 강요한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사랑해.”


현우는 가벼운 웃음을 적선하듯 던져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정도면 제법 깔끔한 마무리였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슬슬 씻으러 들어갈래?”

“아, 응응. 그럼 나 먼저 씻고 나올게.”


혜지는 현우의 말에 부랴부랴 몸을 일으키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 물을 틀어놓은 채로 거울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왜 그렇게 불안해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 앞에 선 기분같기도...


‘에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오빠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그녀는 방금의 바보같은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휘휘 저었다.

오빠는 자신을 사랑한다. 방금까지의 달콤했던 아침인사가 그 증거다.

혜지는 자신을 깨우던 다정한 손길과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작고 사소한 트러블은 있었지만 어찌 됐든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현우는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금까지 자신의 혀끝으로  여자의 영혼을 가볍게 농락했다. 병을 주었다가 약을 주었다가 하면서.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작은 전능감을 음미하며 진하게 미소지었다.


누워 있는 다리 사이로, 그의 물건이 천장에 닿을 듯 발기해있었다.

2.

현우는 혜지를 따라 같이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그녀가 일하는 가게.

겉으로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배웅해주고 싶다고 주절거렸으나, 사실 이건 겸사겸사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사랑을 쏟아붓는 일이라면 지금껏  정도로도 충분했다.

현우는 그녀를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가  일이 있었다.

“내가 같이 가주니까 그렇게 좋아? 우리 자기 아주 신났네?”

빙그레 미소지으며 웃는 현우의 얼굴이 늦봄의 햇살 아래서 빛났다. 간단히 머리에 물만 적셨는데도 그의 모습에선 조금의 추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작게 돋아난 수염까지 묘하게 남성적인 매력을 자아냈다.

그리고 보기 좋은 껍데기는 언제나 추악한 내면을 감춰주는 좋은 위장색이었다. 혜지는 현우의 속내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얼굴을 붉혔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콩닥거린다. 바짝 몸을 붙여 그의 단단한 팔뚝을 끌어안았다.


“응,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 맨날 나 나갈 때 오빠는 늦잠만 잤는데, 우리가 진짜 사귀는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그랬었나?”


“기억 안나? 보면서 얼마나 얄미웠는데! 일부러 흔들어서 깨우고 싶은거 꾹 참았단 말이야.”


혜지는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늘상 걷던 출근길이지만 처음 걷는 길처럼 모든게 낯설고 설렜다. 그것이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현우때문이라는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현우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장난스레 말했다.


“자기야 그럼, 혹시 지금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해?”

“응?”

“아니, 그런 말도 있다잖아.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아름다워보인다고.”

현우가 작게 키득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 길거리를 둘러보는 혜지.


혜지는 굳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더라도 현우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180도 달라진 기분을 방금까지 똑똑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맞아. 더 아름다워보이네.  진짜 사랑에 빠졌나보다.”

혜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이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이 난 아이마냥 경쾌히 발을 놀린다.

현우는 그런 그녀가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웃어주었다.

사실 지금처럼 일찍 집을 나서는 일 자체가 어제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이긴 했다.

원래 혜지를 보내놓고 늘어지게 아침잠을 즐기다 슬슬 배가 고파질 때쯤 몸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혜지가 보인 불안 증세가 그의 계획을 바꾸어놓았다.

운좋게 손에 넣은 히든피스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집에 돌아가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씻고 나온 그녀에게 자신이 데려다주겠노라고 흔쾌히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계획을 수정하였지만, 모든 것은 다시 그의 계획대로였다.

“다 왔네. 길 건너서 저기 맞지?”

혜지는 현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도착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횡단보도는 같이 안 건너줘도 되니까 바로 버스타러 가. 오빠집으로 갈거지?”

현우는 그 말을 듣고 피식웃었다. 입으로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손과 몸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매장 앞까지 데려다줄게.”


그러고선 현우도  손을 절대 놓지 않겠노라고 고백하듯 깍지 낀 손에 힘을 더했다.


혜지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곧 도착한 가게 앞. 혜지가 발을 느적느적 잡아끄는 바람에 횡단보호를 건너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그녀는 좀처럼 아쉬움을 달랠 수 없는 모양인지 현우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오빠... 나 그냥 오늘 알바쨀까? 오빠랑 계속 있고 싶은데... 아프다고 해버려?”


그녀의 눈을 보니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닌듯했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릴 기세다.

“일 끝나고 또 보면 되지. 오늘 일해서 돈  걸로 이따 저녁에 나 맛있는거 사줘.”

현우는 그런 그녀가 조금 성가셨지만 애써 마음을 숨기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유치원생을 억지로 등원시키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의 집착이 본인의 일상을 내팽개칠 만큼 커졌다는 사실은 반가웠지만 오늘은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살포시 가녀린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기야, 오늘도 힘내고!"


쪽 -

말을 하는 도중에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이따 밤에도 데리러올까?"

혜지는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귀찮게 뭘. 굳이 안 그래도 돼. 데려다준걸로도 충~분히 감동이야."

"알겠어. 일 끝나기 전에 카톡해~ 일단 나도 집가서 쫌 쉬고 있을게. "

혜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가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걸음 못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현우는 여전히 밝은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도 이에 화답하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윽고 혜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현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등을 돌렸다.

가면을 벗어 던진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해주기로 맘먹은 일이라지만 귀찮음은 어찌할  없었다.


그럴수록 현우의 결심은 굳건해졌다. 최대한 빨리 그녀를 망가뜨려야겠다고.

다행히 그 실마리도 눈에 보였다. 아마도 PTSD라 짐작되는 증상.  증상을 일으킨 원인과 방법이 좋은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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