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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3) (31/87)



〈 31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3)

현우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과 물을 사들고 하루 동안 비워놓은 집으로 향했다.

원래는 어머니의 소유였으나 작년부로 그의 소유가 된 건물.


아니, 건물이란 말을 갖다 붙이기엔 조금 어색한 2층짜리 벽돌주택.

지어진  30년이 넘어가는 낡아빠진 건물이었으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마친 탓에 혼자서 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휴, 건물주 총각 아녀.”

집에 다다르니 익숙한 목소리가 현우를 불러세웠다. 건물 1층에 얼마 전부터 세를 내어준 과일가게 아주머니였다.

나이가 예순에 가까운지라 아주머니와 할머니 사이에서 호칭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현우는 그녀를 아주머니라 불렀다.

그녀도 종종 현우를 마주칠 때마다 건물주 총각이라 부르며 아는 체를 하곤 했다.

썩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척을 하기도 애매한 데면데면한 사이.

현우는 이른 나이부터 가는 귀가 먹은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안녕하세요! 장사는 잘 되시죠 요즘?”


“응? 그럼, 잘 되구말구. 주택가 복판이라서 목이 괜찮혀. 나가 월세는 제때제때 잘 낼테니께 총각은 걱정일랑 싸매도 댜.”

그녀는 현우가 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무엇이라 주절거린다. 대강 들어보니 월세를 밀리지 않겠다는 의미 같아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다.

1층 한 켠의 작은 공간을 내어주고 매달 받아내는 월세가 100만원 남짓.


예전에는 그의 어머니가 미용실을 운영하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현우가 백수의 삶을 영위하도록 해주는 과일가게가 되었다.

그는 인사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가게 옆의 건물 입구로 향했다.

건물 내부에 위치한 계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입구를 가로막은 두꺼운 유리문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6자리의 비밀번호를 두드리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철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린다.


그러자 바깥을 오가는 차소리도, 과일가게에서 흘러나오던 TV소리도  너머에서 사그라지고 복도에는 적막만이 내려앉는다.

작게 내쉬는 숨소리가 이 공간의 가장 큰 소리라 여겨질 만큼 완벽한 차음.


현우는 이 건물을 물려받고 보수공사를 진행하며 방음과 차음에 유독 신경을 쏟았다. 사람들이 나다니는 길거리에 위치한 건물이었기에 특히  했다.


그는 바깥의 번잡스러움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하는 것도, 자신의 만들어내는 소리가 바깥의 행인들에게 퍼져나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현관문 도어락을 열고 손잡이를 잡아당기니 휑한 풍경이 그를 반긴다.


집 내부에도 방음공사를 끝냈기에 집안을 가득 메운 고요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거실에서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은 쇼파와  옆에 위치한 작은 탁자가 끝.


그의 어머니가 사용했을 법한 TV나 선반조차 보이지 않는다.

현우가 집을 물려받자마자 한 첫번째 일이 집안의 모든 물건을 내다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 성향은 공간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아니, 그 여자가 살던 집이기에 유독 더했다.


이전 주인의 흔적이라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먼지 한 톨마저도 용납할  없었다.


자신을 학대하던 여자의 손떼가 묻어있는 집이라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왔으니까.

그렇기에 물려받은 유산을 가장 먼저  집을 리모델링하는 데에 사용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것을 부수고, 뜯어내고, 새로 맞췄다.


현우의 손길 아래 재탄생한 현우만을 위한 보금자리. 그의 통제적 성향이 공간의 형태로 구체화된 실체.

현우는 쇼파에 몸을 뉘이며 탁자 위 수첩으로 손을 뻗었다.

짙은 남색의 가죽커버를 두른 얇은 수첩에는 날짜와 함께 한 줄의 짤막한 글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3월 28일. 피그말리온 효과. 칭찬과 기대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데에 놀랍도록 효과적인 것 같다.  칭찬하고, 더 기대하면 어떻게 될까.]


[3월 30일. 체계적 둔감화의 원리. 혐오 반응을 제거하려면 섬세한 위계조절이 필요하다. 작은 일부터 점점  일로 올려가기. 절대로 서두르지 말자.]

그건 혜지를 만난 이후 쓰기 시작한 일종의 조교일지.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지만 두 달간 수십 명의 여자를 만난 탓에 현실감각이 많이 흐려진 상태였었다.

간만에 흥미를 동하게 하는 여자가 나타났으니 혹시 모를 착각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하루씩의 짤막한 감상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적기 시작한 조교일지에는 어느새 한 달치의 기록이 쌓였고 일지의 대상이 되는 여자는 걸레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중이었다.


현우는 앞의 내용을 잠시 뒤적이다 제일 마지막 장의 여백을 펼치고 펜을 집어들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펜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졌다.

[4월 28일. PTSD의 증상과 원리, 그리고  치료법.  그런 상태를 보였을까. 어떤 마법이 일어난걸까.]

간단히  줄의 말을 수첩에 남기고는 사들고온 간식을 베어 물며 고민에 빠졌다.

오늘 아침에 목격한 혜지의 이상 증세는 분명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있었다.

고작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현우는 그 비정상적인 반응이 몹시 탐났다. 처음 그 반응을 목격했을 때는 어젯밤 자는 동안 산타가 다녀간 기분이었다.


한 번이 가능하다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다. 그러니, 어떤 원리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오직 그 생각이 현우로 하여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어제의 체벌과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지만  원리가 잡힐  잡히지 않았다.

아니, 어느 정도 추측은 되었지만 섣불리 맹신할 수 없었다. 단순히 폭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으니까.


특히 어젯밤 혜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어대던 기이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현우는 조금 더 고민을 이어가다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떨쳐냈다. 추측만으로 접근하기에는 자신의 배움과 경험이 아직은 부족했다.


간식을 마저 입안에 털어넣은 그는 탁자 위 노트북을 펴들고 검색을 시작한다.


적막한 거실에는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려퍼졌다.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눈과 손만 움직인다. 눈동자가 쉴  없이 움직이며 모니터에 떠오른 정보를 훑는다.

열어놓은 검색창은 여러 개였으나, 그것들은 한 가지 공통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다.


PTSD 원인, PTSD 증상, PTSD 단계, PTSD 치료법... 누가 보면 심리 치료사 혹은 정신 상담사라 착각할 법한 검색어.

특히나 PTSD의 치료법은  번이나 탐독한다.

어떻게 증세를 호전시키는지를 알면, 어떻게 악화시키는지도 쉽게 알 수 있는 법이니까.

우우웅- 우우웅-

그러기를 한참. 주머니에서 들려오는 휴대폰 진동음이 현우의 집중을 깨뜨렸다.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폰을 꺼내드니 혜지가 보내온 메시지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정혜지 : 집에는 잘 들어갔느냥!!! 왜 카톡을 안 남겨 빙구야ㅠㅠㅠ 바로 잠들었니 잠팅이???]
[정혜지 : 난 점심시간이당ㅎㅎㅎㅎ 오빠두 밥은 먹고 자야지ㅜㅜㅜ... 괜히 깨울까바 전화도 못하겠넹]
[정혜지 : 그리구  생리터졌어.... 왠지 오늘 터질거 같긴했는뎅 힝ㅜㅜ]

현우는 미리보기 팝업 알림으로 무심히 메시지들을 읽어가다가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얼마  생리가 끝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복용중인 경구피임약을 고려하더라도 지금이라면 얼추 주기가 맞았다. 오히려 다소 늦은 감도 있었다.

이제 약을 복용한 지 거의 2주째. 예정대로 된다면 이번 생리 이후에는 마음껏 질내사정을 즐길 수 있다.


현우는 그 생각에 설핏 웃음을 짓다가 썩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웃음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안그래도 그녀의 후장을 눈독들이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생리를 잘만 이용한다면 뒷구멍으로도 자지를 받아낼 줄 아는 육변기를 얻을  같았다.

물론 그 방법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했다.


  혀에서 뽑아내는 촘촘한 거미줄 같은 말. 그녀의 몸과 마음을 샅샅이 옭아맬.


혜지는 이번에도 자신의 혀끝이 짜내는 그물에 걸려 무력하게 후장을 내어줄 것이다.


현우는 상상만으로도 물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휴대폰 알림을 무음으로 바꿨다. 일단은 방금의 공부부터 정리해야 했다.

찾아낸 바에 따르면, 어제의 마법은 역시 야만적이고 저급한 폭력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칫 어제의 경험만을 믿고 성급히 손을 휘둘렀다간 사달이  뻔 했다.

어젯밤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킨건 바로 양가감정(兩價感情).


어떤 대상, 사람, 생각 따위에 대하여 동시에 대조적인 감정을 지니거나, 감정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따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뜻하는.

이 양가감정이 그녀의 정신을 마음대로 재조립할 수 있는 숨겨진 열쇠였다.

남자친구에 대해 극과 극의 대조적인 감정, 예컨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감정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품게 만든다.

가장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었다가 가장 차가운 사람처럼 굴고,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주었다가 가장 폭력적인 사람으로 돌변한다.

마치 어제의 자신처럼 말이다.

이러한 양가감정이 혜지의 사고능력을 마비시키고 그녀를 세뇌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자신은 그 결실의 일부를 오늘 아침에 이미 맛봤다.


현우는 방금까지의 내용을 차분히 수첩에 옮겨적으며 그 원리를 숙지했다.


생각 이상으로 명확하면서도 간단한 원리였다.

[1. 고갈된 정신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고된 육체노동 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없는 몸과 마찬가지이다.]

[2. 양가감정의 충돌은 혜지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어 놓으며 그녀의 정신을 빠르게 고갈시킨다.]

[3. 고갈된 정신은 어떠한 세뇌든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펜을 떼고 돌이켜보니 자신이 어제 무의식적으로 입에 올린 말과 별 생각없이 했던 행동 모두가 양가감정을 촉발시키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날카롭게 벼려낸 말로 마음을 난도질하다가 부드러운 어투로 다독였다.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다가 소중한 연인을 대하듯 부드럽게 애무했다. 크게 실망한 것처럼 굴다가 명령을 따르면 기뻐했다.

특히 고백으로 긍정적 감정을 잔뜩 부풀려놓은 뒤 젖가슴을 후려친게 제대로 뇌관을 건드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정신의 완전한 고갈, 그 상태에서 우겨넣은 체벌의 합리화.

아침의 혜지가 왜 그렇게나 벌벌 떨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강력한 세뇌에 빠져든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현우는 그후로도 조사한 내용을 꼼꼼이 정리해나갔다. 이전의 모호한 추측대신 점차 이론에 기반한 근거 있는 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흐르는지도 몰랐다.

무음으로 해뒀던 휴대폰을 꺼내보니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있었다.

[정혜지 : 우리 자기 일났닝??????]
[정혜지 : 자기야 왜 전화두 안받아ㅠㅠㅠㅠ 자고 있는거지? 걱정대자나ㅠㅠ]
[정혜지 : 야!!!!! 전화받으란말이양!!!]
[정혜지 : 우이씨ㅠㅠㅠㅠ 이따 일어나면 바로 카톡해!!!! 혼날 준비 딱 하구!!!!!!!]


그 뒤로도 꼬리를 무는 느낌표와 눈물표시를 보니 꽤나 애간장이 탔나보다.


현우는 나른한 몸을 쇼파에서 일으키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김현우 : 미안해ㅜㅜ 무음으로 해놓고 깜빡했네... 전화 온줄도 몰랐다ㅜㅜ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 많이 화났어?]

대충 답장을 적어보내고 물이나 한잔 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컵을 집어 드는데 바로 알림음이 울렸다. 아마 하루종일 폰을 부여잡고 연락만 기다린 모양이었다.

[정혜지 : 흐ㅓ엉어ㅓ허어어 바보야ㅠㅠㅠㅠㅠ 걱정했자나ㅠㅠㅠ 자기 죽은줄 알아쪄ㅜㅜ 다행이야!!!!! 푹잤어????? 개운해?]


기특하게도 걱정과 안부를 물어보는 것 말고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간단히 말을 이어가다 씻고나와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현우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며 방금까지의 공부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녀에게는 폭력이 효과적이다. 단, 그와 견줄 수 있는 긍정적 감정을 쌓아올렸다는 조건이 붙는 경우에만.

그렇다면 조금 수고스럽긴 해도, 다정한 남자친구 연기는 당분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이왕이면  철저할수록 좋았다.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을 하나둘 갈무리한다.

현우는 욕실을 나서면서 당장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도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오늘 저녁, 퇴근하는 그녀를 데리러 간다.

양가감정의 한 축이  긍정적 감정부터 최대한 쌓아올린다.


원래 땅으로 곤두박질 치기 위해서는 화려한 비상부터 필요한 법이었다.


고민을 끝낸 현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 어찌 해야할 지를 알았으니 더이상 망설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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