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1)
삐비비빅 - 삐비비빅 -
단조로운 휴대폰 알람음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뜨렸다.
현우는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젯밤 혜지를 몇 번이나 절정에 들게 한 탓에 약간의 피로가 느껴졌다.
삐비비빅 - 삐비비빅 -
"하아..."
현우는 계속 귓가를 울리는 알람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시간은 오전 8시 30분. 오늘 아침에 할 일이 있어 일부러 설정해둔 알람이었다.
알람을 종료하고 옆에 누운 혜지를 돌아보는 현우.
그녀는 알람소리에 미동도 보이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불 밖으로 새하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작은 숨소리를 색색 몰아쉰다.
가녀린 어깨와 목덜미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젖가슴을 바라보니 어제의 짜릿했던 손맛이 떠올랐다.
원래 계획에도 없었던 가슴 스팽킹이었으나 치솟는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저질러버렸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자신이 유린했던 가슴을 움켜쥐니 기분 좋은 말캉함이 손 안에 가득 했다.
그녀는 잠결에도 간지러움을 느끼는 모양인지 흐응하고 잠꼬대를 흘려댔지만 잠에서 깨어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작은 몸을 흔들어대며 입을 열었다.
"자기야, 일어나. 오늘 오전 알바라며~"
혜지는 현우의 재촉에 오히려 몸을 더 웅크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허리를 둥글게 말고 움츠린 모습이 새끼고양이 같다.
현우는 피식 웃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유두를 찾아 돌돌 굴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쾌락이 조금씩 혜지의 의식을 두드린다.
"일어나세요~ 조금 있으면 9시야. 이러다 알바 지각해."
혜지는 그제서야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천천히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뻑뻑한 눈을 깜빡인다.
그녀의 흐릿한 초점 사이로 미소 짓고 있는 현우가 보였다.
"우리 사귀고나서 처음 맞는 아침인데 늦잠만 자려고? 여보야~"
꿀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여주는 여보라는 말.
그건 혜지의 잠기운을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오빠랑 사귀기로 했었지.
혜지는 몽롱함을 마저 걷어내고 어젯밤의 일을 하나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오빠에게 고백을 받고, 커뮤니티의 댓글을 구경하며 깔깔거리다가...
"아..."
혜지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왜 그래, 여보? 악몽이라도 꿨어?"
혜지는 다정스레 물어오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했다.
혹시 열이라도 있나 싶어 이마를 짚어오는 손길이 따스했다.
"... 아니야, 오빠. 그냥 몸이 찌뿌둥해서 그랬어."
"나도 그렇더라. 어제 우리 무리하긴 했나보다~"
현우는 장난스런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현우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혜지의 표정을 뜯어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어제의 바람직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현우는 그녀가 생각을 이어갈 틈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자신을 응시하는 새카만 눈동자에는 부정적 감정이라 할 만한건 서려있지 않았다.
"잘 잤어? 굿모닝이야, 자기."
현우는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행동과 목소리로 몸을 한껏 밀착시켰다.
살과 살을 맞대며 따스한 체온을 나눈다.
이런 스킨십에 약한 여자였으니 방금의 생각을 떨쳐버리기엔 충분할 터였다.
예상대로 혜지는 얼굴에 떠올렸던 미묘한 표정을 뒤로 하고 해맑게 웃었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맨날 나 나갈 때 늦잠만 잤으면서."
"아까 말했잖아. 우리 사귀고 첫 아침이니까. 조금 특별하게 깨워주고 싶었어."
현우는 부드러운 말과 함께 혜지의 이마에 쪽 - 하고 입술을 가져다댔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그녀의 입에서도 냄새가 날 것 같아 진한 키스를 하긴 싫었다.
"헤헤... 조금이 아니라 완전 특별했어!"
혜지는 헤실헤실 웃으며 현우의 입술이 머물다간 이마를 어루만졌다.
설렘으로 눈을 뜬 로맨틱한 아침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자신이 그 로맨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혜지는 현우의 체온에 몸을 맡기며 지금의 분위기에 조금씩 젖어들었다.
그럴수록 현우를 향한 사랑이 몽글몽글 샘솟았다. 벅차오르는 행복감도 함께.
"일루 와, 내 남친! 내가 꼭 안아줄게!"
혜지는 현우를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피부에 와닿는 그의 꺼끌꺼끌한 수염이 기분 좋았다.
그 모습에선 어제의 앙금 같은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우는 그녀의 품에 안겨 얼추 의도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일찍 일어난 보람은 충분했다.
그가 알람을 설정해둔건 혜지가 눈을 뜨고 조우할 첫 감정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혹여 자신보다 그녀가 먼저 눈을 뜬다면, 어제의 일을 혼자서 반추하다 회의감을 느낄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뒤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고 일어난 그녀의 생각이 어디로 튈지는 몰랐으니 말이다.
다행히 다정한 남자친구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녀의 하루를 시작부터 핑크빛으로 물들여줬다. 혜지는 잔뜩 행복감과 사랑을 맛보고 있는 눈치였다.
눈을 뜨자마자 직면한 달콤한 감정들은 어제의 상황에 대한 합리화를 한층 더 공고히 만드는 데에 큰몫을 할 터.
오빠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하다가도 역시 사랑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으로 기울겠지.
알바를 하면서도 굳이 어제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기보다 오늘 아침의 달콤한 기억에만 집중할 것이 뻔했다.
이 여자가 맹목적으로 사랑에 집착해오는 모습을 한두 번 본게 아닌지라 현우는 자신의 그런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
"사랑해 혜지야. 내 사람이 되어줘서 고마워."
그래도 지금까지의 멘트가 부족하진 않았을까하는 노파심에 현우는 또 한번 사랑을 입에 담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아주 작은 불씨 한 줌도 모조리 꺼뜨려버릴 생각이었다.
"나도 사랑해, 오빠. 오빠도 내 남자친구 해줘서 진짜진짜 고마워."
혜지는 현우의 정수리에 뺨을 비벼오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리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자신의 남자친구를 쓰레기라 믿고 싶은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혜지도 마찬가지였다.
불현듯 떠올랐던 어제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던 모습은 방금의 사랑고백에 덮혀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현우가 내민 정보를 훌륭히 취사선택했다.
오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정보,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정보는 수용하고, 그에 반대되는 정보는 적극적으로 배척한다.
자신이 꿈꾸는 남자친구의 이미지만 주워삼키며 자신이 원하는 행복감만 곱씹는다.
그건 눈물겹게 어리석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하기까지 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의 애정표현은 과할 것 같아 몸을 일으키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슬슬 씻으러 들어가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 현우의 귓가에 갑자기 혜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는 영원히 오빠꺼야. 어, 내 몸과, 마음은 다 오빠꺼야."
혜지는 말을 더듬으며 조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가 요구했던 사랑표현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행복한 미소 대신 불안감이 끼얹어져 있었다.
'오빠가 말한 규칙을 어긴건가? 늦게라도 말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 지금은 섹스중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녀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온몸의 피가 싸늘히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한순간 고장난 인형처럼 입과 손이 삐그덕거렸다.
오빠가 아무 말이 없자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어물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왜 그래 혜지야."
무심히 물어오는 오빠의 눈동자를 마주보려니 그녀의 어깨가 떨려왔다.
"아... 그, 그... 제가, 아니, 내가..."
혹시 자신의 실수에 오빠가 또 화가 난걸까. 그래서 지금 자신을 추궁하는 것일까.
잔뜩 굳어버린 혀는 제대로 된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을 더듬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가, 오빠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사랑한다고 말을 못 해서... 그, 바로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래도, 오빠가, 오빠가, 실망 했을까봐 그랬어. 미안해..."
현우는 혜지의 그런 모습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했다.
어제의 폭력이 어느 만큼이나 이 여자를 길들여놓았는지를 똑똑히 실감할 수 있었다.
방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개장수 앞의 개처럼 온몸이 굳은 채 파들파들 떨어대는 암캐년이 있을 뿐이었다.
우선은 그 비정상적인 불안을 약간 달래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괜찮아. 지금은 그런 역할놀이를 하는게 아니었잖아. 그리고 사랑한다를 그렇게 표현해달라고 말한건 그냥 부탁한거였지...”
현우는 끝말을 흐리며 혜지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커다래진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게 보였다.
"암캐 정혜지한테 내린 명령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혜지는 그제서야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그녀의 귀에 들어온건 괜찮다는 말,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수십 번이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처벌을 합리화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오빠의 분노가 얼마나 정당한지를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잘못하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한다'는 규칙과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잘해야한다'는 규칙을 무의식에 깊이 새겨넣었다.
그녀의 저항의지는 현우의 혀 끝 아래서 수십 갈래로 토막난지 오래였다.
"응응... 난, 혹시라도, 그... 오빠가 기분 나빴을까봐, 그럴까봐..."
"괜찮아. 하나도 기분 안 나빴어. 내가 어제 화냈던게 신경쓰여서 그래?"
"아냐아냐, 내가 먼저 약속했는걸, 뭐든지 하겠다고. 근데, 그 내가 실수해서... 그래서 오빠 실망시켰으니까... 오빠가 화날만 했다고 생각해..."
혜지는 스스로에게 반복하던 합리화의 자기암시를 기계처럼 입에 담았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인지, 현우에게 하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현우는 자신의 물음에 훌륭한 정답만을 말하는 혜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어제의 폭력은 돌발적이었지만, 오늘의 이 상황을 곰곰이 살펴보니 놀랄 만큼 효과적이었나보다.
현우 자신도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이만큼 무너져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PTSD라는건가?'
현우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히든피스를 발견한 기분이다.
이 여자가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조교가 그만큼 치밀하고 섬세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둘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부터 가정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지독한 외로움으로 병들어 있던 여자.
그런 그녀에게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운명적인 남자가 되어주고 사랑으로 칭칭 옭아맸다. 결코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자유의지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온갖 간사하고 교활한 말로 그녀의 영혼을 섬세히 망가뜨렸다.
현우는 좋은 재료와 좋은 장인이 만나 좋은 작품이 탄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혜지가 자신의 입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에 일단은 그런 감상을 묻어두고 입을 열었다.
"맞아, 내가 어제 화냈던건 네가 내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어린애 장난처럼 굴어서 그랬던거야. 너도 어제 다 이해한다고 했었지?"
"응응, 맞아... 나 진짜 다 이해해. 그래서 하나도 안 서운해. 진짜야."
"나도 지금은 화 다 풀렸어. 여보가 다음부터 더 잘하겠다고 충분히 약속해줬으니까."
혜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마. 그럼 내가 더 미안하잖아. 자기가 잘하면, 절대로 다시 그럴 일 없어.”
현우는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하지만 방금의 말을 뒤집어보면, 혹시라도 잘못하면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말.
실제로 현우는 앞으로 체벌을 어떻게 사용할 것지에 대해 메뉴얼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뇌는 어제의 끔찍한 경험을 겪고나서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만들어낸게 분명했다.
아마 원래의 트라우마를 사랑으로 찍어누르고 체벌을 합리화시키는 과정이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나보다.
방금까지 불안장애라고 착각할 만큼 몹시도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의 눈치만 살폈다.
병들어 있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게 재밌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상황이 한층 더 재밌어져버렸다.
이건 또 얼마나 이 여자를 몰아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아침부터 즐거워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체벌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한없이 다정한 연인을 연기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
다음의 체벌시 '오빠는 원래 나를 몹시 사랑하지만, 자신이 잘못해서 화가 났다'라는 믿음에 무게를 실어줘야했다.
그 믿음이 확고해질수록, 그녀는 '날 사랑해주는 오빠'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모든 체벌을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죗값을 치를테니 다시 자신을 사랑해달라 온몸으로 애원하겠지.
현우는 미래를 간단히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타구니에 급속도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잘만 이용한다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할 강력한 패를 얻었다.
그녀의 정신병적 증세를 섬세히 조각해나간다면, 되도 안한 연인 놀이를 그만 둬도 절대 배신하지 못할 노예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지금처럼 노예의 역할을 연기하는 인간이 아니라, 말그대로 인권따윈 존재하지 않는 비참한 성노예가 될 것임은 자명했다.